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로즈니로서는 타인에게 제 가정사를 털어놓는 게 인생에 있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아니, 제법 즐거운 경험이었다.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친구, 리엘리 로베르가 진지한 낯으로 제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것은.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리엘리의 표정이 굳어져 간다는 게 조금 안타깝긴 했지만, 그마저도 기껍게 다가왔다.
제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자신을 아끼고 걱정해 준다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듣고 있는 리엘리의 입장은 달랐다.
로즈니와 루페르의 친모가 죽고 상복을 벗지도 못한 채 마주하게 된 새로운 백작 부인.
더구나 그녀는 이미 산달을 앞두고 있었다니···.
리엘리는 로즈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게 오라버니가 저를 제외한 가족들을 밀어내는 이유예요.”
“······.”
리엘리는 로즈니가 어떻게 저리 초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했다.
‘내 앞이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가.’
그 마음이 고스란히 표정에 묻어났는지, 로즈니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제 태도가 신기하신가요?”
“좀 그렇긴 해요.”
“음, 그냥 아버님께 기대하지 않았을 뿐이랍니다.”
로즈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걸친 채 말했다.
“전 한 번 손에 들어온 것은 어떻게든 붙잡으려 노력하지만 반대로 손에서 놔버린 것은 애써 붙잡으려 하지 않거든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리엘리는 슬쩍 미간을 좁히며 가장 신경 쓰이는 것에 대해 질문했다.
“그럼 로즈니는 르미엘 양을 원망하지는 않으시는 건가요.”
“원망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 아이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는데요.”
리엘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로즈니를 보았다.
그녀는 정말 르미엘에게 아무런 감정을 품지 않은 것 같았다.
긍정적인 감정도, 부정적인 감정도.
여주의 가족과 관련된 내용은 지나가는 식으로만 언급되었다.
아니,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원작 자체에서 언급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주의 앞길도 충분히 가시밭길인데, 구태여 과거의 일까지 구구절절 묘사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
‘그도 아니라면 내가 과거의 내용이 언급되는 부분까지 읽지 못했을지도.’
그때, 로즈니가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보니, 르미엘, 그 아이도 벌써 열 살이네요.”
열 살, 몇 달만 지나면 아몬의 생일이니 둘의 나이가 같아진다.
문득 원작의 내용이 뇌리를 스쳤다.
가족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해 늘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과거가 차라리 나았다고 울부짖던 르미엘의 모습이.
‘르미엘은 관심과 사랑을 바랐던 거지 가족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지는 않았어.’
그렇다면 두 사람의 관계를 개선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남의 가정사에 개입하는 게 지나친 오지랖이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로즈니의 말처럼 르미엘은 단지 열 살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이대로 르미엘을 방치하자니 눈에 밟혀 밤에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로즈니가 르미엘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다면 애초에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그녀의 언행에서 둘의 관계를 개선할 가능성이 엿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 아몬이 떠오르기도 하고.’
물론 르미엘은 아몬처럼 저택에 나 몰라라 방치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은 동일했다.
리엘리는 슬며시 운을 띄웠다.
“저희 아몬에게 또래의 친구가 없어서요. 로즈니가 르미엘 양이 많이 불편하지 않으시면··· 함께 나들이를 하러 가는 건 어떨까요.”
리엘리는 다 같이 호숫가에 나들이하러 다녀오고자 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로즈니는 이내 방긋 웃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아아,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함께해야죠.”
“그래도 동생이랑 많이 어색하다면 로즈니가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요.”
리엘리의 발언에 로즈니는 약간의 이채를 띤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돌이켜보니 명색이 가족이고 동생임에도 사적으로 어울렸던 적이 단 한 번도 존재치 않았다.
애초에 가족이라기보다는 같은 저택에 머무는 아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저는 괜찮아요. 어찌 됐든 동생인데, 생각해보니 그간 한 번도 같이 어울린 적이 없네요.”
한 번쯤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애가 좋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보고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좋아요. 기다릴게요.”
*
우리는 그 뒤로 조금 더 떠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라도 함께하고 가는 게 어떠냐는 로즈니의 제안은 아쉽지만 거절했다.
‘우리 동생님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도 안 하고 나와서 그럴 수는 없지.’
그렇게 저택을 나오는데, 내가 돌아간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지 루페르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는 아까 선물에 미련이 남았는지 다음 만남을 들먹였고, 거기에 로즈니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어영부영 다시 약속을 잡아버렸다.
기운이 쪽 빠진 상태로 귀가한 나는 아슬아슬하게 저녁 시간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아몬과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니 율렌이 침대에 편지 봉투를 잔뜩 늘여놓은 채 나를 맞이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이건 다 어디서 났어?”
어질러진 침대보다 그 위에 있는 꽤 많은 양의 편지들이 의아해 물었다.
