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여태 아르반이 세력을 키우지 않았던 건 황제가 두렵기에 그 눈치를 살피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황제를 증오하지만, 그 분노를 뛰어넘을 만큼 제 아비, 전 대공을 혐오했다.
어머니의 복수보다 아비의 숙원을 짓밟는 쪽을 원할 만큼이나.
그렇기에 제게 접근하는 모든 귀족들의 제안을 쳐냈고, 보다 높은 위치에 서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현재에 머무르며 자신의 대에서 카넬로웰을 지워내자 생각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져 버렸지만.’
아르반이 원하든, 원치 않든, 황제는 그를 위협할 터이니 지킬 것이 존재하는 한 물러설 수 없었다.
황제의 목을 친다.
그것만이 현 상황을 타파할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명백한 반역이었으나 그의 손에는 성검이 존재했다.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반역자임에도 정통성으로는 현 황태자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상황.
실로 아이러니했지만 그랬다.
성검의 선택을 받고 드래곤의 주인이 된 황실의 혈족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황위 계승서열 1순위 즉, 황태자로 승격된다는 법이 존재했으니까.
실제로는 그 특례법에 해당하는 인물이 존재치 않았기에 알고 있는 사람조차 몇 없는,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 한 법률에 불과했다.
한때 이를 이용해 황제가 되겠다며 성검을 찾아 헤매던 전 대공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평생 몰랐을 터였다.
하지만 정통성이든 뭐든 그건 아르반에게 있어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애초에 황좌에 앉는다는 자체가 그에게 있어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
‘아.’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꼭 내가 황제가 되란 법은 없지.’
황위 계승서열 1순위가 된다고 해서 반드시 황좌를 이어받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자신과 황태자를 제외하더라도 황가의 피를 이은 자들이 존재한다.
‘뜻이 있는 자가 있다면 그자에게 황좌를 양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어디까지나 아르반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작은 드래곤 한 마리가 노발대발하겠지만, 그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저기, 아르반. 차도 다 마셨겠다, 저택 구경을 좀 하고 싶은데요.”
리엘리가 빈 찻잔을 슬쩍 들어 보이자 상념에서 벗어난 아르반은 흔쾌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햇볕이 좋으니 산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여요.”
그녀의 부탁에 무심코 고개를 돌린 아르반이 창밖을 바라봤다.
여태 다른 생각에 빠져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 날씨가 화창한지, 우중충한지도 확인치 않았었다.
“말씀처럼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군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바로 일어날까요?”
“그러죠.”
리엘리는 아르반이 안내해 주는 대로 발을 옮기며 저택의 곳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 방향에는 사용인을 위한 숙소가 있습니다. 저쪽으로 향하면 서재가 있고 이쪽은···.”
“······.”
그녀는 멍하니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를 확인하니, 벌써 저택을 둘러보기 시작한 지 두 시간을 훌쩍 넘겨있었다.
‘미쳤어. 두 시간 동안 이러고 있던 거야?’
사실 본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마치고서는 뭔가 어색해서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바로 돌아가자니 피하는 것으로 보일듯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래도 주제가 주제였던지라, 분위기를 바꾸고자 제안한 산책이었는데···.
그가 설명을 시작하면서면서부터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대체··· 내가 여기 놀러 온 건지 집을 사러 온 건지 모르겠네.’
그는 마치 이 저택을 제게 판매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무엇 하나 허투루 지나치는 법 없이 설명해대고 있었다.
‘애당초 저택 구경한다는 말은 하지 말걸.’
리엘리는 내심 후회했다.
그녀는 슬슬 발도 아프고, 지겹기도 하던 차에 드디어 밖으로 나서는 아르반을 보며 반색했다.
탁 트인 실외로 나오니 좀 살 것 같았다.
“정원은 들어오시며 보셨으니 후원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네, 좋아요.”
걸치고 있던 외투를 좀 더 여미며 후원의 산책로를 거닐었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기분은 좋았지만 이제 정말 발이 아파서, 리엘리는 아르반의 팔을 슬쩍 잡아당기며 말했다.
“대충 다 본 것 같은데, 들어가서 좀 쉴 수 있을까요.”
그는 어쩐지 간절하게 들리는 리엘리의 목소리에 무심코 제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미처 살피지 못한 연무장과 별채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그녀는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며 덧붙였다.
“발이 너무 아파요. 다 못 본 건 아는데 그래도 본 저택이랑 정원을 봤으니 됐어요.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못 본 곳이야 다음에 다시 방문해서 구경해도 되는 일이다.
그는 리엘리의 발을 잠시 내려다보고는 조금 느리게 입을 열었다.
“많이 아프십니까.”
“네. 많이 아파요.”
사실 많이는 아니지만 여태 구두를 신고 이렇게 오래 걸을 일이 없었기에 아프긴 했다.
