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대체 어떤 신사분이 이렇게 보석 세트 하나만 달랑 선물이랍시고 내밀겠어요! 적어도 몇 세트를 함께 주시거나 같이 입을 수 있는 드레스라도 준비를 하셨어야죠.”
여태 다른 표정 변화가 없던 루페르의 낯이 그녀의 핀잔에 금이 갔다.
묘하게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의 루페르가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내려다보고는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제가 판단력이 부족하여 되지도 않는 선물을 준비한 것 같습니다.”
그 사과에 어이가 없었던 내가 헛웃음 짓는데, 로즈니가 한술 더떠 그를 나무랐다.
“맞아요. 선물을 준비하시려면 제게 조언을 구하시지 그러셨어요. 이런 쪽으로는 오라버니보다 제가 더 나았을 텐데.”
“미안하다. 내 나름대로 성의를 다한다고 한 건데 생각이 짧았어.”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지 내리깔린 속눈썹에 가려진 그의 붉은 눈동자가 처연한 빛을 띠었다.
그는 함을 닫아 집사에게 건네며 내게 말했다.
“제대로 된 선물을 다시 준비하여 찾아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공녀님께서 애써 돌려 말씀해주셨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 덕에 할 말을 잃었던 내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아뇨! 충분해요!”
나는 집사가 받아든 보석함을 빼앗다시피 가져와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자 모두가 얼이 벙벙한 낯으로 나를 바라봤다.
“···공녀님?”
“전 이게 마음에 들어요! 사실 예의상 한 번 거절해 본 거였어요!”
젠장, 이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하지만 집사가 이 보석함을 들고 나가버리면 이후 멜라니스 남매가 어떤 선물을 안겨줄지가 너무 두려웠다.
“···하지만 공녀님.”
로즈니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함을 노려보기에, 나는 그녀가 다른 말을 꺼낼 수 없도록 재빨리 함을 열어 귀걸이부터 착용해 버렸다.
마침 장신구를 하지 않고 왔기에 망정이었다.
내가 보란 듯이 목걸이마저 착용하니 로즈니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공녀님, 오라버니의 면을 위해서라지만 어쩜 이리 마음이 넓으신지.”
아니, 절대 그런 게 아닌데···.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녀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디자인도 심플하니 평소에 하고 다니면 좋을 것 같고요. 고마워요, 멜라니스 경.”
부담스러워서 받고 싶은 마음이 전무했던 것과 별개로 감상평 자체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내 진심을 알아주는 이는 이 자리에 존재치 않았다.
루페르의 얼굴이 환해지고 반대로 로즈니의 얼굴은 일그러진 그때.
내 목에 걸린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뚱하게 바라보던 로즈니가 불현듯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숨을 들이켰다.
“······!”
얼마나 놀라 보였냐면, 마치 내가 집에 가스레인지를 켜놓고 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와 흡사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왜 그러느냐 묻기도 전에 표정을 굳힌 로즈니가 북풍처럼 서늘한 눈빛을 빛냈다.
그 극적이고 살벌한 변화에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역시 다음번엔 선물 드린 보석과 어울리는 드레스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로즈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루페르만이 밝은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하지만 이어지는 로즈니의 부름에 루페르 역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러니.”
“보아하니 오라버니의 볼일은 마치신 듯한데, 제가 긴히 공녀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자리를 피해주실 수 있을까요.”
로즈니는 루페르에게도 차가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나한테 화난 게 아닌 건가.’
그녀의 기색은 나와 루페르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싸늘했다.
“···공녀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나는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가지 마. 나만 혼자 두고 가지 말란 말이야!’
대체 뭐 때문에 저러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살벌한 그녀와 독대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하지만 또 루페르를 붙잡을 마땅한 명분도 없었기에,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네에···. 저야 괜찮죠.”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자리를 뜨고, 사용인들까지 전부 물린 로즈니는 오로지 나와 단둘이 남고서야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공녀님.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저희 오라버니를 어찌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드물게 진지한 그녀의 질문에 나 역시 쉬이 답하지 않고 말을 골랐다.
참 포괄적인 질문이었지만 내가 느낀 그대로 말해주면 되겠지.
“좋은 분 같았어요. 로즈니를 많이 아끼는 것 같고, 예의 바르시고, 상냥하고.”
“그럼··· 앞으로 오라버니와 만나실 의향이 있으신 건가요.”
“···네. 그렇죠?”
아무래도 로즈니의 오빠인데 또 볼일이 있겠지.
하지만 내 대답이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로즈니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더 살벌해졌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도 놀라 도망갈 만한 표정의 그녀가 화를 눌러 참는 게 역력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혼자 무어라 중얼거렸다.
“···오라버 ···공녀님 ···관심이 있···.”
