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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82화 (82/153)

82화

“미안, 미안. 네가 너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나는 아몬을 감싸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아몬은 상기된 낯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꾹 다물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몬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계속 이리 따뜻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심적 피로감이 밀려들어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그렇지만 바로 돌아가면 우리 동생님이 많이 서운해하겠지.’

나도 좀 허전할 테고.

아침부터 치장을 하느라 바빴고, 얼굴을 마주한 것도 외출하기 전에 잠깐이 전부였으니까.

나는 언제까지 문 앞에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몬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줘 작은 몸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

그러자 놀란 아몬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나는 아이를 두어 번 흔들어 얼러주고는 가까운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늘 함께 차를 마시던 창가의 테이블까지는 거리가 좀 있었기에 소파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선택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널찍한 소파에 앉으니 아몬을 굳이 놓아주지 않고 품에 끌어안고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나는 후다닥 일어나 맞은편 소파로 자리로 이동하려는 아몬을 뒤에서 끌어안아 저지했다.

“오늘만 여기 앉아있어. 응? 누나 소원이야.”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잖니, 그러니까 살아 있는 누나 소원도 좀 들어주라.

뻔뻔한 생각을 하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분명 어설프기 그지없는 연기일 터였다. 하지만 나는 아몬이 이런 발연기에도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넘어가 주는 건가?

“···소원이시라면.”

‘역시, 계획대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환하게 웃으며 아몬을 끌어안고 소파에 반쯤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녁 먹고 뭐 하고 있었어?”

내가 반쯤 드러누우니 내게 붙들려있던 아몬 역시 누워버린 자세가 되었다.

아몬은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냥, 책을 좀 보다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그림. 나는 눈을 반짝였다.

악기나 그림, 시와 같이 귀족이라면 누구나 한두 가지 정도는 기본 소양으로 배워두는 것들이 있다.

아몬 역시 그중 하나를 배우고 있었고, 그게 바로 그림이었다.

“뭘 그리고 있었는데?”

아직 아몬이 그린 그림은 본 적이 없었기에 호기심이 치솟았다.

“별건 아니에요.”

“뭔데? 보여달라고는 안 할게. 그냥 뭘 그리는지 궁금해서.”

“···인물화를 그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인물, 혹시 나?

거기까지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소리 내 물어보지는 않았다.

부끄러움이 많은 우리 아몬은 내가 무슨 말만 했다 하면 얼굴에 분홍빛 꽃물이 들곤 하니까.

물어보면 이번에도 여지없이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하겠지.

수줍어하는 아몬의 얼굴은 무척이나 탐스럽고 귀여웠지만 어린 동생을 너무 놀려먹는 것 같아 자중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나중에 나도 그려줄 수 있어?”

“물론이죠. 제 실력이 늘어 누나의 미모를 그림에 담아낼 수 있게 되면, 그때는 꼭 그려드릴게요.”

그렇게까지 거창할 필요는 없는데.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내게 중요치 않았다. 그림을 그려주는 이가 아몬이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니까.

하지만 내 입장과 달리 아몬은 나를 예쁘게 그려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거겠지.

“그래.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너무 애쓰지는 말고.”

이리 당부하지 않으면 날밤을 새워가며 그림에만 매진할지도 몰라 뒷말을 덧붙였다.

“네, 그럼요. 이제 누나가 걱정할만한 일은 하지 않아요.”

아몬의 대답은 어쩐지 불길한 가정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걱정하지 않았다면 정말 내 상상처럼 밤을 새워가며 노력했을지도 모른다는, 기함할만한 가정 말이다.

‘그럴 리 없겠지. 나도 참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 큰일이야.’

나는 뇌리를 스친 생각을 털어내고는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원래는 같이 차라도 한 잔 마시려고 온 건데, 이렇게 누워있으니까 일어나가기 싫다.”

“저도··· 그래요.”

“아몬, 너도?”

나도. 사람은 머리가 어딘가에 닿으면 일어나기 싫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암, 그렇고말고.

“그럼 우리 이렇게 잠깐만 누워있자. 딱 십 분만.”

“네.”

나는 푹신한 소파의 쿠션에 기대 눈을 감고 있다 깜빡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떠 시계를 확인했을 때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흘러간 뒤였다.

‘아, 너무 많이 잤네.’

어차피 뒤의 일정은 잠을 자는 것뿐이었으니 아무 관계도 없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소파에 누워 잘 수는 없었다.

나는 어느새 나와 함께 새근새근 잠이 든 아몬을 조심히 들어 올려 침대에 뉘어주었다.

“끙.”

잠든 아이를 안아 올려 옮기는 건 생각보다 힘이 드는 일이었다.

