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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91화 (91/153)

91화

‘참, 그리고 보니 아몬이랑 내 초상화도 하나 그리려고 했는데.’

전에 영상구를 통해 사진을 남길 수 없나 알아봤었다.

조사한 바로 남기는 건 가능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내가 원하는 것처럼 인쇄를 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말 그대로 구슬에 저장된 이미지를 들여다봐야 하는 데다 화질도 실망스러운 수준이었기에 영상구로 사진찍기는 바로 포기했다.

하물며 초상화라는 게 사실 하루 이틀 내에 완성되는 게 아니다 보니 시간이 있을 때 여유롭게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싶었다.

‘이제 사교계 데뷔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시간상 그 전에 그려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아르반, 이 그림 누가 그린 거예요?”

“셀리안이라는 화가입니다.”

셀리안, 셀리안.

나는 그 이름을 외우기 위해 입 안에서 몇 번 되뇌었다.

이 정도 그림을 그릴 정도의 화가라면 분명 유명한 사람일 터였다.

돌아가면 시녀장을 통해 바로 의뢰를 넣어야겠다.

‘많이 기다려야겠지? 저 정도 화가인데, 한 몇 년 정도 일정이 다 차 있다고 하면 어쩌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걱정되었다.

이곳에서나 지구에서나 존잘님께 의뢰를 하려면 기다림은 당연한 미덕이다.

‘하지만 지금의 난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돈이 많지.’

원래 받으시는 금액의 두 배, 아니, 세배를 부르면 일정을 당겨주시지 않을까.

돈으로 회유하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나는 이 셀리안이란 화가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초상화에만 신경을 쓰고 있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아르반이 입을 열었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드십니까.”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아르반의 물음에 퍼뜩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네. 안 그래도 저랑 동생의 초상화를 하나 그리려고 생각 중이었거든요. 돌아가면 연락을 취해보려고요.”

“셀리안에게 말입니까.”

“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고 제 초상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림은 훌륭하지만, 그는 무명의 화가입니다.”

“무명이었구나. 음, 근데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요.”

상관은 없었지만 의아하긴 했다.

이 정도로 잘 그리는데 무명이라니.

“그자는 따로 작품 의뢰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주지를 자주 옮기는 자라, 원하신다면 제가 연락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거주지를요?”

나는 순간적으로 리엘리에게 편지를 보내온 리셀이라는 남자를 떠올렸다.

접점이라고는 거주지를 자주 옮긴다는 사실뿐이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아르반은 내가 그에 대해 궁금해한다 여겼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예.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 일정한 곳에 거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조차 비슷하잖아?’

혹시 리셀과 셀리안이라는 화가가 동일 인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연이 비슷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법이다.

“의뢰를 넣으실 생각이시다면 제가 따로 연락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어디 사는지 알아요?”

“예. 전부터 계속 거주지를 편지로 보내오는지라.”

“…편지로요?”

뭘까, 정말 셀리안이 리셀인 거 아니야?

하는 행동이 리셀이란 사람과 너무 비슷하다. 근데 또 아름은 다르단 말이지.

과연 화가로서 활동조차 하지 않는 셀리안이 가명을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

‘내 생각이 지나친 거겠지.’

이곳에서의 연락 수단은 대체로 편지를 통한다.

사람에게 직접 말을 전달하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부유한 평민이나 귀족 정도였다.

나는 그저 우연이겠거니, 여기며 그에게 질문했다.

“셀리안이란 화가분이랑 잘 아는 사이인가 봐요.”

아르반은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제가 그를 구해줬던 적이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빚을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같더군요.”

“…아르반이 그 사람을 구해줬다고요?”

뭔가 아르반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누군가를 위해 몸소 검을 빼 드는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가지는 않았다.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전쟁 당시였고, 우연히 그의 목숨을 구했던 것뿐인데 끈질기게 따라붙더군요.”

아르반은 그 당시를 회상이라도 하는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제가 구했다는 자각도 없었습니다. 그자가 직접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겠죠.”

*

아르반은 전쟁터에서 마주했던 셀리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비쩍 마른 몸뚱이에 퀭하게 꺼진 눈두덩이, 산발인 머리를 하고 있음에도 그 샛노란 눈동자만큼은 맹금류와 같이 형형하고 날카롭게 빛나던 남자.

그가 찾아와 알현을 청했을 당시, 아르반은 스스로를 화가라 칭하는 셀리안의 주장을 믿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셀리안의 손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것이라기엔 너무도 흉이 많았다.

손끝은 어딘가에 심하게 갈리기라도 했는지 살점이 이상하게 아문 데다 손톱도 기형적인 형태였다.

설령 전장의 한복판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이라 해도 손끝에 그런 상처를 입는 일은 흔치 않았다.

