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멜라니스 백작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백작 본인이 아직 젊으니 또 다른 후계를 보아도 무방했고 그게 여의치 않다면 그들에게서 본 손자에게 작위를 양도해도 그만일 터.
정 안 된다면 딸들에게 넘기는 방법도 있으니, 실상 문제 될 건 없었다.
만약 리엘리가 그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멜라니스 백작은 적극적으로 나서 둘의 결혼을 추진하려 들 것이 자명하다.
로베르 공작가와 이어질 기회인데 무엇인들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리엘리를 바라보는 아르반의 내깔린 눈동자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디까지나 엘리가 루페르 멜라니스를 선택했을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가 제게 결혼할 의사가 없음을 밝힌 지 불과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이성적으로는 결혼과 관련 없는 일로 그를 만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그의 냉정을 마모시켰다.
차라리 대놓고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자를 만나러 가느냐고.
‘하지만 이런 것까지 물어본다면 이상하게 여기겠지.’
아르반은 그녀 몰래 입안을 사리물었다.
거슬린다. 그러나 참아야만 했다.
아르반은 아직 리엘리에게 있어서 가까운 지인, 혹은 친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눈이 돌아 득달같이 달려든다면 그녀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볼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르반은 다른 방법을 이용해 정보를 캐내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는 리엘리가 먼저 이야기해주길 잠자코 기다렸다.
루페르 멜라니스와 만난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꺼낸 것으로 보아, 자신의 심중을 의심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곧 그의 예상처럼 리엘리는 다른 내색 없이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처음에는 몰랐는데 로즈니랑 비슷한 구석이 많더라고요.”
연회 날 루페르 멜라니스와 테라스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지 않았음에도 저렇게 이야기한다는 건, 제 생각보다 둘의 관계가 가까워졌다는 뜻일까.
아르반은 또다시 치미는 분노를 삭이며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기 위해 부러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많이 친해지신 모양입니다.”
“많이, 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대충 성격이 어떤지 짐작할 만큼은 알게 된 것 같아요.”
“식사는 꼭 세 분이 함께해야만 하는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지만 일단 셋이서 보기로 약속을 해서요.”
“친목을 다지는 목적이라면, 아델도 함께하심이 어떠십니까.”
아르반은 제가 직접 그 자리에 참석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리엘리의 또 다른 친구이자 그 자리에 참석해도 이상치 않을 인물, 세이린 아델을 대신 투입해 그녀의 동향을 살피기로 했다.
“세이린이요? 오늘 근무 중으로 알고 있는데요.”
갑작스레 세이린을 언급하는 아르반으로 인해 리엘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교대 시간이니 불러 드리겠습니다.”
리엘리는 세이린을 근무 도중 빼내 준다는 아르반의 제안에 잠시 갈등했다.
물론 그녀가 함께해준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환영이다.
로즈니 역시도 세이린을 반겨줄 것이고.
‘그리고 보니 루페르는 나뿐만 아니라 세이린에게도 빚이 있긴 하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무 언급 없이 약속 장소에 그녀를 데려가도 될는지 모르겠다.
‘역시 나 혼자만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리엘리가 머뭇거리다 결심이 선 듯한 표정을 짓자 아르반은 단숨에 그녀의 거절 의사를 읽어내곤 선수를 쳤다.
“아델이 요즘 피곤해 보이는 듯하니 함께 휴식을 취하고 오는 것도 좋을 듯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부디 사양치 마시고 함께 가시죠.”
리엘리는 세이린이 피곤해한다는 말에 달싹이던 입술을 도로 다물었다.
세이린의 상사인 아르반이 직접 피곤을 논할 정도라면 그녀의 상태가 꽤 나쁘다는 뜻이었다.
그런 친구를 일선에서 빼낼 기회가 제 한마디에 달려있으니, 다시 한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델이 비록 연회는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은 좋아하는 편이니, 분명 싫어하지 않을 겁니다.”
아르반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리엘리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엘리, 당신이 괜찮다면의 이야기지만요.”
아르반은 그녀가 곧장 고개를 끄떡이며 기꺼이 제안을 승낙하리라 여겼다.
허나 그 예상과 달리, 그녀는 조금 느릿한 어조로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세이린을 많이 신경 써주시네요, 아르반.”
묘한 기색이 담긴 리엘리의 음성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아르반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리엘리는 아르반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제 손끝에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미소가 가신 얼굴로 보아하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닌 듯해 보였다.
“예, 많이 신경 쓰는 편입니다.”
덤덤한 아르반의 대답에 그제야 리엘리가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아르반이 말을 이었다.
“당신의 친구이지 않습니까.”
