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미안해요.”
내가 잔뜩 풀 죽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만 하자 세이린이 조심스레 나를 살펴왔다.
그녀는 내 눈치를 보다가 슬쩍 자리를 옮겼다.
내 옆에 자리를 잡은 세이린은 다리 위에 모아 쥐고 있던 내 손을 감싸왔다.
“왜 그래요.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각하께서 괴롭혔나요?”
세이린은 내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그녀의 질문을 거절하는 것 외에 다른 뜻이 담겨있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오히려 제 쪽에서 괴롭혔다고 보는 게 맞죠.”
나는 작게 웃었으며 답했다.
그럼에도 내 표정이 영 별로인지 세이린의 근심 어린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엘리,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게요.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게 맞나요?”
그녀의 목소리에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시선을 내려 내 손을 감싸고 있는 세이린의 손을 눈에 담았다.
겉보기에는 손가락이 길쭉하고 곧게 뻗어 예쁘다고 할 정도지만, 만져보면 깜짝 놀랄 만치 단단한 손이었다.
마치 그녀 자신처럼 강인하게 느껴지는.
나는 세이린에게 내 혼란스러움을 털어놓는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라면 분명 내 말에 귀 기울여 줄 것이다.
‘…내가 진짜 다른 세계에 와서 마음이 약해지긴 했나 봐.’
지서안으로 살아갈 당시의 나는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리 별것도 아닌 고민이라면 더더욱.
애초에 나는 타인에게 고민이나 괴로움을 토해낸다는 것이 익숙지 못했다.
어릴 적의 기억 탓이었다.
예전, 아빠가 집을 나간 이후.
나는 한창 엄마에게 칭얼대곤 했다.
당시의 나는 누군가 내 고통을 알아줬으면 했고, 그 대상은 자연스레 가장 가까운 사람인 엄마가 되었다.
여느 때처럼 엄마를 찾고 있던 나는 우연히 몰래 숨죽여 울고 있는 엄마를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은 어린 나에게 퍽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엄마도 힘들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다.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뒤늦게 알았다.
아, 엄마도 힘들구나. 그런데 나까지 엄마를 힘들게 만들고 있구나.
마치, 아빠처럼.
그 생각이 뇌리에 새겨지듯 남아버렸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타인에게 내 괴로움을 토해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아빠랑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
나는 아빠처럼 거짓된 행동을 하지 말아야지.
나는 아빠처럼 소중한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했다.
그로부터 20년쯤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내 생각도 많이 변했고 그 강박 역시 많이 사라졌다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닥치니 또 이렇게 망설이게 된다.
알고는 있다. 고민이란 속에 담아두는 것보다 입 밖으로 내뱉는 편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쯤은.
냉정하게 생각하면 내가 품고 있는 고민은 세이린을 힘들게 할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리 망설여지는 것은 여태 살아오며 쌓여온 습관 탓이겠지.
내가 입술을 뗐다 붙이기를 반복하며 망설이자 세이린은 말없이 손에 힘을 주어왔다.
그에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흔들림 없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 강인한 눈빛에 홀린 듯,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별것 아닌 지루한 얘기예요. 그래도… 들어주시겠어요?”
세이린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얼마든지요.”
길지 않은 한마디였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크게 다가오는 한마디였다.
*
리엘리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브로치에 얽힌 뒷이야기를 알게 된 세이린은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역시 주군을 좋아하는구나.’
다만 아직 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제 감정을 단순한 호감,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데 질투를 느끼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게 리엘리와 절친한 세이린이라 한들 예외가 될 수는 없는 법.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그래서… 미안해요. 제가 이렇게 질투가 많은 사람인 줄 몰랐어요. 그게 너무 미안해서….”
세이린은 고해성사하듯 제 마음을 털어놓는 리엘리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미안함에 제 눈치를 보면서도 입은 멈추지 않는 그녀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일단 제게 사과하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이 누구나 질투할 수도 있는 거니, 너무 괘념치 마세요.”
“세이린….”
세이린은 제 대답에 감동한 표정이 된 리엘리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태도에 힘입어, 리엘리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마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참… 주군께서도 당신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한데 이래서야.’
세이린은 제 주군에게 호출을 받았을 때 은밀한 명을 하달받았다.
바로 지금 향하고 있는 저녁 식사 자리에 동행하여 리엘리가 루페르에게 어떤 관심을 보이는지 알아보라는 명이었다.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주군께서 왜 이런 명을 내리는지 궁금했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그녀 역시 리엘리가 루페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이야기에 의아함을 느꼈기 때문도 있었다.
연회장에서는 전혀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이런 사적인 명을 받아보기는 또 처음인지라, 세이린은 내심 의외라 생각했다.
이쯤 되니 주군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노골적이어서야, 모르는 편이 이상할 터였다.