나는 죽은 듯이 잠든 아몬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

“아가씨, 편지가 도착했어요.”

세수하고 에바의 도움을 받아 옷을 정돈하고 있는데 세바니가 들어서며 말했다.

‘편지? 무슨 편지?’

나한테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나.

“이리 줘볼래?”

“여기요.”

“고마워.”

누굴까. 나는 세바니에게 건네받은 편지를 들어 올렸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편지 봉투는 검은색의 아무런 문양이 없는 왁스로 봉해져 있었다.

나는 세바니가 함께 건네준 편지 칼로 봉투를 뜯었다.

“응?”

그런데 안쪽에는 푸른빛의 왁스로 밀봉된 봉투가 하나 더 들어있었다.

어쩐지 이상하게 두껍더라.

“이거··· 새?”

찍혀 있는 인장이 멋있기는 한데 무슨 새인지를 모르겠다.

내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율렌이 폴짝 뛰어 내 어깨에 착지하며 편지를 들여다봤다.

“솔렘의 인장이네.”

“솔렘이라고?”

확신에 차 있는 율렌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옆 나라 왕실의 문장이 찍힌 편지라니.

‘그것도 은밀히 두 번이나 봉해진.’

거기서 나한테 편지가 올 일이 없을 텐데?

“대체 누가···.”

아, 설마. 나는 목덜미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너무 여러 가지 일이 겹쳐 잠시 잊고 있었는데, 분명 원작의 리엘리는 타국으로 시집을 갔었다.

그리고 죽은 공작부인, 세리나 로베르는 본래···.

“솔렘의 왕녀였지.”

나는 누군가가 뒤통수를 후려친 것 같은 충격에 멍하니 중얼거렸다.

율렌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이내 편지로 관심을 돌렸다.

“저, 사실 우편을 전달한 사람이 늘 오시던 분이 아니었어요. 하얀 로브를 입은 처음 보는 남자였거든요.”

내가 한참을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세바니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받지 말까 생각했는데, 아가씨가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해서···.”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말했다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세바니에게 물었다.

세바니는 내 표정을 살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시면서 꼭 아가씨께 은밀히 가져다드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던데··· 제가 속은 건가요?”

“아니, 아냐. 기다리던 게, 맞을 거야.”

정확하게는 내가 아니라 원래의 리엘리 로베르가 기다리던 물건일 테지만.

내가 고개를 내젓자 안도한 듯 웃어 보이는 세바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먼저 내보냈다.

그녀가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문이 닫힘과 동시에 망설임 없이 봉투를 뜯었다.

대체 뭐라고 적혀있을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빠르게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나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까지 모두 훑어본 후, 잠시 천장을 올려다봤다.

“후우··· 하아···.”

크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차오른 짜증과 분노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편지에는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음을 알리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야···!

“엘리, 너··· 결혼하려고? 다른 나라 애랑? 주인은 어쩌고!”

“아니!! 그럴 리가 있어?! 그리고 여기서 아르반이 왜 나와!”

율렌의 질문에 나는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럼 그렇다고 말하면 되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율렌의 짜증에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나는 거칠게 머리를 들쑤셨다.

“아악!!”

편지를 보낸 이는 죽은 공작부인, 세리나의 언니이자 현 솔렘의 왕, 타티아나 솔렘이었다.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 리엘리는 그녀에게 남몰래 편지를 보냈던 모양이다.

타티아나는 우선 제 동생 세리나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사과와 유감을 다시 한번 표명해왔다.

그리고 리엘리의 의지를 존중한다는 내용과 함께 괜찮은 결혼 상대를 뽑아서 보내겠다는 약속 또한.

하지만 더 믿기 힘든 현실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번 건국제에 맞춰 타티아나의 동생이자 세리나의 오빠인 티베온 켈레나프 대공이 적당한 상대를 고른 초상화를 들고 당도하리란 문장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미치겠네, 진짜.”

건국제라면 분명 사절단을 겸해서 방문하는 김에 겸사겸사 부탁을 들어주려는 심상인 듯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건국제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즉, 다시 편지를 보낼 새도 없이 내 결혼 상대를 들고 나타날 외숙부와 마주하게 생겼다.

“하필이면 내가 빙의하기 전에 그런 편지를 보내서는···.”

아니다, 아마 원작의 리엘리는 이와 같은 수순을 밟아 솔렘으로 시집을 간 것일 터였다.

대충 시기를 따져보면 그랬다.

원작에서와 같이 진행이 되려면 이 편지를 받아든 리엘리가 외숙부인 켈레나프 대공과 함께 공작저를 떠버리는 전개로 진행이 되었겠지.

따지자면 리엘리의 몸에 빙의해 그 당연한 순리를 깨버린 건 나였으니, 달리 원망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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