“…세이린이 제 친구니까 신경 써주는 거다, 뭐 그런 말인가요?”
“예.”
“…….”
망설임 없는 아르반의 대답에 리엘리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동시에 듣고 싶지 않았다.
뭐라 형언하기 어렵고 이상한 기분이 샘솟는다.
브로치로 인한 오해로 생긴 일도 그렇고 아까 자신을 들어서 옮겨주겠다던 이상한 농담을 하는 등, 오늘 아르반은 여태 리엘리가 알고 있던 그와는 상당히 거리감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굉장히 신경 쓰이던 차였다.
그런데 저런 모호한 말까지 들으니 가뜩이나 혼잡한 머릿속이 더욱 정리가 되질 않았다.
결국 리엘리는 당장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보다 한발 물러나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호의, 거절하지 않을게요.”
“그럼 아델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아르반이 시종을 불러 세이린을 불러오라 명하는 사이, 리엘리는 생각에 잠겼다.
‘그냥 물어볼 걸 그랬나.’
아니다. 이게 잘한 일이다.
리엘리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손을 씻는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차가운 물줄기를 양손에 받아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약하게 흔들리는 수면처럼 미약한 떨림을 품고 있는 자색 눈동자가 비쳤다.
유독 세이린을 염려하는 듯한 아르반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걱정되면서도 뭔가가 마음을 수틀리게 했다.
또한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친구인 세이린을 그녀의 상사인 아르반이 신경 써 준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으니까.
‘내가 지금… 세이린을 질투하는 건가.’
리엘리는 순간 멍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세이린이라는 절친한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이었기에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외면하기도 힘든 진심이었다.
‘…아르반한테는 내가 제일 친한 사람이란 인식이 박혀있어서일까.’
아무리 그 대상이 세이린이라지만 자신과 가장 친하다 여긴 아르반이니만큼 그녀를 각별히 신경 쓰는 모습에 질투를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이린에게 질투를 느끼다니, 정말 못났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찝찝하기 짝이 없다.
리엘리는 여전히 복잡하고 답답한 속을 끌어안은 채 응접실로 돌아갔다.
오늘 저택을 방문한 것이 바로 이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함이었는데, 아르반과 대화를 나눴음에도 나아진 바가 없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 기분이야.’
리엘리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켰다.
*
“오늘 즐거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저도 즐거웠어요. 다음에 봐요.”
나는 여느 때처럼 내 손등에 입을 맞추는 아르반을 내려다봤다.
언제 봐도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렇기에 새삼스레 감탄하게 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손등에 입을 맞추며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직 저물지 않은 태양이 내 뒤편에 걸려있기 때문인지 아르반의 눈동자가 유독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마치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나를 옭아맸다.
나는 그의 목덜미를 장식하고 있는 사파이어 브로치와 그의 눈동자를 비교해 보았다.
‘색은 비슷하지만 역시 아르반 쪽이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남들의 시선에도 그리 느껴질까?
나는 아르반의 손을 놓고 마차에 올랐다. 어쩐지 멍했다.
“엘리,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사람을 불러다 놓고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방치해 두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다.
그런 와중에도 세이린의 얼굴이 내 예상과 달리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잠시 의아해졌다.
하지만 다 괜찮다는 듯이 온화한 얼굴로 웃어 보이는 세이린으로 인해 미안한 마음이 차올라 그 작은 의문은 금세 뒤로 밀려났다.
아무렴 어때. 이미 이렇게 된 것을 물릴 수도 없고.
“괜찮습니다. 저야 엘리 덕분에 이렇게 근무 도중에 쉴 수 있게 되었는데요. 아무런 불만도 없습니다.”
“아니에요.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불러내서 정말 미안해요.”
아까는 기분도 수틀리는 데다 아르반이 세이린을 데려가라 은근히 종용해왔기에 승낙했지만 실상 그녀의 의사를 묻지 않았으니 사과하는 게 마땅했다.
‘로즈니랑 루페르한테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고.’
약속 장소에 다른 사람을 데려가면서. 대체 아까의 나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나는 차오르는 한숨을 삼켰다.
…이미 데려왔으니 사과하고 양해나 구해야지.
“정말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엘리를 만나고 함께 할 수 있어 즐거우니까요. 그런데, 각하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네?”
무슨 일이 많았던 지라 허를 찔러오는 세이린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내가 예상보다 격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인지, 다소 난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생각이 많은 표정을 하고 있으시기에. 불편하시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냥한 세이린의 목소리에 나는 왠지 울컥해졌다.
조금 전 잠시나마 그녀에게 질투를 느꼈던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