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94화 (94/153)

94화

“하아….”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리 벅차다니….

리엘리가 깊은 한숨을 토해내자 옆에서 지켜보던 세이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저리 힘들어 보이니 무엇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설명한들 본인이 깨달아야만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게 감정적인 문제라면 더욱이.

세이린은 곁눈질로 창밖을 내다보고는 리엘리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려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엘리.”

“네?”

“아무래도 도착한 것 같습니다.”

“아.”

그제야 자신이 약속을 위해 이동하던 중이었음을 상기해낸 리엘리가 창밖을 내다봤다.

*

내 골머리를 썩이던 아르반과의 문제는 약속 장소에 도착함으로써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컨디션이 좋은지 활기 넘치는 로즈니는 내 예상처럼 격하게 세이린을 반겨주었다.

또한 걱정했던 루페르 역시 밝은 표정으로 세이린을 환영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델 남작님!”

“안녕하셨습니까, 멜라니스 경.”

이상하리만치 세이린을 반겨주는 루페르의 태도에 의아해하던 찰나, 로즈니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짓했다.

그러자 멜라니스 가의 사용인이 길쭉한 상자를 세이린의 앞에 내려놓았다.

“마침 오늘 엘리와 아델 경께 드릴 답례품을 구입한 참이었답니다.”

아하,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둘이 먼저 쇼핑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전에 저희 로즈니를 위해 배려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뭐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세이린이 상자를 뜯어보는 사이 내 앞에도 상자 두어 개가 놓였다.

“이쪽은 우리 엘리 거예요. 흐흥, 두 분을 위한 의상 역시 몇 벌 제작해드릴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우리 엘리라니.

나는 순간 당황해 로즈니를 바라봤지만,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니 세이린도 나를 엘리라고 불렀지.’

워낙 자연스럽게 칭해서 자각하지도 못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세이린을 쳐다봤다.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제일 유들유들한 사람이다.

세이린은 저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슬쩍 눈웃음짓고는 선물을 꺼내 들었다.

“…검이군요.”

어쩐지 상자가 유독 기다랗다 싶었더니, 검이 들어서였구나.

나는 세이린이 들어 올리는 검을 유심히 살폈다.

‘생각만큼 화려하지는 않네.’

그리 생각하며 이번에는 내 앞에 놓인 상자를 풀었다.

상당히 화려한 머리 장신구가 들어있었다.

누가 봐도 로즈니의 취향이 다분히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는 모양새였다.

스릉-

그때 귓가를 스치는 쇠붙이 소리에 고개를 들자 세이린이 검을 빼 들고 날을 살피고 있었다.

“어떠십니까, 남작님.”

루페르는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세이린에게 물었다.

아마 제가 준비한 선물이 그녀의 마음에 드리라는 확신이 있는 듯했다.

“미스릴 검이군요. 이런 검을 제가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선물이란 말에 반색했던 초반의 태도와 달리 검을 살핀 후의 세이린은 진지한 낯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더 가치 있는 검인 듯했다.

“물론이죠. 오직 남작님을 위해 준비한 검이니 거절하신다면 달리 주인이 없습니다.”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루페르는 검을 높이 평가하는 세이린의 목소리에 환히 미소 지었다.

그에 세이린은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저 허리춤에 걸려있던 검을 풀고 루페르가 건넨 검을 매달았다.

“그럼 감사히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엘리, 엘리도 어서 마저 풀어 보세요.”

세이린이 검을 받자 기다렸다는 듯이 로즈니가 나를 독촉했다.

나는 마지 못해 나머지 상자를 열어봤다.

하나는 시계였고 나른 하나는 브로치였다.

브로치… 브로치?!

나는 멍하니 브로치를 내려다보다 휙, 고개를 들어 로즈니를 바라봤다.

이제 보니 그녀의 가슴팍에 같은 디자인의 색만 다른 브로치가 떡하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짓해 세이린에게도 작은 상자를 건넸다.

그 안에도 역시 같은 디자인의 브로치가 들어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사실 이건 이전부터 준비했던 선물이랍니다. 완성됐단 연락이 와서 오늘 찾을 수 있었는데, 아델 경께서 마침 이렇게 딱 맞춰 와주셨네요.”

“로즈니, 갑작스러울 수 있지만 편히 세이린이라 불러주시겠습니까.”

“어머, 물론이죠. 세이린.”

세이린은 검을 부담스러워했던 것과 달리 그저 환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브로치를 착용했다.

“감사합니다, 로즈니.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

나 또한 처음의 얼떨떨함을 탈피하고 격양된 어조를 뱉어냈다.

“저도 평생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정말 고마워요.”

