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발코니로 들어서며 루페르가 커튼을 쳤다.
가려지는 커튼 사이로 언뜻, 아르반의 푸른빛 눈동자를 스치듯 보았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스침과 동시에 잊혀버렸다.
‘으, 아까보다 더 추운 것 같은데···.’
겉옷도 없어 맨어깨가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나는 무의식중에 팔뚝을 쓸어내렸다.
내가 몸을 부르르 떨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루페르가 테이블에 따뜻한 와인 두 잔을 내려두고는 제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대체 언제 와인까지 가지고 온 거람.’
물 대신 술을 들이켜는 주당이라도 되는 걸까.
나는 약간 질린 듯한 기분으로 그가 걸쳐준 외투를 만지작거렸다.
양심껏 돌려주자는 마음과 추워죽겠는데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는 마음이 충돌해서 잠시 망설이는데, 루페르가 내게 와인잔을 건네며 말문을 열었다.
“저는 열이 올라 조금 덥던 참입니다. 괜찮으시다면 공녀님께서 입고 계시지요.”
“···고마워요. 사양하지 않을게요.”
단순히 나를 배려하기 위한 거짓말은 아닌지 잔을 받아들며 스친 그의 손끝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나는 눈동자로 그의 손을 쫓았다.
좀 이상할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는데, 착각인가.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머금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쩌면 내 손이 너무 차가워 그의 손이 더 뜨겁게 느껴졌을지도.
루페르는 이야기를 이어가자는 말이 무색하게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나 역시 그에게 먼저 말을 걸만한 기분도 아니었을뿐더러 초면인지라 서먹했기에 우리는 한동안 와인을 홀짝이기만 했다.
그러다 루페르가 먼저 잔을 비우고 새로운 잔을 집어 들고 나서야 우리 사이의 침묵이 깨졌다.
“사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진중한 목소리. 쉬이 내뱉지 못할 만큼 무거운 주제를 꺼내려는 걸까.
나는 약간 긴장하며 대답했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으신데요.”
그러자 그는 걱정이 배어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은 전에도 로즈니와 가깝게 지냈던 영애 몇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까보다 붉어진 눈매를 손으로 매만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 애가 웬일로 들떠있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죠. 당연하지만 저도 좋게 생각했습니다.”
“그랬군요.”
항상 혼자였던 동생에게 또래의 친구가 생기는데 반기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뭐가요?”
“그들은 로즈니라는 아이를 보고 접근했던 게 아니라 멜라니스 백작가의 가세를 보고 접근했을 뿐이었습니다.”
“아···.”
조금 씁쓸한 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그 사실을 알고 로즈니는 그 영애들을 멀리하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그 애가 왜 그렇게까지 영애들을 밀어내는지 이해할 수 없어 물었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기울여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게 맞춰주고 잘 대해주는 이들을 왜 밀어내느냐고. 그랬더니 그 애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루페르의 이야기를 들으며 로즈니에 관해 떠올리던 차였다.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상념에서 깨어나 눈만 껌벅였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내 대답을 바라지 않았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즐겁다기보다 여러 가지 감정이 겹쳐진 듯한 표정이었다.
“자신은 친구를 원했던 거지 옆에서 떨어질 빵부스러기나 탐내는 자들을 원하는 게 아니라 하더군요.”
참으로 그녀다운 말이었다.
로즈니가 옆에서 딸랑거리기나 하는 이들을 곁에 둔다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애가 아는 이들을 만나러 간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솔직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그는 답답한지 목을 조이고 있던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어내며 말했다.
“공녀님께서야 아쉬울 게 없는 분이지만 아델 남작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 애를 이용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누가 됐든 쳐내리라 마음먹었거든요.”
“그럴 리가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소 냉랭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그는 이해한다는 듯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맞습니다. 몇 마디 나눠보니 금세 알겠더군요. 남작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그가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붉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직시했다.
“하지만 제게는 무엇보다 로즈니가 우선이니 아마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똑같이 행동할 겁니다.”
그것까지는 본인 자유지 않을까.
어찌 됐든 그가 세이린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동생이 또다시 상처받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경계했을 뿐이었다.
나는 무어라 답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찬 아이지만 한 번 마음을 내어주면 뒤돌아볼 줄을 모릅니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게 가라앉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하나 남은 가족인지라 제게는 정말 소중한 아이입니다. 초면에 이런 말씀을 드려 난감하시겠지만, 부디 저희 로즈니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홍색에 가까운 그의 속눈썹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대로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는 루페르의 모습에 나는 아리송한 기분이 되었다.
