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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80화 (80/153)

80화

나는 힐끗 밖을 내다봤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마차 안까지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실상 연회장에 머물렀던 시간보다 준비하고 이동하는 데 할애한 시간이 훨씬 많았다.

“로즈니는 괜찮던가요?”

“마차로 이동할 때는 많이 힘들어했지만 약을 먹고 잠들었으니 괜찮을 겁니다. 피로 누적이 원인이라더군요.”

역시 그간 너무 무리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로즈니가 원해서 하는 일이었다지만 어찌 됐든 나 때문에 벌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후, 제가 괜한 부탁을 해서 로즈니를 힘들게 했네요.”

“그런 말씀 마세요. 로즈니가 공녀님의 말을 듣게 된다면 단순히 서운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로즈니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이니까.

“하하, 그렇네요. 이 말은 로즈니 앞에서는 꺼내면 안 되겠어요.”

“정말 공녀님의 잘못이 아니니 혹여라도 자책하지 마시고요.”

장난기가 빠진 세이린의 조언에 나는 잠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흔들림 없는 세이린의 눈빛을 마주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인데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 세이린은 마차 내부에 구비된 간이 램프의 불을 밝혔다.

그녀는 엷은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 사교계에 처음 발을 들이셨는데, 어떠셨습니까.”

글쎄, 어땠냐라.

“그냥··· 생각했던 것과 다를 것 없는 느낌이었어요.”

아, 황궁이 상상보다 더 크고 화려했다는 점이 다르긴 했지.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면에서는 대체로 상상과 비슷했다.

“···그러셨습니까.”

세이린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느릿하게 속삭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을 이었다.

“네, 뭐. 사교계 자체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으니까요.”

뭐든 기대가 커야 실망도 크다.

그러니 애초에 사교계에 대한 환상이 존재하지 않던 나로서는 심드렁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경이랑 춤을 췄던 순간은 정말 즐거웠어요.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떼를 써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 만큼요.”

그녀와 댄스 플로어에 서서 스텝을 밟을 때는 온전히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기에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던 순간이었어.’

처음에는 잔뜩 긴장했었지만 그래도 긴장이 풀리고부터는 춤을 춘다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리 말씀해주시니, 기쁘네요.”

“아, 그리고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긴 좀 그렇긴 하지만···.”

나는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려다 조금 망설였다.

그러자 세이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 러니까, 혹시 정말 만약에, 경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저랑 편하게,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건 어때요?”

이게 뭐라고 떨리는지.

사실 예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에서 이따금 거리감을 느껴졌기에 내심 불만스러웠다.

‘친구 사이에 존댓말을 쓴다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허나 말까지 편하게 했다가는 언젠가 다른 중요한 자리에서 실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애초에 세이린이라면 그건 곤란하다고 거절할지도 모르지.’

나는 약간 놀란 듯한 기색의 세이린을 슬쩍 쳐다봤다.

로즈니는 첫 만남에서부터 이름을 불러 달라 요청한 바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세이린에게는 계속 경, 혹은 아델 경이라 부르니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생각을 종종 하고는 했다.

“제 이름이야 편히 불러주셔도 무방합니다만··· 서로라면 저도 공녀님의 성함을 불러도 된다는 말씀이 맞습니까?”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세이린이 진중한 어조로 되물어 왔다.

“네. 편하게 리엘리라고 불러주세요. 그럼 허락하신 거니까··· 세이린, 이라고 부를게요···?”

그동안 부르지 않던 이름을 부르려니 사실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원래 뭐든 처음이 어색한 거지 두 번, 세 번, 그리고 계속 반복하다 보면 곧 아무렇지도 않아질 것이다.

“···이렇게 저희끼리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는 걸 로즈니가 알게 되면 적잖이 서운해하겠네요. 리엘리.”

세이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이내 해사한 미소를 그려냈다.

“다음에 보게 되면 로즈니에게도 이름으로 불러 달라 부탁하려고요.”

“로즈니라면 분명 좋아할 겁니다.”

나는 씩, 소리 없이 마주 웃어 보였다.

*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창밖의 풍경은 고즈넉하다기보다는 을씨년스러웠다.

군데군데 가로수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지만 이곳은 한국의 도심과 달리 큰 저택들만이 듬성듬성 자리한 곳이었다.

그 탓에 아직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해가 떨어지니 한밤중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리 어둠이 짙게 깔려있으니, 출발할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목적지에 도착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

마부에게 따로 설명해 두지 않아 그대로 공작저로 돌아와 버렸다.

오는 길에 세이린을 데려다주고 왔었어야 했는데···!

“제가 따로 얘기하는 걸 잊어서 마부가 저택으로 돌아왔나 봐요.”

나는 미안한 마음에 변명을 늘어놓듯 멋쩍게 이야기했다.

여기서부터 또다시 대공저로 향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더구나 세이린은 아침부터 나를 데리러 공작저에도 왔다가 황궁에도 가고, 또 멜라니스 백작저에까지 다녀온 몸이었다.

