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나는 승마 수업이 끝나자마자 연무장으로 향했다.
세이린에게 물어 오늘 아르반의 일정이 꽉 차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후일 약속을 잡기 위해서였다.
아몬의 수업이 끝나는 타이밍을 봐서 기다렸다가 아이가 먼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돌아갈 채비를 하는 아르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아르반은 아직 거리가 먼 내가 있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고개를 돌려왔다.
‘진짜 귀신같다니까.’
간혹 이렇게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행동을 볼 때마다 새삼스레 신기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내가 그의 앞까지 다가가자 아르반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왔다.
“연회 이후 처음 뵙는군요.”
“···그러네요.”
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덜미를 훑어봤다. 그리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방긋 미소 지었다.
‘나도 참, 어지간하네. 아무리 그래도 브로치를 연무장에 하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다른 게 아니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말씀하십시오.”
“그··· 아뇨.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좀 길어질 것 같기도 하고요.”
내가 난색을 표하자 아르반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곤란해 보이는 얼굴이다.
이제는 저 무표정 속에서도 어느 정도 감정을 잡아낼 수 있는 나 자신이 약간 뿌듯하게 느껴졌다.
“죄송하지만 뒤에 일정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내일 다시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의 대답에 잠시 고민하다가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일부러 오시려는 거면 차라리 제가 갈게요. 어차피 전에 당신 저택에 가보기로 했었잖아요.”
“그랬었죠.”
아르반은 내 말을 듣고서야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듯했다.
뭐, 나로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할 말 없지만.
나를 내려다보던 아르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찬을 준비하겠습니다.”
“좋아요.”
안 그래도 내일은 멜라니스 남매와 저녁 약속이 잡혀있는 참이었다.
‘점심은 아르반이랑 먹고 시간 좀 보내다가 저녁 시간에 맞춰 출발하면 되겠네.’
한국에서 생활할 때에도 일이 있으면 한 번에 몰아서 처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곳에서도 그렇게 되고 있었다.
*
평소 없던 약속이 둘이나 잡혀서일까, 조금 일찍 눈이 떠졌다.
덕분에 여유롭게 씻고 외출할 때 입을 옷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도 남는 시간에 한가로이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으니 아몬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죄송해요. 제가 기다리시게 만들었나 봐요.”
“아냐. 오늘은 내가 일찍 내려왔어. 그리고 그런 거로 죄송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도 항상 너를 기다리게 만드는 건데, 내가 매일 사과했으면 좋겠니?”
“아뇨. 그럴 리가요. 전 누나를 기다리는 시간도 좋은걸요.”
아몬의 솔직한 이야기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진 나는 한껏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우리 동생님이 언제 오나 생각하면 이렇게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운걸.”
내 말에 옅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아몬을 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대로 아몬의 뒤쪽으로 다가가 의자를 빼주었다.
내 돌발행동에 당황했는지, 아몬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장승처럼 서 있었다.
“앉으세요, 도련님.”
“······.”
“어이구, 미안. 장난 안 칠게. 앉아. 아침 먹어야지. 응?”
“네.”
장난스레 도련님이라 부른 것인데, 뭔가 아몬의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코앞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눈동자가 순간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 잽싸게 사과한 나는 아몬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아몬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지.’
*
아르반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너무도 조용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나는 괜히 멀쩡한 옷매무새만 몇 번을 가다듬었다.
‘율렌이라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아냐, 어차피 데려와봤자 또 전처럼 바구니 행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말을 걸어올 때까지 다른 생각을 하느라 마차가 멈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밖에서 문을 열어주어 마차에서 내려가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불쑥 내 앞으로 들이 밀어졌다.
‘뭐야, 분명히 내가 앞으로 마차에서 오르내릴 때 에스코트는 필요 없다고 말해뒀는데.’
또 누가 손을 내밀어오는 건지.
나는 미약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손의 주인을 째려보려다가 곧 마주한 푸른 눈동자에 급히 얼굴을 폈다.
“이렇게 방문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공녀.”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각하.”
그의 장단에 맞춰 인사하면서도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굳이 집에서까지 철저하게 예의를 지키는 시늉을 해야 하는 건가.’
그와 나를 제외하면 다른 귀족이라고는 이 집의 사용인들이 전부일 텐데. 그 정도는 입단속 시킬 수 있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의 손을 잡고 아르반의 옆으로 내려섰다.
마차에서 내리니 마침 내 눈높이에 그의 목덜미를 장식하고 있는 낯익은 물건이 비쳤다.
“···브로치, 하고 계시네요.”
“예. 공녀께서 선물해주셨으니까요.”
답을 바라고 이야기했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지만, 돌아온 아르반의 대답은 나를 흡족한 한편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의미인데.’
왜 내가 당신에게 고백이나 다름없는 선물을 했는데 아무런 말도 없고, 심지어 그걸 내 눈앞에 보란 듯이 하고 나타나는 건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한 기분이었다.