이제는 이 작은 보석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일까, 미약하게 손끝이 떨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슴 한편이 뭉클해지는 느낌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가 더 감사하죠. 나중에 제가 만들어 드릴 의상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로즈니는 부끄러운지 화제를 돌렸다.

우리는 본래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만난 것처럼 열띤 대화를 나눴다.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로즈니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참! 전에 말씀하셨던 나들이, 르미엘도 좋다고 했어요.”

“아, 정말요?”

나는 반색하며 기뻐했다.

그러자 옆에서 세이린이 마침 그에 대해 생각난 바가 있다는 듯이 내게 말을 걸었다.

“엘리, 꼭 호수가 보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다른 곳을 방문하는 건 어떤가요?”

갑작스러운 세이린의 제안에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혹시 호수 안 좋아해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요즘 같은 날씨에는 호수가 얼어붙는 경우가 잦을 겁니다. 꼭 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차라리 2주 뒤에 있을 새벽 축제를 구경하심이 어떠십니까?”

“아, 그러네요.”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어느덧 한겨울을 향해 나아가는 날씨였기에 언제 호수가 얼어붙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나날이 더욱더 추워지고 있으니, 칼리온 호수는 나중을 기약하고 새벽 축제를 구경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로즈니 역시 세이린의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새벽 축제라.

얼마 전 에바가 신이나 조잘조잘 떠들어댔던 행사였다.

한해가 지나고 새해로 넘어가는 밤에서 새벽 사이에 열리는 축제로, 그날을 기점으로 사흘간 진행된다고 들었다.

‘둘째 날에는 마법사를 초빙해 불꽃놀이랑 퍼레이드를 진행한다고 했지, 아마.’

확실히 볼거리가 많을 것 같긴 했다.

“그럼 호수는 날이 풀리면 가도록 하고, 축제를 구경하기로 해요.”

나는 루페르 쪽을 힐끗 바라봤다.

그리고 보니 이곳에 모인 사람 중 나들이에 포함되지 않은 이는 루페르가 유일했다.

‘이왕 가는 김에 같이 가자고 물어볼까.’

내가 루페르를 빤히 바라보자 시선을 눈치챈 그가 왜 그러냐는 듯이 웃어 보였다.

“저, 혹시 괜찮으시면 멜라니스 경도 함께 가시는 건 어떠신가요.”

솔직히 다소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그것도 좋군요. 로즈니와 동생분도 함께 가는데, 경께서만 빠지는 것도 서운한 일이지 않습니까.”

세이린이 맞장구치며 나를 거들어왔다.

다행이다, 당황스러워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녀 역시 반기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혼자만 따돌리는 기분이기도 하고, 놀러 가는 건 사람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리고 기왕이면 멜라니스 가의 세 남매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어 주고 싶기도 했다.

‘이건 순전히 내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로즈니의 경우에는 르미엘에게 정말 관심이 없었을 뿐인 것 같으니 친해질 여지가 보였지만 루페르는 달랐다.

그가 르미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어머니인 멜라니스 백작 부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사실 그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여태 여유롭게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던 루페르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미묘하게 굳어진 표정의 그는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곧장 거절하지 않고 고민해주는 것이니 그게 어디야.’

단칼에 거절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언뜻 로즈니 쪽을 바라보니 그녀 역시 조용히 루페르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딱히 무어라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치 그가 어떤 선택을 하건 존중하겠다는 듯이.

“재미있을 거예요. 같이 가요.”

쉽사리 답하지 못하는 그에게 다시 한번 권했다.

나는 조금 초조한 마음으로 그의 다물린 입술을 응시했다.

아마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는 절대 르미엘과 가까워질 수 없을 것이다.

남의 제안을 수락하지도 못하는 마당에 제가 스스로 손을 뻗지는 못할 테니까.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침묵 끝에 그가 입을 뗐다.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나는 방긋 미소 지었다.

다행이다, 르미엘. 네 오빠도 너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봐.

*

다음을 기약하고 자리를 파한 뒤, 곧장 공작저로 돌아온 리엘리는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아몬에게로 향했다.

답답한 속내를 세이린에게 털어놓고 돌아오는 길, 가장 먼저 생각난 게 아몬이었다.

‘어차피 머리 터지게 고민한다고 당장 결론이 날 만한 일도 아니고.’

그러니 우리 동생님 얼굴 보고 힐링하는 게 더 건설적인 일일 터.

“아몬, 누나야.”

“네, 들어오세요.”

리엘리는 안으로 들어서며 문 앞까지 나와 있는 아몬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분명 아침에도 보았던 얼굴인데 어쩜 이리 반가운지.

“오늘 혼자 식사하느라 외롭지 않았어?”

아몬은 리엘리의 질문에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양손을 꼭 그러쥐고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외로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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