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녀는 우선 밖에서 시종을 불러 로즈니와 세이린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해 달라 부탁했다.
시종은 알아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고, 금세 돌아와 그녀들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로즈니의 몸 상태가 아까보다 악화되었고, 출발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로즈니가 몸을 가누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음에도 고집을 부리며 세이린을 자꾸 연회장으로 돌려보내려 했다는 설명까지 들었을 때는 솔직히 기가 막혔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집으로 돌아갔다는 걸 보면 아마 세이린이 반강제로 그녀를 끌고 가지 않았을까 싶다.
리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루페르가 누워있는 휴게실로 돌아갔다.
로즈니가 먼저 돌아가 버렸으니 그를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리엘리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그를 멜라니스 백작저에 떨궈주고 돌아가기로.
‘사실 다른 방법이 없지.’
타고 온 마차가 한 대뿐이니 선택사항이 없었다.
그사이 곯아떨어진 루페르는 여러 시종의 도움으로 리엘리가 타고 온 마차로 옮겨졌다.
마차까지 그를 옮기느라 진땀을 흘린 시종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리엘리는 멜라니스 백작가를 목적지로 출발했다.
“에바랑 세바니를 안 데리고 와서 망정이다, 진짜.”
어차피 황궁 내 연회장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시중인을 대동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귀족은 사용인을 데려와 대기시키고는 했다.
하지만 리엘리는 그런 인력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쌍둥이를 데려오지 않았는데, 문득 지금 그게 정말 잘한 행동이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마 데리고 왔으면 루페르를 보자마자 놀라 까무러쳤을 것이 뻔했으니까.
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 마차가 멈춰 서며 호위 기사가 문을 두드려왔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먼저 가서 내가 일러주는 대로 설명하고 이쪽 도련님 모셔갈 사용인들을 데려오라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리엘리는 기사에게 대략 전후 사정을 설명한 뒤 저택에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앞에서 잘 자고 있는 루페르가 괜히 얄밉게 보여 볼을 쿡, 찔러봤다.
“으···.”
고운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씨!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가씨.”
“싫어! 엄마 아빠도 없는데 언니도 아프고, 오빠가 돌아왔는데 내가 나가봐야 할 것 아냐!”
“그렇지만 도련님께서는 지금 혼자 돌아오신 게 아니시라···!”
조용하기만 했던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똑똑-
“아가씨···!”
곧이어 아주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안절부절못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애타게 아가씨를 외치고 있었지만 리엘리가 문을 열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마차 앞에는 작은 소녀와 집사로 추정되는 노신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리엘리는 순간 제 앞에 서 있는 작은 여자아이를 보고 놀라 크게 숨을 들이켤 뻔했다.
너무 뜻밖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당황한 티를 내면 이상하게 비칠 것이 뻔했기에, 애써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안녕하세요. 멜라니스 백작가의 차녀, 르미엘 멜라니스라고 합니다.”
남몰래 작게 심호흡하는 리엘리의 귓가로 또랑또랑한 미성이 파고들었다.
“···그래, 안녕.”
청명한 여름 하늘을 빼다 박은 듯이 깨끗한 연하늘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자아이.
소녀의 머리에는 제 앞에 누워있는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연상시키는 진한 분홍빛의 보닛이 씌워져 있었다.
마치 솜사탕을 연상시키는 곱슬곱슬한 푸른 빛의 머리카락은 모두 보닛 안쪽으로 넣으려 했던 것 같았지만 한 가닥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로 인해 리엘리는 아이를 마주한 순간 한눈에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여태까지 잊고 있던 원작의 여주인공.’
르미엘 로베르가 되기 전, 과거의 르미엘이었다.
“아, 나는 로베르 공작가의 리엘리 로베르라고 해.”
뒤늦게 신분을 밝히면서도 리엘리의 시선은 눈앞의 작은 소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르미엘. 르미엘 멜라니스라···.’
그녀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성이 로베르가 아니라는 사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다르게 말하자면 르미엘의 결혼 전 성이 멜라니스라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건 정말 불가항력이야. 원작에서는 초반부터 둘이 결혼 한 상태로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그 때문에 그녀의 결혼 전 성을 기억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걸 다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리고 로즈니로부터 그녀의 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기에 더욱 예상치 못했다.
‘···아까 분명 루페르도 로즈니를 하나뿐인 동생이라고 했었고.’
이제 원작의 내용은 완전히 달라졌을 테니, 르미엘이 불행해질 일도 없겠지.
아니,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원작의 르미엘이 아몬과 결혼하기 전에는 행복한 삶을 살아왔던가?
리엘리는 기억을 더듬기 위해 슬쩍 미간을 좁히며 르미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참 깜찍하게 생긴 아이였다. 비록 왜인지 모르게 잔뜩 골이나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있다 하더라도.
