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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86화 (86/153)

86화

“···공녀님.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나는 진지한 로즈니를 보고 긴장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모르실 수도 있죠. 다만, 음. 아무래도 워낙 유명한 이야기다보니···.”

그녀는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몇 년 전에, 그러니까··· 대략 2년 전쯤 황태자 전하께서 프리실라 블란드 님과의 약혼에서 브로치를 선물하시며 하셨던 말씀이 워낙 유명해져서···.”

나는 로즈니의 설명을 듣고 내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황태자가 자기 약혼녀한테 과시용으로 아주 커다란 핑크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며 공개적으로 평생 내 곁에 있어 달라 청혼했다는 거네.

‘아. 젠장.’

여기까지만 들어도 답이 나왔다.

그게 유행을 타고 있다는 거잖아. 그것도 비단 귀족들에게만이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평민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일화가 됐다니.

그쯤 되면 아무리 집에서만 생활하는 공녀라 해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도 하다 싶었다.

집에만 박혀있다고 해서 혼자 생활하는 것도 아니고, 시녀나 다른 이들과 대화는 주고받으며 사니까.

“단순한 유행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를 잡았지요. 동성 간에는 우정의 의미로, 주인이 아랫사람에게 하사하는 것은 신뢰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들었어요.”

나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 아아, 아아악!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려 속으로 비명만 내지르고 있는데, 로즈니가 말을 이었다.

“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공녀님과 대공 각하가 보통 사이가 아니리라 짐작했을 거예요.”

“그런 사이··· 아닌데.”

내가 신음과도 같은 말을 흘리자 로즈니가 눈썹을 팔자로 내리며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모르기가 힘든 이야기인데 공녀님께서 제게 거짓말을 하실 이유도 없으니 정말 모르고 계셨던 거겠죠. 어쩜···.”

로즈니는 손으로 입을 감싸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는 나를 잠시 바라보던 로즈니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두 분이 연인 사이가 아니셨다면 각하께서는 왜 공녀님의 선물을 받아주신 걸까요?”

공녀님께서 모르셨다 해도 설마 각하께서도 모르고 계시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의아하다는 듯이 혼잣말을 하는 로즈니로 인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나야 빙의했고 아직 리엘리의 기억을 완전히 습득한 게 아니라 이곳의 상식을 전부 알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아르반은 아니었다.

‘로즈니의 말대로야. 아르반이 몰랐을 리가 없어.’

혹시 내가 무안을 당할까 봐 배려해준 건가.

하지만 우리는 대외적으로 그 연회 날 처음 만난다는 전제하에 마주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내민 브로치를 받아주다니, 의미를 알고 나니 영 석연치 않았다.

“그러게요. 그 사람이 몰랐을 리 없는데, 왜 그랬을까요.”

내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로즈니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해답을 찾은 것처럼 밝은 표정을 지었다.

“공녀님과 맺어지고 싶으셔서 받으신 게 아닐까요? 요즘은 청혼이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브로치를 선물하는 경우가 없거든요.”

로즈니의 주장은 나를 더 큰 혼란에 빠지게 했다.

‘아르반이 나랑 맺어지고 싶어 한다고?’

그럴 리가. 그 무덤덤한 남자가 그런 생각을 했을 턱이 없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쩌면 로즈니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싹을 틔웠다.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니 또 납득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 됐든 나는 로베르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녀였고 그는 제국에 하나뿐인 미혼의 대공이다.

더구나 황녀가 없는 현시점에서 나는 아르반과 가장 신분이 잘 맞는 결혼 상대 중 하나일 터.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 남자가 내 선물을 받을 만한 이유가 충분하긴 하네.’

묘하게 납득이 가는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했다.

여태까지 아르반과 알고 지내며 그가 내게 별다른 호감을 표한 적이 없었기에 더 그랬다.

‘만약 로즈니의 말대로 나와 결혼을 바라는 거라면, 정말 신분만 보고 결혼 상대로 적합하니까··· 받아준 거겠지.’

그도 내가 브로치의 의미를 몰랐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니 공개적인 자리, 그것도 비공식적이지만 대공비의 자리를 채워 넣기 위한 연회에서 내 선물을 망설이지 않고 받았을 테고.

“하, 뭐야. 그런 거였어?”

허탈했다. 하지만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어 가슴께가 답답해졌다.

“공녀님. 각하께서 공녀님과 맺어지고 싶어 하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슬쩍 나를 살피던 로즈니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그렇지 못한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그녀의 직구에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잠시 고민하다 한 박자 늦게 입술을 뗐다.

“글쎄요···.”

만약 정말로 내 신분을 보고 그 순간에 나와의 결혼을 전제로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냥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들어서, 아니, 하다못해 내가 무안을 당하지 않게 하고자 배려했던 거라면···.

