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그런 아몬의 한마디에 리엘리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내가 우리 애기를 외롭게 만들었다니…!’
물어본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지만 막상 외롭다는 답이 돌아오니 심장이 덜컹거렸다.
“미안해… 누나가 약속을 연이어 잡는 바람에…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을 거야.”
“…….”
리엘리가 미안한 마음에 아몬을 끌어안자 아몬은 아몬대로 죄책감에 눈을 질끈 감고 그녀의 품에 제 얼굴을 가렸다.
외로웠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몬은 리엘리가 저택을 비울 때면 큰 탈력감을 느끼고는 했으니까.
비록 매 순간 함께 있는 게 아님에도 그녀가 저택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아몬은 크게 안정을 찾곤 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리엘리가 저택에 존재치 않을 때면 이유 모를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라고는 오직 리엘리, 그녀 외에 존재치 않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나를 더 신경 써주시란 걸 알고 있어.’
그렇기에 의연하게 대답하는 대신 더욱 약하고 가련한 아이인 양 굴었다.
누님이 없으면 안 된다고. 외롭고 쓸쓸하다고.
그리고 누님이 제 예상과 같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끌어안은 순간.
안도와 불안이란 공존할 수 없는 감정이 동시에 아몬의 마음에서 피어났다.
당장은 이 품에서 안온을 찾을 수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언제까지 누님의 눈에 애처로운 동생으로 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에서 불안을 느꼈다.
그저 진심을 뱉어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누님의 저런 표정을 끌어낸 자신이 역겨웠다.
상냥한 누님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누님께서 자신만을 바라봐주셨으면 했다.
그리고 이게 아몬이 누님의 관심을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누님께서는 나 같은 것과 저택에 머무시는 것보다 밖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게 즐거우시겠지.’
아몬은 제 어두운 표정을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가렸다.
저택에서만 지내던 누님께서 친구를 사귀고 밖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신 이상 아몬은 누님의 유일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언제까지 누님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이 모습을 유지할 수도 없고.’
아몬은 한창 성장기의 아이였다.
더구나 요즘은 전과 비교할 수조차 없이 잘 먹고 좋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에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중이었다.
‘그래… 언제까지나 누님께 사랑스럽고 애처로운 모습으로 남을 수 없어.’
그럼 어떻게 누님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요즘 아몬의 최대 관심사라 할 수 있었다.
매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이렇다 할 좋은 생각은 나지 않았다.
누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된다는 것도 고려해 보았지만 단시간 내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님의 눈길 한 번이면 족하다 여겼는데.’
제 상상보다도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는 지금에서는 오롯이 누님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싶어졌다.
욕심부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마음이 동했다.
그런 아몬의 생각을 모르는 리엘리는 그저 미안한 마음에 홀로 외로웠을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아몬을 안고 있던 리엘리는 제 품에서 말이 없는 아몬을 들어 올려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아몬의 무게가 그녀를 눌러왔지만, 워낙 가벼운지라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다만 갑자기 그녀의 위로 엎어지게 된 아몬만이 당황한 듯, 크게 뜨인 눈으로 리엘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리엘리는 그런 아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이제 삐진 건 풀렸어?”
“…삐진 적 없어요.”
리엘리가 일부러 장난스레 질문하자 아몬이 작게 웅얼거렸다.
“그래, 우리 아몬은 삐진 적 없지. 다 누나가 잘못해서 그래.”
옅게 웃으며 자신을 달래듯이 등허리를 쓸어주는 누님의 손짓에 아몬은 긴장시키고 있던 몸의 힘을 풀었다.
그러자 리엘리가 잘했다는 듯이 허리를 토닥여왔다.
“음, 아몬. 우리 다 같이 호수로 놀러 가기로 했던 거 말이야.”
“네.”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를 좀 해봤는데, 아무래도 날씨가 꽤 추워서 호수보다는 새벽 축제를 구경하는 편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와서.”
아몬은 리엘리가 입을 연 순간부터 그녀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리엘리 역시 아몬이 제 허벅다리에 앉자 상체를 일으켜 아이가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등을 받쳐 주었다.
그러다 아몬이 내려가려고 하자 리엘리는 순순히 아이를 놓아주며 이어 말했다.
“아몬은 어때? 새벽 축제 구경도 좋을 것 같은데.”
아몬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누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다른 사람들과는 합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아몬은 순간 여기서 제가 축제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누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궁금해졌다.
“…축제도 좋아요. 하지만 호수, 가보고 싶었는데….”
그러나 아몬은 투정을 부리는 대신 누님의 동정심을 사고자 마음먹었다.
이쪽이 더 효과적일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몬이 약간 실망한 듯이 말끝을 흐리자 리엘리가 당황하며 아몬의 손을 붙잡아왔다.
“호수로 나들이 가는 거 많이 기대했었구나.”
아몬은 자신을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는 누님의 표정을 살피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철저하게 그녀의 동정심을 끌어올리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리엘리는 아몬이 유도한 대로 아이를 더 안쓰럽게 여겼다.