아이 역시 리엘리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가 무언가를 떠올리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공녀님, 인 거예요?”
“응. 그렇지?”
“공녀님이 왜 우리 오빠랑 같이 와요? 오빠는 왜 저렇게 누워있고요?”
“음, 그건 말이야···.”
아이가 던져대는 질문은 모두 난감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리엘리는 뭐라 대답하면 좋을까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그래도 애한테 곧이곧대로 네 오빠가 술 취해 뻗어버리는 바람에 배달해준 거라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 탓에 르미엘의 과거를 떠올리던 사실은 뇌리에서 잊혀버렸다.
그녀가 즉각 답을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자 르미엘이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그···!”
르미엘이 무어라 말을 쏟아내려는 순간, 리엘리의 뒤쪽에서 잔뜩 잠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미엘?”
“오, 오라버니···.”
제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던 꼬마는 어디 갔는지 집사로 보이는 노신사의 뒤로 쏙 숨어버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웃음이 났다.
리엘리가 작게 웃자 르미엘이 다시 그녀를 째려봤다.
하지만 곧 리엘리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화들짝 놀라 눈동자를 마구 굴려댔다.
리엘리가 뒤를 돌아보니 누워있던 루페르가 인상을 잔뜩 구기며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공녀님?”
그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리엘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르미엘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곧장 허리를 수그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큭···.”
루페르의 입에서 얕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괜찮아요?”
리엘리는 걱정스레 물었다.
‘그 고통, 나도 잘 알지···.’
저 표정.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오만상을 구긴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
속이 울렁거리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르겠고, 아무튼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일 것이다.
“여기, 좀 도와주세요.”
“아, 예. 예!”
리엘리가 밖을 향해 외치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들어와 그의 운신을 도왔다.
루페르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역시 아까 멀쩡히 얘기하던 것과 달리 상당히 만취 상태였던 듯싶다.
“그···.”
루페르는 무어라 입을 열려 했지만 발을 헛디뎌 휘청거리는 바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일단 들어가서 쉬어요.”
그런 루페르를 바라보던 리엘리가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그 제스처를 알아본 시종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그를 부축해서 안으로 사라졌다.
여전히 리엘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루페르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인사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는 듯한 눈치였지만, 리엘리는 그저 웃어주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참, 혹시 여기 세이린 아델 경께서 오시지 않았나요?”
루페르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르미엘을 바라보다 불현듯 생각이나 물었다.
*
내 물음에 아직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작가의 집사가 정중히 대답했다.
“예. 로즈니 아가씨를 모시고 오셨습니다.”
“아직 안에 있나요?”
“아가씨께서 잠드시는 모습을 확인하시고 마차가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 동행이라서, 불러주시면 저와 함께 돌아가면 될 것 같네요.”
안 하던 외출을 한 데다가 연회에서 하도 많은 일을 겪었기에 피곤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로즈니의 상태를 전해 들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집사에게 묻더라도 답을 들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을 통해 듣는 것이 더 안심되니까.
“예, 바로 말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문은 좀 닫아주면 좋겠어요.”
집사가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리라 여긴 나는 시트에 몸을 기대며 부탁했다.
노출이 많은 의상을 입고 있었기에 바깥의 공기가 너무 차가웠다.
하지만 집사는 곧바로 문을 닫아주리라 여긴 내 기대와 달리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도련님을 모셔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녀님. 다음 기회에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괜찮아요. 그보다 좀 추워서 그런데 문 좀 닫아주시겠어요?”
“이런, 늙은이가 눈치가 없었군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내가 다시 한번 요청하자 노집사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문을 닫아주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눈을 뜨면 침실이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간절했다.
분명 그냥 눈만 감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귓가를 스치는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깜빡 잠이 들뻔했다.
퍼드득거리며 몸을 일으킨 나는 황급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세이린이 옅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마차 내부를 감돌아 온몸에 소름이 끼쳤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경, 들어와요.”
“실례하겠습니다.”
세이린이 마차에 몸을 싣자 그녀의 뒤로 늘어선 백작가 사용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선두에 서 있던 노집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살펴 가십시오, 공녀님. 남작님.”
그가 예를 갖추자 그 뒤에 서 있던 사용인들 또한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못내 부담스러웠다.
나는 마차 문을 툭툭, 두 번 두드려 마부에게 빨리 마차를 출발시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듣자니 멜라니스 경께서 과음을 하셨다고요. 삯 마차를 부르시지 않고 직접 모시고 오셨군요.”
“아, 멜라니스 경이요? 삯마차를 부를 수도 있었··· 죠. 놀란 나머지 경황이 없어서 미처 생각을 못 했어요.”
실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여기에도 콜택시 같은 개념의 마차가 있나 보네.’
새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알았다면 다른 마차에 실어서 보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