‘···잠깐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나 남은 가족?’
멜라니스 백작과 백작 부인이 버젓이 살아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그를 살폈다.
‘···역시 이상해. 아무리 그래도 다 터놓고 말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이 보였는데.’
내가 잘못 본 건가?
막 그에게 답을 하려는 찰나, 루페르의 몸이 순간 휘청였다.
“······!”
본능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킨 나는 재빨리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공녀님,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양 말하며 몸을 바로 했다.
하지만 귀 끝까지 붉은 물이 든 것이 아무래도 과음을 한 것 같았다.
“하, 진짜···.”
티가 잘 안 나서 너무 늦게 눈치채버렸다.
그런 와중에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을 요구하는 걸 보면 정말 로즈니와 남매는 남매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아주 똑같네.
“그래요. 제가 신경 쓰도록 할게요. 비단 경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 제게도 소중한 친구니까.”
“그럼 됐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중심을 잡기 힘든지 곧장 앞의 테이블을 붙잡았다.
나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루페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부축했다.
‘이 사람이 취해서 헛소리를 한 건지 아닌지는 나중에 들어봐야겠네.’
혀만 꼬이지 않았다 뿐이지 만취 상태로 보이니 오늘 일을 어디까지 기억할지 모르겠다.
“괜찮습니다.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는 제 팔을 붙잡은 내 손을 조심히 떨쳐내고는 바로 섰다.
그렇게 있으니 또 나름 괜찮아 보여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보고 있는데, 발을 떼는 순간 균형이 무너지는 모습에 혀를 찼다.
‘입만 살았군.’
나는 다시 루페르의 팔을 잡았다.
“이러고 어떻게 돌아가려고요. 됐으니까 잡아요.”
아무래도 루페르 역시 바로 저택에 돌려보내야 할 것 같았다.
로즈니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면 같이 돌려보내면 될 텐데, 그러려면 서둘러야 했다.
“죄송합니다. 사용인을 불러주시면···.”
“저는 괜찮으니까 그냥 이대로 가죠. 서두르면 로즈니와 함께 돌아가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내가 그의 말을 자르고 빠르게 얘기하자 잠시 침묵하던 루페르가 슬며시 내 쪽으로 몸을 기대왔다.
진작 이럴 것이지.
*
리엘리는 걸리적거리는 커튼을 획, 젖히며 다시 연회장에 들어섰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귀족들의 이목이 쏠렸다.
그들은 연회장에 들어서는 루페르와 리엘리를 보고 깜짝 놀라 급히 숨을 들이켰다.
“아니···!”
“헉! 저런···.”
하지만 리엘리는 그런 반응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 빨리 루페르를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 와중에 유독 뒤통수 쪽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져 왔다.
그러나 돌아볼 기력이 없던 리엘리는 그냥 무시해버렸다.
‘나한테 불만 있으면 직접 와서 말하겠지.’
장정을 부축한다는 게 생각보다 힘들어서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후우···.”
리엘리는 튀어나오는 한숨을 구태여 막지 않았다.
이쪽으로 이목이 쏠리는 것쯤이야 예상했다지만 귀족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극성이었다.
부축한다고 힘은 힘대로, 신경은 신경대로 쓰이는 상황인지라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빨리했다.
리엘리는 순간 옆을 스쳐 지나가는 시종을 보고는 도와달라 부를까, 고민했지만 곧 생각을 철회했다.
‘아무래도 내가 이 남자와 붙어서 나오니 이상한 오해들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종을 불러 루페르의 부축을 맡긴다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피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괜히 여러 가지 말을 나돌게 만드느니 차라리 지금 이 상태를 고수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떳떳하게 행동하면 큰 오해는 덜겠지.
그리 생각하며 어찌어찌 그를 끌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푸른 눈동자가 진득하니 그녀의 뒤를 쫓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리엘리는 태연하게 연회장 옆에 위치한 휴게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기진맥진한 리엘리는 루페르와 함께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버렸다.
“하아···.”
힘들어 죽겠다, 진짜.
그녀는 한숨을 토해내며 이상하게 조용한 루페르를 바라봤다.
‘뭐야? 혼자 졸고 있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술 취한 사람한테 따져봐야 득 것 하나 없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리엘리는 오뚝이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루페르는 반쯤 잠이 들어 조용했고, 잠시 숨도 돌렸으니 속전속결로 움직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