소설리스트

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96화 (96/153)

96화

“안쪽으로 모셔줄래?”

또 의외로 얼굴을 마주하면 아무렇지 않을지도 몰라.

헤어질 때도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율렌, 아르반 보고 싶지 않아? 같이 갈래?”

그래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누구 하나 끼고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에 유일하게 내 곁을 지키고 있던 율렌을 찔러보았다.

“나? 주인을 보러 가도 된다고?”

내 제안에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율렌의 꼬리가 세차게 좌우로 흔들렸다.

녀석은 붕붕 소리가 날 만큼 꼬리를 치면서도 나름 점잔을 빼는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나 들키면 안 되잖아… 근데 가도 되나?”

“평소에는 아르반을 응접실로 부를 일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개인 응접실에서 보는 거라 괜찮아. 같이 가자.”

“그으래? 좋아! 같이 가자!”

율렌은 조금 전까지 어떻게 참고 있었는지 모를 만큼 신이나 방방 뛰다가 휙 날아올라 내 어깨 위에 자리 잡았다.

너무 신나 하는 녀석의 반응에 조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아르반이 엄청 보고 싶었구나…. 다음번에도 종종 응접실로 불러서 만나게 해줘야겠다.’

그와 마주했을 때 어색한 기분이 완전히 가시게 된다면.

나는 율렌을 어깨에 매달고 내 개인 응접실로 향했다.

사실 몇 걸음 뗄 것도 없었다.

침실과 연결된 문이 있었기에 밖으로 나갈 필요조차 없었으니까.

‘좀 더 멀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아니다. 그랬다면 율렌을 데려가는 데 문제가 있었겠지.

공작저 내에서 바구니를 들고 다닐 수도 없으니까.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들어섬과 동시에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가 아르반의 등장을 알려왔다.

똑똑-

“아르반 카넬로웰입니다.”

사용인을 대동하지 않았는지 직접 들려오는 아르반의 목소리에 멈칫한 나는 한 박자 늦게 답을 했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걸음 해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필요치 않음에도 괜히 서먹하게 느껴졌기에 나도 모르게 예를 갖춘 인사가 튀어 나갔다.

내 인사를 부드럽게 받아넘긴 아르반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오다가 불현듯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마치 나를 향해 손을 뻗는 것과 같은 그의 행동에 일순 몸을 경직시켰다.

그러나 곧이어 그의 손바닥과 충돌하는 은빛 드래곤을 보고 작게 입을 벌렸다.

“주인!! 보고 싶었어!! 나 안 보고 싶었어?”

마치 포수가 공을 받듯이 배려 없는 아르반의 손길에 붙잡혔음에도 좋다고 그의 손바닥에 매달려 비비적거리는 율렌이 불쌍해 보였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저럴까.’

내가 잠시 아르반에게 느꼈던 어색함도 잊고 율렌을 보고 있자 아르반은 평소와 같은 무심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이 자리에 있는 거지.”

제삼자의 입장에서 듣는 나조차 상처받을 만큼 아무 감정이 섞이지 않은 음성이었다.

단지 정말 율렌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를 궁금해할 뿐인 목소리.

“당연히 주인이 보고 싶으니까지!! 나 많이는 아니지만 엘리랑 지내면서 마력도 좀 회복했어!”

“아아, 회복하고 있다니 다행이군.”

‘저기, 영혼 좀 실어서 대답해주세요.’

붕붕 소리가 날 만큼 열심히 흔들리는 꼬리가 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르반이 제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율렌의 기분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그는 제 손에 잡혀있는 율렌이 거슬리는지 녀석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말없이 어깨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자 율렌이 잽싸게 그 어깨로 자리를 옮겨갔다.

그의 어깨에 오르자마자 얌전을 떨며 만족스러운 듯 자리 잡는 녀석의 모습에 어쩐지 기가 찼다.

‘딱 배부른 고양이 같네.’

내 친구네 고양이랑 같이 놔둔 것도 아닌데, 어쩜 둘이 하는 행동이 똑같을까 몰라.

어이가 없어 녀석을 한참 보고 있자니 내 눈빛을 느낀 녀석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뭐.

다른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녀석의 표정이 그리 묻고 있었다.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노려보자 눈으로만 대화를 나누는 우리의 모습을 보다 못한 아르반이 말을 걸어왔다.

“엘리,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아차 싶었다.

내가 먼저 자리를 권했어야 했는데, 손님인 그가 내게 자리에 앉으라는 권유나 하게 만들고.

참 잘하는 짓이다, 진짜….

“미안해요. 계속 서 있게 만들었네요. 앉으세요.”

“아닙니다. 저야 몇 시간을 서 있든 관계없지만, 당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덤덤히 얘기하며 자리에 앉는 아르반의 모습에 나는 순간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니까, 지금 날 걱정해서 말했다는 거야…?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율렌이 크게 흥,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라는 듯이 얘기했지만 아르반은 녀석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신성력에 의지하는 건 여러모로 좋지 못하다.”