드문드문 들려오는 단어의 조합으로 보아 나와 루페르에 관한 것은 분명한 듯한데,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답답함을 견디다 못한 내가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려는데, 돌연 로즈니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에 놀라서 나오려던 질문이 쏙 들어가 버렸다.
내가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그때, 로즈니가 어쩐지 원망 섞인 음성을 토해냈다.
“공녀님. 어쩜 그러실 수가 있나요.”
‘아, 내가 정말 뭔가 잘못했나.’
그렇지 않고서야 로즈니가 저렇게 반응할 일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마음이 상했으면 내게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짜증 어린 기색도 보인 적이 없는 그녀가 저럴까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토해내도 겸허히 받아들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로즈니의 이야기에 그 다짐은 종잇장처럼 쉽게 찢겨 나가 버렸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발작하듯 버럭 외쳤다.
“세상에! 어쩜 저희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 대체 왜···! 어디가 마음에 드신 거죠? 얼굴? 얼굴인가요?”
아니, 이게 무슨···?
나는 사자후처럼 터져 나온 그녀의 질문에 순간 얼이 나가버렸다.
내가 멍하니 로즈니를 바라자 그녀는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필사적으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공녀님.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세상에는 저희 오라버니 정도로 생긴 남자는 널리고 널렸답니다!”
“그, 로즈니?”
“물론 장점도 있죠. 공녀님께서 말씀하신 것들도 맞아요. 다정하고, 상냥하지만··· 그렇지만 걱정도 많아서 잔소리도 심해요.”
마지막 건 장점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공녀님이 더 아까운걸요!”
그 외에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내가 루페르를 만나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열변을 토해내는 로즈니를 슬슬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니.”
“그리고 이미 연인이 있으신데 다른 남자를 만나보겠다는 말씀은 좀···.”
“로즈··· 네에?! 저 애인 없어요!”
과도하게 흥분한 터라 내 부름을 듣지 못하던 로즈니는 내가 놀라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드디어 나와 눈을 맞춰오는 로즈니의 모습에, 나는 일단 그녀의 오해를 풀고자 입을 열었다.
“그, 하. 일단 가장 중요한 부분부터 짚고 넘어갈게요.”
로즈니는 조금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 멜라니스 경께 관심 없어요.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로즈니의 오빠니까 알고 지내고 싶다는 말이었다고요.”
내가 한숨과 같은 해명을 토해내자 경청하던 로즈니가 다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내며 환히 웃었다.
“그러셨군요! 어쩐지, 공녀님께서는 대공 각하와 교제 중이신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급격하게 진정해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로즈니를 어색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교제? 사귄다고? 누가, 내가? 아르반이랑?’
나는 아까부터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한 로즈니에게 사실을 알리고자 황급히 입을 뗐다.
“잠깐만요, 로즈니. 지금, 누가 누구랑 사귄다고요?”
“네? 그야 공녀님이랑 대공 각하지요.”
당연한 걸 뭘 묻고 그러냐는 듯,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이며 묻는 로즈니를 보고 나는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대체 어느 부분을 보고 나랑 아르반이 사귄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건데?!’
분명 에시트 산맥에 함께 다녀온 사실을 그녀에게 얘기하긴 했다.
하지만 진짜 속사정을 말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마정석 시찰을 위한 동행이었단 설명을 붙인 바가 있었다.
또한, 그 시찰 건에 대해서는 계속 쉬쉬할 생각이므로 아르반과는 연회 날 처음 만난 것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로즈니에게 미리 말해두기도 했고.
그리고 실제로 아르반과 연회 날 처음 만난 것처럼 행동했으며, 춤 한 번 같이 추지 않았다.
그저 딱딱하게 인사하고 선물만 달랑 전해준 뒤 돌아왔을 뿐.
‘아무리 생각해도 로즈니의 앞에서 아르반과 가깝게 지낸다고 티를 낸 적이 없는데···.’
아, 설마 지난번 세이린과 셋이 티타임을 가질 때 했던 얘기 때문인가.
하지만 고작 초대장을 받아내겠다고 했던 게 다였는데, 그것만으로 나와 아르반이 연인 관계라 확신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 로즈니.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랑 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내가 난감하고 조금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자 이번에는 로즈니가 당황했다.
“네에? 연인 사이가 아니시라고요?”
“···네.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야··· 당연히 공녀님께서 각하께 브로치를 선물하시기에···.”
“그냥 평범한 선물이잖아요. 반지도 아니고, 브로치 하나로 이렇게 오해한 거예요?”
도리어 되묻는 나를 보며, 로즈니는 입만 벙긋거렸다.
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에 답답해진 내가 다시 한번 말을 꺼내려는 때에, 로즈니가 설마설마하는 심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공녀님 아무것도 모르고 브로치를 선물하신 건가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시고?”
“···브로치를 선물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
내 대답에 이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된 로즈니를 보니 순식간에 불안한 감정이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