그 사실을 눈치챈 아몬이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 슬쩍 위로 굴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누나는 칼리온 호수… 보러 가고 싶지 않으세요?”
동그랗고 커다란 눈으로 호소하듯 은근히 묻는 가녀린 목소리.
리엘리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가여워 보이는 아몬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어, 누나도 당연히 가고 싶지. 그, 하지만 요즘 날씨가 너무 추워서 호수보다는 축제 구경 쪽이 나을 것 같길래….”
리엘리는 변명을 늘어놓다 말끝을 흐리며 어물어물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자신이 잘못한 것 같아서.
‘내가 죄인이지…. 우리 아몬이랑 호수에 가기로 약속을 했으면 호수가 꽝꽝 얼어붙어도 그 위에서 썰매를 타면 되는 것을, 웬 놈의 축제를 간다고 해서는….’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이내 다른 방법을 떠올리고는 리엘리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몬, 그럼 우리끼리라도 다녀올까? 단둘이. 어때?”
그 제안을 기다리고 있던 아몬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하지만 이내 잽싸게 그녀의 시선을 피해 바닥에 눈길을 고정하며 살살 고개를 내저었다.
“…저 때문에 일부러 가시는 거라면 괜찮아요.”
아몬은 누님의 제안을 덥석 무는 대신 약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누님이라면 이렇게 거절했을 때에 더욱….
“무슨 말이야. 당연히 누나도 가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지. 안 그래도 칼리온 호수의 전경을 꼭 보고 싶었는데 다들 축제를 가자고 해서 좀 아쉽던 참이었어.”
아몬은 제가 바라던 바를 이루었다는 기쁨에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요?”
그런 아몬의 눈빛을 호수에 놀러 가보고 싶단 기대로 가득 찬 어린아이의 순순한 눈망울이라 착각한 리엘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아몬도 누나랑 같았다니 너무 다행이지 뭐야. 둘이 같이 다녀오면 되겠다. 그렇지?”
아몬은 방긋 미소 지었다.
“맞아요.”
“축제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까 호수는 일정 조절해서 빨리 다녀오도록 하자.”
“네.”
“참, 우리 축제 구경할 때 멜라니스 경도 같이 가는 건… 괜찮을까? 네가 불편하다고 하면 우리끼리 가고.”
“멜라니스 경이라면, 로즈니 선생님의 가족분이신가요?”
“응, 로즈니의 오빠야.”
“괜찮아요. 같이 가도.”
아몬은 약간 긴장한 듯 보이는 누님의 얼굴을 보고 이미 멜라니스 경이라는 자가 함께 가기로 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흔쾌히 대답했다.
누님과 단둘이 나들이를 하러 갈 수 있게 되었으니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
내가 다시 아르반을 마주하게 된 건 마지막 만남으로부터 며칠 뒤였다.
아몬과의 수업이 있기 전, 나를 만나러 온다는 그로 인해 잔뜩 심란해진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 좀! 가만히 앉아있어!”
계속 같은 곳을 빙빙 돌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율렌이 빽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지금 어떻게 가만히 있어?!”
그에 나 또한 지지 않고 큰소리를 쳤다.
정말이지, 방음 마법의 존재가 이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마법이 존재치 않았다면 허구한 날 소리를 질러대는 우리로 인해 율렌의 존재가 벌써 다 들통났을 테니까.
율렌은 내가 계속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답답하다는 듯이 앞발로 제가 누워있는 소파를 치며 목청을 높였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어? 이제 겨우 20분 남았는데. 주인이 오는 게 마음에 안 들기라도 해?”
“뭐? 벌써? 20분밖에 안 남았다고?”
나는 놀라 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하게 그가 방문하기로 한 시간의 20분 전이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더 초조해진 나는 괜히 거울 앞으로가 옷차림을 다시 점검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거울 속의 나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율렌이 누워있는 소파로 가 앉았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뭐가 문제인데?”
소파 위를 빨빨 기어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 율렌이 작은 앞발을 내 허벅지에 올렸다.
‘그 남자가 온다는 것 자체가 문제야.’
아직도 마음이 뒤숭숭했다.
율렌은 언제가 되었든 마력을 회복하게 되면 아르반에게로 돌아갈 예정이다 보니 그와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리 의아해하는 것도 이상한 반응은 아니지만, 지금에 와서 일일이 설명해 주고 있을 정신도, 시간도 없었다.
“아까부터 심박도 불안한 듯이 떨리고… 진짜 이상해. 주인이랑 무슨 일 있었어?”
“…별일은 없었어.”
사실 별일이 있었다.
다만 아르반에게 똑바로 물어보는 대신 혼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만 있기 때문에 찝찝하고 답답할 따름이었다.
한동안은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생각날 듯해 불편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나는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걸까.
속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아가씨, 카넬로웰 대공 각하께서 도착하셨어요.”
결국 좌불안석으로 율렌과 시간을 보내다 아르반이 도착했다는 세바니의 전달에 작게 숨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