그 의견에는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아무리 부작용이 없고 부담 없이 회복할 수 있다지만 내가 평생 율렌을 옆에 끼고 살 것도 아니고.

‘아니, 만약 끼고 산다고 해도 너무 신성력에만 의지하면 안 돼.’

그렇게 말하는 지금도 솔직히 의지하고 있긴 하지만….

앞으로는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녀석에게 회복을 부탁하는 건 자제해야지 싶다.

…과연 실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하여튼.

“그건 그렇죠.”

내가 아르반의 의견에 맞장구치자 율렌이 주둥이를 삐쭉거렸다.

“좀 의존하면 어때서… 많이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율렌이 구시렁거리거나 말거나, 아르반은 그런 녀석을 무시하고는 내게 본론을 꺼내왔다.

“엘리, 다름이 아니라 전에 말씀하셨던 화가에게 연락이 닿아 뵙자고 했습니다.”

“화가? 무슨 그림을 그리려고?”

율렌은 아르반이 말문을 트기 무섭게 질문해 왔다.

그러자 아르반은 녀석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냉정히 읊조렸다.

“궁금한 게 있으면 나와 엘리의 대화가 끝나고 묻도록.”

“…….”

순식간에 풀이 죽는 율렌을 보고 내가 다 안쓰러워 아르반을 말렸다.

“너무 뭐라 하지 마요. 애가 당신 반가워서 그러는 건데.”

…말하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갑자기 예전에 봤던 드라마의 내용을 떠올렸다.

지금 우리 상황이 마치 그 드라마에 나오던 장거리 부부를 연상케 했다.

그러니까, 내가 아내, 아르반이 남편, 율렌이 아이.

그리 생각하니 정말 찰떡같이 들어맞았다.

아빠를 보고 싶어 하던 아이가 흥분해 방방 뜨니 냉정한 아빠가 타박하고, 그런 남편을 나무라며 말리는 아내의 모습까지….

‘참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나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고 있는데, 아르반이 부드러운 어조로 내게 변명했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율렌이야 나중에 보면 되지만 당장은 당신께 전할 말이 우선이니까요.”

그 말이 또 틀리지는 않아서 율렌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의 의견을 수용하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율렌이 흥분하면 끝없이 떠들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산맥에서 처음 녀석을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여태 기가 빨리는 듯하니, 두말하면 입만 아프다.

“음,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긴 해요. 아, 저희 어디까지 얘기했죠?”

이상한 상상을 하느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잊어버렸다.

“화가에게 연락이 닿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 그래요. 셀리안에게… 연락이 됐다고요?”

벌써? 그에게 부탁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새 연락을 취했나 보다.

“예. 셀리안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 하긴. 아르반이 많은 하인들을 두고 굳이 우편부를 통해 편지를 보낼 턱이 없는데, 생각해 보니 이렇게 놀라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셀리안이 이상하게도 당신의 연락을 반겼다고 합니다.”

“네? 저를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눈만 깜빡이는데, 아르반은 내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말을 이었다.

“당신의 초상화를 그려줬으면 한다는 말을 전하자 반색하며 흔쾌히 승낙했다더군요.”

“음, 그냥 제시한 보수가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닐까요?”

얼마를 부르든 그 세 배를 지급하겠다고 말을 전해두었으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더 신기할 터였다.

하지만 아르반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사실 처음에는 당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의 초상화를 의뢰하고자 한다 말을 전했습니다만…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금액을 제시했는데도요?”

“예. 그랬다더군요.”

허…. 나는 당황해 작게 입을 벌렸다.

원래 작업비를 얼마나 받는지는 모르겠으나 세 배가 적은 금액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단칼에 거절했다고?

그는 의문과 당황이 뒤섞였을 내 얼굴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원하는 금액이 있냐고 물어도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라며 거절했다더군요. 그 때문에 이리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뇨, 늦다니 전혀요. 그런데… 그리 완고하게 거절하던 분을 어떻게 설득하신 거예요?”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쪽에 보낸 보좌관이 여덟 번째 방문에서 대체 어떤 이의 초상화가 필요하기에 이러는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합니다.”

나는 약간 질린 기분이 되었다.

그 며칠 사이에 여덟 번이나 방문했다니, 그럼 하루에 몇 번을 찾아갔다는 말이 아닌가.

찾아간 사람도 대단하지만, 퇴짜를 놓은 사람도 어지간히 고집이 센 모양이었다.

‘그럼 뭐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인 거지.’

의문만이 증폭되었다.

“그전에는 제 초상화를 그려달란 말을 전하지 않았던 건가요?”

“제가 직접 방문한 게 아니라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굳이 전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겠죠.”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셀리안의 질문에 당신의 초상화를 의뢰할 예정이라 답하자, 그자의 안색이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굳혔다.

“그래서 혹시 당신이 그자를 아는지 여쭤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리한 안색에 암녹색 머리카락, 샛노란 눈동자를 지닌 남자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아직 최근의 기억까지 다 습득한 게 아니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