하물며 예술을 하는 이들은 모두 제 손을 목숨과 같이 여긴다.

화가가 저런 상처를 갖고 있다는 건 확실히 이상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아르반에게 그런 문제는 중요치 않았기에 그대로 셀리안을 무시해버렸다.

전쟁이 종결되고 셀리안이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기억 속에서 잊혔을 터였다.

“종전 이후 그자가 저택에 찾아왔습니다. 직접 그린 그림을 들고.”

셀리안이 들고 온 그림은 한 소녀의 초상화였다.

그림 속 여자는 통상적인 미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동감 있고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마침 아르반은 마지막으로 제 초상화를 그린 적이 언제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겸사겸사 셀리안에게 제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그렇지 않아도 가신들로부터 초상화를 새로 그려야 한다는 요청을 계속 받아 귀찮았던 차였다.

셀리안은 2주에 걸쳐 아르반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경이로울 만치 섬세한 터치가 들어갔음에도 작업 시간은 놀랍도록 빨랐다.

그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경악했을 테지만 상대는 아르반이었다.

결과물을 받아든 아르반은 제 모습을 담아낸 초상화를 바라봤다.

실물과 똑같이 그려냈다는 뜨뜻미지근한 감상이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아르반은 더 이상 셀리안에게 볼일이 없었지만 셀리안은 그 이후로도 계속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또다시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면 자신을 불러 달라고.

제 목숨을 구해주었으나 대공인 그에게 금전으로 보답을 할 수 없으니 노동으로서 대신하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아르반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지만.

남들은 년에 하나꼴로 초상화를 그려댄다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은 수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 불러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르반은 자신의 제안에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셀리안의 편지를 아직 처분하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어, 저는 가능하면 빠른 편이 좋아요. 데뷔탕트 전에 그려두고 싶거든요.”

“전달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리엘리는 대답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슬슬 출발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찌어찌 해결됐고, 꽤 오랜 시간을 머물렀으니 이만 일어날 때가 되기도 했다.

“아르반, 저 이제 슬슬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저택을 떠나기 위해 운을 띄우는 리엘리에게 아르반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다른 일정이 있으십니까?”

“네, 실은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

“누구와 약속이 있으십니까.”

아르반은 저도 모르게 캐묻듯이 질문했지만 리엘리는 별다른 의문 없이 순순히 답해주었다.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요.”

친구들이라.

아르반은 그녀의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을 떠올렸다.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세이린 아델.

하지만 아델은 오늘 근무를 서고 있었기에 리엘리와 약속을 잡을 수 없었다.

다음으로 로즈니 멜라니스.

유명 살롱을 운영하고 있어 항시 바쁜 여자였지만 리엘리와 자주 어울리는 것으로 보아 이쪽과의 약속일 가능성이 컸다.

아르반이 알기로 그녀가 친구라 말할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을 제외한다면 저 둘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아르반은 미세하게 눈가를 좁히며 물었다.

“친구라면, 멜리니스 영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로즈니랑 로즈니의 오빠인 멜라니스 경과 저녁을 함께하기로 해서요.”

아르반은 루페르에 대해 떠올리며 구겨지려는 표정을 애써 펴냈다.

괜히 인상을 쓰다가 리엘리가 이상한 오해라도 하면 곤란하므로.

하지만 삽시간에 저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간다니. 그것도 자신과의 약속 바로 뒤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 주먹을 꽉 말아쥐면서도 아르반의 얼굴은 평온하게만 보였다.

필사의 노력으로 일그러지려는 안면 근육을 제어하고 있었으니까.

“루페르 멜라니스 경이라고, 혹시 아르반도 알아요?”

“…예, 모를 리가요.”

이미 제 생일 연회 날에도 그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었다.

함께 춤을 추고, 술에 취한 듯한 루페르 멜라니스를 사용인들의 도움 없이 그녀가 직접 부축하던 것까지.

아르반은 그날 리엘리가 선물한 브로치의 혼란에 이어 제 신경 줄을 갉아 먹는 두 사람의 잔상에 속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지금 와 돌이켜보니 그때 제가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질투에 불과했지만.

아르반은 여느 때와 같이 밝은 낯의 리엘리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그녀와 루페르 멜라니스는 연회 날 서로를 처음 마주했다.

그럼에도 그자를 포함해 함께 식사 자리를 갖는다는 건, 사실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했을 때 단 한 가지 이유일 수밖에 없다.

약혼.

귀족 사회에서 제 친구의 오라비나 동생과 결혼하게 되는 경우는 흔하디흔했다.

백작가의 장남이니만큼 가문을 이어야 하는 루페르 멜라니스.

하지만….

‘엘리가 원한다면 로베르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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