하지만 그 이상한 일이 실제로 그녀의 앞에 앉아있는 리엘리에게 해당한다는 게 문제였다.
‘내게 이런 명을 내리실 정도라면 분명 엘리가 알 수 있을 만큼 티를 내셨을 것 같은데….’
그건 아닌 건가.
세이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자리에 함께했던 게 아닌지라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리엘리의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갈 때쯤 도출되었다.
‘설마….’
주군께서는 이미 있는 티, 없는 티를 다 내셨는데 엘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세이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얘기를 마치고 다소 머쓱해하는 리엘리에게 물었다.
“엘리, 혹시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있으십니까?”
“아뇨. 그럴 새가 어디 있었겠어요.”
리엘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혹시나 이상한 오해는 마요. 제가 아르반에게 호감은 가지고 있지만…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 감정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 않아요. 단지 친한 사이에….”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는 리엘리를 보며 세이린은 속으로 탄식했다.
‘정말… 이런 곳에서만 둔하시네요.’
하지만 세이린은 곧 저택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자라왔을 리엘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 이렇다 할 교류 없이 저택에서만 지내셨을 테니 제 감정을 쉽게 인정하기 힘들겠지.’
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오해였지만 결론적으로는 들어맞는 추론이었다.
리엘리는 이어지는 제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 듯한 세이린의 태도에 입술을 삐쭉였다.
“세이린, 제 말 듣고 있어요? 저 진짜 아르반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니까요?”
무릇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감정에 대한 확신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망설일 여지도 없이 제가 아르반을 좋아한다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내가 아몬을 좋아하고 세이린을 좋아한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확신이 드는 감정.
허나 리엘리는 아르반을 이성으로서 좋아한다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제가 느끼는 감정을 단순한 호감으로 치부했다.
세이린은 자신을 흘겨보는 리엘리에게 옅은 미소를 돌려주었다.
비록 알고 지낸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제 동생이 첫사랑의 고민을 털어놓은 것처럼 풋풋하고 귀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미소를 감추고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이린이 보기에는 감정을 자각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귀여운 아가씨의 모습일 따름이었지만 당사자는 진지하니, 그녀 또한 같은 태도로 대함이 마땅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얘기를 정리하자면 각하께 브로치를 드린 건 엘리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요. 근데 순순히 받으셔서 당황하셨다.”
“네.”
“뒤늦게 내포된 의도를 아시고 각하께 왜 받아주셨는지 물었는데 그 답은 엘리의 화가 난 모습을 보는 게 싫어서 그랬다.”
“맞아요.”
세이린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착실히 대답하는 리엘리가 귀여워 웃음을 참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크흠. 네, 그런데 대답을 듣고도 시원하지 않고 답답하시단 말씀이죠?”
“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네요. 어영부영 넘겨버리지 말고 더 자세히 물어볼 걸 그랬나요?”
세이린이 보기에는 더 물어볼 것도 없는 문제였다.
‘주군께서는 그냥 엘리, 당신에게 푹 빠져계신 것 같은데요.’
그걸 정작 본인만 모르고 있다.
평소에는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님에도 그게 그녀 자신의 연애 문제로 얽혀드니 누군가 눈 앞을 가려버리기라도 한 양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
그게 귀엽고도 안타까웠다.
세이린은 잠시 어찌할까 고민하다 슬쩍 제 의견을 꺼내 보았다.
“아닙니다. 더 여쭤보지 않아도 이미 답이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각하께서 엘리에게 관심이 있으신 게 아닐까 싶은데요.”
그녀의 의견에 리엘리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사실 제가 느끼기에도 아르반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군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그렇지만 이성 관계에 있어서는 경험이 전무한 지라, 무엇 하나 확신을 갖기 어려웠기에 괜한 착각이라 여겼었다.
“…관심은, 있을 수도 있겠죠.”
친구 사이기도 하고, 자신은 어쨌든 로베르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녀이니.
‘공녀, 그래 공녀지.’
리엘리는 자신이 공녀라는 사실이 이렇게 거슬릴 수도 있다는 것에 놀랍기까지 했다.
‘세이린이 저렇게 말할 정도니 착각이 아니라 내게 관심이 있는 건 맞는 것 같아.’
자신 역시 그를 좋아하는 건 아닐지라도 호감은 품고 있으니 어쩌면 보다 가까운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가정이 들었다.
아르반의 관심이 자신이라는 한 사람이 아닌, 리엘리 로베르 ‘공녀’를 향한 것이라면?
…아니다. 그렇다면 브로치를 받은 이후 공작에게 청혼서를 넣었으리라. 그러니 어쩌면 세이린 또한 착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원했던 건 단지 친구로서의 자신이고, 그랬기에 브로치를 건네는 제게 당혹감을 느낀 것이다.
그러니 갈등했겠지. 그걸 받지 않는다면 내 기분이 상하게 될 테고, 그가 염려했던 것처럼 화를 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