‘하, 아몬의 마음을 모르겠다고 말할 때가 아니었네.’
내 마음도, 그의 마음도 모두 저 멀리 붕 떠 있는 것처럼 아련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이란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다.
나는 아르반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하며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걸었다.
아르반은 아무 말 없이 이상할 정도로 느린 내 걸음에 맞춰 발을 뗄 뿐이었다.
정오의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자 뒤늦게 정원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꽃나무가 주를 이루는 공작저의 정원과 달리 크고 울창한 나무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또한 중앙에는 여럿의 분수와 조각상들이 들어차 있는 게, 사실상 정원이라기보다 야외 미술전시관 같은 풍경이 색달라 흥미로웠다.
그렇게 실내로 들어서 식당으로 안내를 받았다.
나는 아르반과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빙되는 음식을 하나하나 맛보았다.
역시 기대만큼이나 훌륭했지만 다른 신경 쓰이는 사항이 있다 보니 솔직히 여유롭고 마음 편히 즐기지는 못했다.
성격 같아서는 지금 당장 왜 그날 브로치를 받아줬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아르반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장 집에 돌아가고 싶어질 것 같아 잠시 참기로 했다.
마침내 식사가 끝나고 간단한 디저트와 차가 나왔을 때.
나는 슬슬 본론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각하, 중요한 얘기가 있는데 사람들을 물려주시겠어요?”
*
리엘리의 요청에 사용인들을 물리면서, 아르반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아르반은 그녀가 대체 언제쯤 저 말을 꺼낼 것인가를 가늠하느라 식사하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며칠째 혼자 있을 때면 습관처럼 브로치를 꺼내 만지며 고민하곤 했는데, 지금도 무심결에 제 목덜미를 장식하고 있는 브로치로 손을 뻗을 뻔했다.
이 작은 장신구 하나 때문에 그간 아르반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곤죽이 따로 없었다.
“엘리, 그전에 제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르반은 리엘리가 해올 이야기에 대해 짐작하면서도 먼저 묻고 싶었다.
왜 친우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신에게 브로치를, 그것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물했는지.
“연회 날, 제게 어떤 의도로 브로치를 선물해 주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리엘리는 자신을 직시하는 아르반의 푸른 눈을 마주하면서 문득 상황과 맞지 않는 생각을 했다.
‘아르반의 눈동자를 보면 항상 바다나 깊은 호수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활활 타오르는 푸른 불꽃과도 같아 보였다.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열망이 엿보이는 눈.
선수를 빼앗긴 리엘리는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사실, 이런 말 믿지 못하겠지만··· 의미를 몰랐어요.”
이미 해명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음에도 아르반이 먼저 질문을 해오자 입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무슨···.”
리엘리가 어물어물 운을 떼자, 아르반은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계속 마주하고 있었기에 그의 눈동자가 한순간 흔들리는 것을 목격한 리엘리는 작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아르반이 왜 제 선물을 받았느냐만 궁금해했는데, 반대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본의는 아니었다지만 그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그, 런 뜻이 내포된 줄 모르고 선물을 준비했어요. 미안해요. 사실 저도 그 일 때문에 보자고 한 건데···.”
“그러니까, 엘리 당신은 브로치를 선물하면서도 이게 고백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몰랐다는 겁니까.”
리엘리는 제 말을 자르며 추궁하듯 질문하는 아르반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의 음성에 노기가 섞이지 않았음에도 왠지 모르게 화가 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요. 제가 유행이나 정보에 어두워서 정말 몰랐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로즈니를 통해 알게 돼서··· 당신이 왜 선물을 받아줬는지 혼란스러워졌어요.”
리엘리는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하는 한편, 궁금증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아르반은 미안한듯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만큼은 들어야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리엘리를 보며 갑갑한 심정을 갈무리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자꾸 표정이 구겨지려는 것을 조절하기에도 힘에 부쳤다.
격한 전투에 참여했던 것도 아닌데 심박이 크게 오른 게 느껴졌다.
아르반은 목을 답답하게 조이는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며 고정해둔 브로치를 빼내었다.
그러자 리엘리의 시선이 브로치를 따라갔다.
‘후우···.’
그녀 앞에서 대놓고 한숨을 쉴 수 없었던 아르반은 속으로만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기실, 상황 파악은 끝낸 지 오래였다.
선물한 당사자가 물건에 담긴 의미를 몰랐을 뿐인 단순한 해프닝.
자신은 그저 ‘그랬군요. 사실 당신이 무안을 당할까 봐 받았던 거지 저로서도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라고 넘길 수 있는 상황.
분명 그리 말하면 서로 불편하지 않게 잘 마무리될 수 있는 일이거늘···.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군.’
아르반은 목에 걸린 듯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마디를 뱉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갈등했다.
상황을 단번에 정리할 수 있음에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 진심을 그녀에게 알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결국 아르반은 한참 동안 답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