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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89화 (89/153)

89화

한편,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리엘리는 조금 당황했다.

‘나 때문에 많이 화났나.’

반지를 함부로 선물하는 게 아닌 것처럼 이곳에서는 브로치 역시 마찬가지의 의미로 통용된다.

‘그런데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벤트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짓을 했으니···.’

입장 바꿔 자신이 연회장에서 누군가에게 반지를 선물 받는다면 정말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리엘리는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 아르반을 힐끗 바라보다 괜히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가 당신이 건네는 브로치를 왜 받았을 것 같습니까.”

그녀에게 묻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질문이기도 했다.

리엘리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맞은 편에 앉은 남자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항상 반듯한 자세로 앉아있던 아르반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자세를 무너뜨린 채 다리를 꼬고 있다.

더구나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던 목 끝까지 올라오는 상의 역시 풀어 헤쳐져 있어서, 그럴 분위기와 타이밍이 아님에도 자꾸 그의 가슴 쪽으로 시선이 내려가는 것을 의식적으로 자제해야만 했다.

늘 단정하던 남자가 저리 나른한 짐승 같은 모양새를 취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리엘리는 다소 멍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며 제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을 꼽아보았다.

“글쎄요. 제가 무안할까 봐?”

아니면 당황해서? 얼결에?

···혹은, 정말로 공녀라는 자신의 위치를 보고 청혼의 의미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리엘리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답을 추론하면서도 제 예측 중 어떤 것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와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르반 역시 리엘리의 입에서 저런 대답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음에도 기분이 상했다.

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다가 제 방만한 자세를 눈치채고는 의식적으로 몸가짐을 바로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나, 그 안을 채우는 충동은 태풍과도 같이 아르반의 헤집어 놓았다.

결국 그는 몰아치는 감정 앞에 굴복했다.

“틀렸습니다. 당신을 생각해서 선물을 받은 게 아닙니다. 단지 그 선물을 받지 않았을 때, 당신이 제게 보일 반응이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망설이고 고민한 사실이 우습고 어이없을 만큼, 막힘없는 고백이 튀어 나갔다.

“그때 엘리, 당신이··· 제 행동에 화가 나 있는 듯 보여서. 당신이 저를 부정적인 감정으로 보지 않길 바라서,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아르···.”

“그리고, 당신이 제게 왜 브로치를 건넸는지를 매일 생각했죠.”

평소의 아르반이라면 절대 말하지 않았을 진심이었다.

“솔직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어떤 의미로 제게 이런 선물을 주셨는지···.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로서 선물하지 않았을 것이란 건, 사실 짐작하고 있었다.

로베르 공작가를 물려받을 그녀가 제게 청혼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니까.

어쩌면 짓궂은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르반은 혹시나, 만약이란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쌓아 올린 모든 가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리엘리의 발언으로 인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혹여 그녀의 입에서 ‘사실 공작가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어서요. 이왕이면 친분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와 같은 지극히 그녀다운 청혼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정말 부질없는 망상에 불과했다.

아르반은 그 순간 불현듯, 제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녀가 청혼의 의미로 내민 선물이 아닐 것이라 예상하고도 그런 망상을 하고, 전혀 다른 현실을 마주하니 실망스러운 거지.’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 들끓는 듯한 감정이 리엘리 로베르, 그녀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감정을 쏟아내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아르반은 조금 충혈된 눈으로 리엘리를 응시했다.

유년기를 벗어난 이래 단 한 번도 감정을 삭이는 게 힘들지 않았건만, 그녀의 앞에 서면 그렇지만도 않다.

매 순간 무언가를 인내하고 고민하게 되는데도 그게 싫지 않다는 점이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리엘리는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아르반의 모습에 마른침을 삼켰다.

‘어떡하지··· 진짜 화났나 봐.’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잘못이 너무도 명백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조심스러웠다.

그렇다고 저리 기분이 상한 아르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리엘리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해요. 제가 무신경한 선물을 준비해서 당신한테 혼란을 주고··· 주변에서도 이상하게 봤을 텐데···.”

그래. 제 입장에서만 생각할 게 아니었다.

저 혼자 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건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르반이 얽혀버린 이상 원인을 제공한 제 쪽에서 사과하는 게 옳다.

울적해진 리엘리가 고개를 숙이자 그를 지켜보던 아르반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사과하실 것 없습니다. 당신이 건넸다 한들 제 의지로 받은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리엘리는 미안함에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르반은 물기를 머금은 리엘리의 눈동자를 보고 급속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저리 의기소침하고 우울해 보이는 모습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제게 화를 내거나 차갑게 경멸하는 리엘리를 머릿속에 그리며, 절대 현실로 마주하고 싶지 않다 생각했을 뿐.