아무리 기사라지만 그렇게 마차를 많이 탔으니 심적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리 만무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마차보다 말을 타고 돌아가는 편이 빠를 것 같은데, 말 한 마리만 빌릴 수 있을까요?”

“네에?!”

이렇게 깜깜한데 말이라니.

나는 그녀의 요청에 기겁하며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세이린의 얼굴은 무구하기만 했다.

마치 내가 왜 이렇게 놀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나는 다시 한번 창밖을 확인하고는 딱 잘라 말했다.

“안 돼요. 이렇게 어두운데 말을 타고 돌아가시겠다니, 그러지 말고 오늘은 하루 자고 가세요.”

그러자 세이린은 두 번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왔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네? 네….”

뭘까, 원하는 답을 들었음에도 얼떨떨했다.

무심코 그녀라면 내 제안을 거절하고 돌아가겠다고 말할 것이라 여겼나 보다.

심지어 집주인인 나보다 먼저 내려 손을 내밀어 오는 모습에 어쩐지 조금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

“아가씨, 남작님. 연회는 충분히 즐기고 오셨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시녀장, 미라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세이린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서며 대충 대답했다.

“뭐, 괜찮았어. 그보다 아몬은?”

“도련님께서는 막 식사를 마치시고 방으로 향하셨습니다.”

“알겠어. 음, 일단 아몬에게는 내가 돌아왔다는 말은 전하지 마.”

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면 바로 뛰어나올 것을 알기에 전한 말이었다.

드레스 차림이 불편하기도 하고, 먼저 씻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아몬이 금방 식사를 했다고 하니 씻고 차 한 잔을 함께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기 아델 경께서 오늘 하루 묵고 가실 테니 준비된 방으로 안내해드려.”

“알겠습니다.”

나는 말하면서 잡고 있던 세이린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손이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낚아채듯 도로 붙잡아왔다.

“방까지 모셔다드리고 가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도 피곤하잖아요. 가서 편하게 쉬세요.”

“오늘 하루는 제가 에스코트를 책임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까 다른 이에게 에스코트 권한을 넘기게 되어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는 것이니, 이해해주세요.”

“······.”

능구렁이처럼 유들유들한 세이린의 설득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결국 세이린은 내 방 앞에 다다라서야 제가 묵을 곳으로 안내를 받아 떠났다.

나는 그녀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전하고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세이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을 열었다.

‘이제 좀 쉴 수 있겠네.’

하지만 현실은 내 기대를 배반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율렌의 높은 음성이 고막을 찔러왔다.

“뭐야···! 너 대체 어딜 갔다 온 거야?!”

나는 난데없는 고함에 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황당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딜 갔다 오다니, 황궁이지. 황. 궁!!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갑자기 딴소리야?”

“정말 황궁만 다녀온 거 맞아? 어디서 이런 더러운 걸 묻혀서 온 건데! 으, 냄새 때문에 울렁거려···.”

율렌은 작은 날개를 퍼덕여 날아올라 내 등을 떠밀었다.

작지만 강한 힘에 의해 강제로 욕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니 옆에서 에바와 세바니가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거렸다.

그런 와중에 난데없이 신성력이 내 몸을 휘감아 왔다.

순식간에 피로감이 날아가고 몸이 가뿐해졌지만 그저 황당하기만 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아니, 무슨 냄새가 난다고 이 난리야? 냄새도 신성력으로 없어져? 얘들아, 나한테서 냄새나니?”

“아뇨. 아무 냄새도 안 나요.”

“네. 오히려 좋은 향기만 나시는걸요.”

내 물음에 쌍둥이가 화들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봐, 그렇다잖아!”

나는 여봐란듯이 몸을 돌려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율렌을 째려봤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내 눈높이에서 비행하며 불만스러운 음성을 토해냈다.

“신성력을 이렇게 들이부었는데도 네 몸에 밴 냄새가 안 빠져. 빨리 향 좋은 입욕제를 넣은 목욕물 준비해!”

“네!”

“금방 준비할게요.”

자연스럽게 명령하는 율렌이나, 그 명령에 후다닥 욕실로 튀어가는 쌍둥이나, 내 입장에서는 전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아니, 쟤네는 내가 아니라 율렌의 전속 시녀로 취직이라도 한 거야?’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고 이 난리야?”

지금도 옆에서 열심히 날갯짓을 하며 내게 신성력을 쏟고 있는 율렌의 모습에 팔을 들어 올려 냄새를 맡았다.

아무리 코를 박고 킁킁거려도 아침에 발랐던 향유의 잔향만이 은은하게 감돌 뿐, 다른 불쾌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 냄새를 말하는 게 아냐. ···마력의 냄새를 말하는 거지.”

율렌은 욕실로 사라진 쌍둥이의 존재를 의식하는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녀석의 설명에 불과 몇 시간 전에 느꼈던 바를 상기해냈다.

“마력, 아.”

황궁 안쪽으로 향할수록 진득해지던 불쾌한 검은 마력.

어떻게 잊고 있었는지 의아해질 만큼 진득하고 숨이 막히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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