그러자 율렌이 리엘리의 이모, 타티아나에게서 받았던 편지를 툭 치며 말했다.
“이거 전에 주고받았던 편지가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봤어.”
“아니, 궁금해도 내가 궁금해야 하는 거 아냐?”
참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찾아도 내가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찌 됐든 지금은 내 물건들인데 막 뒤지다니, 정말이지···.
나는 율렌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대신 한숨을 폭, 내쉬며 편지를 한쪽으로 치우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너도 궁금했잖아. 그래서 너 없을 때 내가 찾아놓은 거라고.”
“허이고, 그러세요. 대단히 감사하네요. 근데 앞으로는 제발 나한테 물어보고 행동해주라.”
“흥. 네 물건이었으면 그랬겠지. 근데 이건 네가 아니라 그 몸의 전주인 물건이잖아?”
“그래도 여긴 내방이잖아. 당연히 나한테 물어봐야지.”
내가 조금 강한 어조로 핀잔을 주자 살랑살랑 흔들리던 율렌의 꼬리가 뚝 멈춰 섰다.
“그런가···. 미안.”
“윽.”
척 보기에도 풀이 죽어 보이는 모습에 분명 녀석이 잘못한 것임에도 어쩐지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진짜 쟤가 잘못한 거잖아.’
잠시 갈등하던 나는 결국 율렌을 달랑 들어 올려 무릎에 올리며 녀석을 달랬다.
“아냐, 그냥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말고. 일단 네가 찾아둔 편지들부터 봐볼까.”
내가 편지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하자 율렌이 꼬리를 치켜들어 한쪽에 있는 편지들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편지가 제일 오래된 거야. 내가 다 읽고 분리해뒀지.”
“···그래. 나한테 온 게 아니라 이전의 리엘리한테 왔던 편지들이라 읽어본 거지?”
“그럼. 너한테 온 거였으면 물어보고 읽어야지.”
애초에 읽지 않는다는 전제는 없나 보군.
그래도 녀석 나름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갸륵해 작은 몸을 툭툭 두드려 주고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응?”
나는 편지의 발신자를 확인하고 의아해졌다.
‘리셀··· 이 누구지.’
성 없이 이름만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귀족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보낸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나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편지라기보다 그냥··· 쪽지 아닌가.’
보낸 이의 이름과 주소, 간략한 안부를 묻는 말이 전부인 편지.
나는 흩어진 편지들을 죄다 그러모아 살폈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적혀있는 주소가 매번 바뀐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십여 장의 편지를 살피던 차에, 드디어 눈에 띄는 문장이 적혀있는 편지를 한 장 발견했다.
리엘리 로베르 공녀님께.
공녀님, 아직 동생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쯤 되면 그만두는 게 맞는 거겠죠.
하지만 도저히 그 아이를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미련한 탓인지, 유일한 가족이기 때문인지…. 그 아이가 어딘가에 살아있으리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습니다.
…사담이 길어졌군요. 죄송합니다.
언젠가 동생을 찾게 된다면 꼭 공녀님께 찾아가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언제라도 제가 필요하게 되시면 아래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주십시오. - 리셀
“전의 리엘리랑 어떻게 알고 지내던 사이인지 모르겠더라.”
율렌의 중얼거림처럼 나 또한 이 편지를 보내온 사람과 리엘리의 관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내용을 봐서는 사용인이나 아랫사람일 텐데···.’
내용이 너무 의미심장했다.
그 편지를 제외하면 다른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동일했다.
“아무래도 리엘리가 이 리셀이라는 사람한테 도움을 준 것 같지.”
실종된 동생을 찾고 있는 듯하니 수색 작업을 도와주었나?
하지만 공작저에서 옴짝달싹도 못 하던 그녀가 대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
이전의 리엘리 로베르는 나처럼 대범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공작의 눈을 피해 누군가를 도와줬다 보기도 어려웠다.
나는 주변에 흩어진 편지를 대략 셈해보았다. 어림잡아도 서른 장이 훌쩍 넘어갔다.
‘어떤 도움을 줬길래 이렇게 끈질기게 편지를 보내오는 걸까.’
수색할 수 있는 비용을 내주었나.
방안에 돌아다니는 장신구 한두 개만 하더라도 하급 귀족이나 평민으로서는 몇 년 놀고먹을 수 있는 거금이니.
나는 리셀이 반년 전에 보내온 마지막 편지를 확인했다.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지 못하여 마지막으로 동생과 함께했던 수도에서 머물게 될 것 같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그리고 리엘리와는 어떤 관계였기에 그녀가 도움을 베풀었을까.
나는 그전에 타티아나가 보내온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평범하게 조카의 안부를 묻는 편지.
나는 그녀의 편지는 대충 훑어보고, 한동안 리셀이라는 남자에게서 왔던 편지에 대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