하지만 뜻밖에 마주한 약한 모습의 그녀 역시 보고 싶지 않음은 매한가지였다.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했다.

“당신에게 사과받고자 꺼낸 말이 아닙니다.”

그럼 자신은 무얼 위해 그녀에게 이런 말을 꺼냈는가.

아르반은 제게 질문을 던졌다.

“저는 그저···.”

그는 순간 무언가를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직면하게 된 제 감정이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그저, 기대했던 것과 다른 그녀의 대답으로 인해 실망했을 뿐이었다.

‘내가 그녀의 청혼을 바라기라도 했다는 건가.’

아르반은 리엘리를 똑바로 응시했다.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 채 자신을 바라보는 게 당황스러운 듯한 눈빛.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제 모습이 가득 담겨있다.

‘당신의 시야에 오직 나만이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바란 게 언제부터였지.’

브로치를 받았던 순간?

함께 춤을 추던 날?

그녀와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했던 그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지만 자각한 순간만이 선명할 뿐이다.

그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럴 리가 없다 애써 외면해 왔던 감정을 돌아보게 된 건 바로 제 생일을 기념하는 연회 날이었다.

그날, 리엘리가 루페르 멜라니스의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에 섰던 바로 그 순간.

걷잡을 수 없을 만큼의 짜증과 분노가 전신을 집어삼켰다.

아르반은 기본적으로 심경의 변화가 크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그 감정은 더욱 명확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근래 그로 인해 아르반이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아르반은 이제야 비로소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 감정은 분명 당신에 대한 호감이겠지.’

또한 그것은 단순히 친우를 아끼고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다.

아무리 사람과 담을 쌓고 살아온 아르반이라지만 친구가 다른 이와 춤 한번 췄다고 그 상대를 찢어 죽이고 싶다 생각하지 않으리란 것쯤은 알았다.

“하.”

그는 작게 헛웃음 지었다.

아르반은 곧게 펴고 있던 상체를 무너트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 그녀가 보기에 좋지 않은 표정일 터.

어서 표정을 갈무리하고 변명을 해야 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그저, 실망스러웠을 뿐이라고.’

그렇기에 허탈하고, 화가 났다.

그는 이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우스웠다.

‘알고 있었잖아. 엘리가 내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사랑에 빠져 본 적은 없지만, 사랑에 빠진 이를 지켜본 적은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리엘리 로베르가 아르반 카넬로웰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그들과 같은 감정이 투영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아르반은 문득 지금 자신도 그들과 흡사한 눈빛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저, 아르반···?”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조용하기만 한 아르반의 모습에 기다리다 못한 리엘리가 조심히 그를 불렀다.

“예. 죄송합니다.”

그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아르반은 마지 못해 손을 내리고 다시 그녀를 마주했다.

보석같이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자주 아르반의 시선을 빼앗는 것 중 하나였다.

그 눈동자에 나타나는 다채로운 감정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 눈동자를 피하고 싶었다.

리엘리의 감정과 제가 그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의 깊이가 다름을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피차 오해로 벌어진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잊힐 겁니다.”

차마 본심을 말할 수 없던 아르반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무덤덤함을 가장한 아르반의 목소리에 리엘리가 옅게 웃어 보였다.

그는 그녀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따라 웃으려다 표정을 굳혔다.

지금이야 단순한 오해에 의한 사건일 뿐이라지만, 그로 인해 아르반은 그녀가 언제 약혼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란 걸 깨달았다.

가문을 이어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 결혼은 필수 불가결한 사항이다.

그건 리엘리 본인이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지녔다 한들, 한 가문을 짊어진 수장의 의무였다.

자신처럼 대를 끊어버릴 생각이 아니고서야.

“차가 향이 참 좋네요.”

다소 무거웠던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리엘리가 밝게 말했다.

“가시는 길에 챙겨드리겠습니다.”

아르반은 그녀의 말에 착실히 대답하면서도 생각을 이어나갔다.

쓰리지만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제 속은 치워둔 채, 현실에 대한 걱정을.

이번 연회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근 일 년간 영위한 나름의 평화가 종결되었다.

이제 더는 황제의 명에 복종한다 한들, 이전과 같은 귀찮은 암살위협이 뒤따를 것이다.

혹여 아르반이 정말 리엘리와 약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황제로서도 무시할 수 없을 테니, 분명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터.

“고마워요. 사양하지 않을게요.”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해사하게 미소 짓는 리엘리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르반은 아무 생각 없이 그 모습을 계속 눈에 담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모로 심란한 현 상황을 어찌할지에 대한 고민이 끊임없이 뇌리를 맴돌았다.

모든 상황이 아르반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말 잘 듣는 개처럼 굴던 낯을 탈피하라. 그리고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황제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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