‘나 이런 몸으로 그 산맥을 오르려고 했던 거야?’
지금의 몸이 빙의 전 제 몸보다야 좋은 체력을 지녔다지만, 정말 무모한 짓이었구나···.
신성력의 도움이 없었으면 아마 마차에서 벗어난 그 날 바로 뻗어버렸겠지.
리엘리가 지나간 일에 학을 떼고 있을 때, 아르반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해왔다.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안까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네? 들어주겠다고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리엘리는 반사적으로 제 손을 내려다봤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손은 텅 비어있었다.
뭘? 대체 뭘 들어주겠다는 건데?
잠시 멍하니 생각을 하던 리엘리는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설마, 저를 들어주시겠다는 건, 아니죠?”
“맞습니다만.”
“······.”
리엘리는 태연하게 대답하는 아르반의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심지어 그의 표정이 너무 평온해서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제가 이상한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아르반은 무표정한 얼굴 아래 제 속내를 감춘 채 어리벙벙한 표정의 리엘리를 바라봤다.
제가 내뱉고도 수작질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그게 맞기도 하니, 실상 부정할 생각도 없지만 말이다.
아르반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가벼운 상태였다.
그는 리엘리에게 저택을 안내하며 복잡한 제 머릿속 정리를 마쳤다.
아르반은 당황스러워하는 리엘리를 보며 작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녀에 대한 감정 역시 받아드렸다.
그러고 나니 현재 자신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당신 옆에 서는 것.’
여태 혼란스럽게 방황했던 시간이 허망하리만치, 결론이 나는 것은 단숨이었다.
‘이제 당신의 앞에서 의미 없는 고민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어.’
그저 마음이 끌리는 대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뱉어냈다.
사실 이 화법은 그녀에게서 배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저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니, 웃음이 났다.
리엘리는 그가 갑자기 웃자 다시 한번 당황했다.
아르반은 그녀가 당황스러워한다는 걸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확고한 목표가 생겼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일단 현 황제를 쳐내고 다른 이를 그 자리에 앉히는 게 최우선 사항이다.
그 후에는 가능하다면 그녀의 옆자리에 서고 싶었다.
현재의 그가 바라는 유일한 것.
그를 위해서라면 설령 대공의 지위를 내려놓으라 해도 그리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실상 아르반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바로 작위였으나 그는 딱히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만큼 아르반에게 있어 제가 가진 것들은 큰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그는 분명하게 리엘리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아르반은 그녀를 위해 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정확하게는,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고.
‘당신이 다른 이와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 내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야.’
애정보다 거대한 질투.
아르반은 자신이 좋은 의도에서 그녀의 곁에 있고 싶어 한다 여기지 않았다.
단지 지금으로서는 리엘리가 다른 이와 함께하길 바라지 않기에, 그 누군가가 차지할지 모를 그녀의 옆자리를 제가 소유함으로써 차단해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언젠가는 이 감정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지.’
감정이란 규격을 가진 것이 아니니까.
아르반은 내심 제 감정이 더 커질지언정 작아지지 않으리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하··· 그 정도는 아니니까 제 발로 들어갈게요.”
당황이 걷힌 리엘리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는 아르반의 팔을 가볍게 당기며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십니까. 힘드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어휴, 됐네요.”
아르반은 순순히 리엘리의 손에 이끌려가면서도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
나는 커피와 함께 나온 브라우니를 잘라 먹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응접실 내부는 화려하기도 화려했지만 벽면마다 그림이 걸려있었다.
척 보기에도 예사 것이 아닌 듯해,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절로 눈길이 갔다.
내가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며 눈동자를 굴리자 나를 보고 있던 아르반 역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궁금하시면 가까이서 보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사양 안 할게요.”
사실 그렇게까지 관심이 가는 건 아니었지만 배도 부르고 앉아있어 발도 좀 나아졌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찬찬히 여러 작품을 감상했다.
작품을 볼 줄 몰라 그냥 예쁜 그림을 보는 정도의 감상이 전부였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어!”
그러다 내가 등지고 있던 벽면을 돌아본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이거 당신이죠?”
“예, 그렇습니다.”
나는 초상화를 이리저리 뜯어봤다.
‘와, 진짜 잘 그렸다. 어떻게 실물이랑 똑같이 생겼네.’
유화 특유의 질감만 아니었다면 사진을 찍어 인쇄해놓은 듯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아르반의 모습이었다.
‘눈동자가 살짝 아쉽긴 하지만···.’
실물이 워낙 보석 같아야지.
나는 고개를 돌려 아르반을 봤다가 다시 초상화를 봤다.
음, 이렇게 대놓고 비교하니 역시 사람 같지 않은 실물을 따라올 재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