나는 순간적으로 치고 올라오는 가정에 헛웃음 지었다.

후자의 이유라면 모를까, 전자일 리가 없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래, 단순히 나를 친구로서 생각하여 배려했다 여기는 쪽이 가장 신빙성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은근한 불쾌감이 치솟아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나도 분명 그를 친구로서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나를 친구로 아끼고 배려한다는 건 바라마지않는 일임이 분명해야 할 터인데···.

‘어째서 이렇게.’

불쾌하단 말인가.

나는 다 식어버린 차를 들어 타는 목을 적셨다.

“그보다 로즈니. 몸은 정말 괜찮은 건가요?”

내가 빤히 눈에 보이도록 화제를 돌리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즈니는 별다른 말 없이 싱긋 웃어 보였다.

“네. 그럼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집에서만 푹 쉬었는걸요. 덕분에 일이 좀 밀리긴 했지만, 익숙하니 괜찮답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요. 전처럼 또 병날라.”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기분이 가라앉으니 사람이 좀 더 이성적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나는 차를 몇 모금 더 넘기다가 문득 그녀에게 전해야 할 말을 기억해 냈다.

“참, 로즈니.”

“네, 공녀님.”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전 로즈니가 참 편하고 좋아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친구로 남고 싶고요.”

“친구, 말인가요.”

“네, 친구요. 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로즈니를 이름으로 불렀지만 로즈니는 저를 공녀님이라고 부르니까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는 듯해서요.

“······.”

“그래서 말인데··· 불편하지 않다면 공녀님 말고 리엘리라고 불러줄래요?”

별거 아닌 제안이라 생각했는데 나를 뚫어질 듯 응시해오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니 어쩐지 조금 쑥스러워졌다.

“그야 물론, 당연히 그래야죠. 꼭 그러고 싶어요, 리엘리 님.”

“어, 님 붙이지 말고 그냥 이름으로 불러줘요.”

공녀님이라고 불릴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름에 존칭을 붙여 불리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네, 리엘리.”

로즈니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볼이 발그스름해진 것으로 보아 기분이 좋아 보여 다행이었다.

“그리고 로즈니.”

내가 슬쩍 그녀를 부르자 로즈니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네, 리엘리. 말씀하세요.”

“실은 연회 날에 멜라니스 경을 데려다주면서 르미엘 양을 만났어요.”

나는 슬그머니 르미엘에 관해 운을 뗐다.

여태 로즈니의 입을 통해서도 들은 적이 없었기에 혹여 그녀가 불편한 기색을 보일까 봐 분위기를 살폈다.

“···아아, 만나셨군요.”

하지만 로즈니는 의외로 심드렁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놀라셨겠어요.”

사실 로즈니의 동생이 원작 여주인 르미엘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돌이켜보니 여태 로즈니가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그다지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뿐.

“말씀드리는 편이 좋았을 걸 그랬네요. 이런 상황이 익숙지 못해서 미리 언질을 드리지 못했어요.”

“아뇨. 괜찮아요. 다만 놀랐다기보다는 좀 의아한 부분이 있어서···.”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무엇이 궁금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다름이 아니라 연회 때 멜라니스 경께서 조금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꺼내셔서요. 혹시 불편하면 답하지 않아도 좋아요.”

내 조심스러운 반응에 로즈니는 정말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해진 듯했다.

“무엇이든 편히 물어보세요. 친구에게 숨길만 한 이야기는 제 인생에 있어 몇 없답니다.”

그 몇 가지에 들어갈지도 모를 이야기지만, 그녀가 허락해주었으니 일단 말이라도 꺼내 보기로 했다.

“혹시 르미엘 양··· 그러니까 멜라니스 경을 제외한 가족분들과는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신가요.”

힐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로즈니는 내 질문을 어느 정도는 예상한 모양인지 별다른 변화가 없는 표정이었다.

“딱히 교류하고 지내는 편은 아니긴 하지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오라버니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나 보군요.”

내가 캐물은 게 아니라 루페르가 멋대로 말해준 것이긴 하지만 묘하게 양심에 찔린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로즈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저희 백작가도 겉보기만 그럴싸하지 다른 가문과 마찬가지로 썩 듣기 좋은 가정사를 갖고 있지 않답니다.”

로즈니는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유쾌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들어보시는 쪽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녀는 왜인지 모르게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내게 질문했다.

“궁금하신가요?”

당연히 궁금했다.

하지만 냉큼 고개를 끄덕이기도 뭐해 잠시 머뭇거렸다.

로즈니는 내게서 답을 듣지 못했음에도 표정에서 드러나는 마음을 읽은 것인지, 좀 더 진한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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