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그래, 며칠 밤을 새워가며 드레스를 만들어 줄 만큼 열과 성을 다해줬으니···.’
그토록 이번 연회를 고대했던 그녀였다.
처음 연회 참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으니 그녀 자신의 참석보다 나 때문에 기대했다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한 곡만 추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리는 춤을 춘다기에는 결연한 표정으로 댄스 플로어에 섰다.
처음 이곳에 섰을 때는 상당히 긴장되고 떨렸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곧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고, 스텝을 밟기 시작하는데 루페르가 나를 불러왔다.
“공녀님.”
“네?”
“실례가 되는 질문임을 알고 있지만··· 저희 로즈니를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지금까지의 태도와 달리 머뭇거림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힐끗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퍼뜩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눈가가 붉잖아.’
나는 손으로 세게 문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눈가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가 뒤늦게 그의 질문을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아, 별로 실례되는 질문도 아닌걸요. 로즈니의 살롱에서 처음 만났어요. 제가 손님으로 찾아갔었죠.”
“그러셨습니까. 하긴, 그 애가 옷을 참 잘 만들긴 하죠. 제가 입고 있는 연회복도 그 아이가 만들어 준 겁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어왔다.
화려한 외모의 남자가 눈가를 붉히며 미소 짓는 건 미관상 보기 좋긴 했다.
‘그런데 눈가는 정말 왜 저렇게 된 거지? 아까부터 계속 옆에 있었지만 별다른 일도 없었는데.’
누가 보면 내가 그를 울리기라도 한 줄 알겠다.
아, 설마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나는 그가 비워낸 샴페인과 와인 잔을 떠올렸다.
‘어쩌면 나를 만나기 전에 더 마셨을 수도 있겠지.’
내가 그의 취중 알코올 농도를 분석하는 와중에도 루페르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 아이가 직접 친구라는 말을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인지라,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여쭤봤습니다.”
내가 왜 그런 게 궁금하냐고 되묻지 않았음에도 루페르는 혼자 알아서 술술 불어대기 시작했다.
“사실 저희 로즈니가 미모나 학식, 그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지만 유독 고집이 세고 여타 영애들과 다른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그, 렇긴 하죠···?”
“그동안 로즈니에게 뭣 모르고 접근하던 이들도 많았습니다. 어릴 때의 그 아이는 지금보다 더 여리고 마음이 약해서 그런 이들 때문에 상처받는 일도 많았죠.”
“···그렇군요.”
“그래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 컸다지만 그 나이 먹도록 변변찮은 친구 하나 없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
오라비로서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에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그렇다고 오늘 처음 만난 나한테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하지만 그냥 흘려넘기기에는 루페르의 태도가 너무 진지했다.
‘취중 진담이라고도 하니까.’
일단 들어나 볼까 하는 마음과 로즈니 본인이 아닌 다른 이의 입을 통해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게 옳은 걸까 하는 의문이 동시에 들었다.
*
아르반은 제 옆에서 무어라 재잘거리는 영애들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어느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답지 않게 제 행동을 조금, 아니, 상당히 후회하고 있었다.
‘브로치까지 받은 마당에 춤 신청을 했든 하지 않았든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별반 차이도 없을 것을.’
그렇다면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손을 내밀었으면 됐을 텐데.
아르반은 답답하고 후회스러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다.
아델과 춤을 추는 리엘리를 보았을 때만 해도 눈에 거슬린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수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다른 남자와 춤을 추고 있는 리엘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중앙홀로 난입하여 둘 사이를 찢어놓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아르반은 이를 사리물었다.
아르반이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계속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은 그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순순히 황제의 체스 말과 같이 굴어준다면 크게 귀찮아질 일은 없으리란 걸 알았다.
하지만 반대로 그의 명을 거역하고 반기를 들려 한다면 황제는 아르반을 거칠게 찍어누르려 들 터였다.
아르반을 통해 황위 찬탈을 꾀하던 전 대공과 같이.
어차피 그는 황제를 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굳이 번거로운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불합리한 명령에도 불복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때문에 얌전히 몸을 숙이고 있었거늘.’
허나 이 순간을 기점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로베르의 적장녀이자 후계자인 그녀가 자신에게 특별한 선물을 했다는 것은 곧장 황제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건 명명백백하게 리엘리 로베르가 아르반 카넬로웰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임을 나타낸다.
이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아르반이 그녀의 선물을 거절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르반은 리엘리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그건 곧 리엘리와 아르반 사이가 보다 깊다는 사실로 해석될 터.
‘끝까지 변명하고 잡아뗄 수도 있겠지만··· 믿을 리가 없지.’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샤루스의 황제였다.
그가 어설픈 변명에 속아 넘어가 줄 리 만무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아르반이 리엘리와 거리를 둔다 해도 황제는 그와 그녀를 예의 주시할 것이다.
아르반의 입장에서야 이미 몇 년간 암살 위협에 시달린 전적이 있었기에 새삼 다시 황제의 눈 밖에 난다는 게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엘리, 그녀는 달랐다.
로베르의 하나뿐인 공녀에게 암살자를 보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황제의 눈에 띄어봐야 좋을 것 하나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선물을 준비한 거지.’
그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선물을 받아들인 것은 아르반 자신이었으니까.
먼저 그녀를 가까이할 생각을 한 것 역시도.
그렇지만 자신과 그녀는 단지 친우의 관계일 뿐이었다.
‘연인이 아닌 경우에도 브로치를 주고받다고 듣긴 했지만···.’
신뢰의 의미로 통용되는 건 어디까지나 동성끼리에나 성립되는 이야기라 했다.
아르반은 파랗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즐거운 듯 춤을 추고 있는 리엘리를 응시했다.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데다가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노골적으로 고정된 그의 시선에 곁에서 말을 걸던 영애들 또한 아르반의 시선이 닿아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머.”
“멜라니스 경께서 파트너가 아닌 분과 춤을 추시는 건 처음 보네요.”
한 영애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누군가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아까 보니 멜라니스 영애가 공녀님과 안면이 있는 것 같던데요.”
“그래서 두 분이 춤을 추고 계신 걸까요.”
“하지만 조금 전 각하께 브로치를 선물하셨는데 다른 신사분과 춤을 추시다니 품행이 너무 가볍···.”
은근슬쩍 공녀에 대한 험담을 시작하려던 영애가 돌연 말을 멈췄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또 다른 영애는 시선을 돌렸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함께 파트너로 참석한 그녀의 오라비, 라딘 역시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마찬가지로 움찔 몸을 떨었다.
카넬로웰 대공이 무서운 기색으로 공녀의 험담을 늘어놓으려던 영애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영애가 파랗게 질려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준 채 고개를 돌리자 비로소 대공의 시선 역시 그녀를 비껴갔다.
대공은 여전히 서슬 퍼런 낯을 한 채 춤을 추고 있는 공녀 쪽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에도 그 형형한 눈빛에 압도되는 듯한 기분에 라딘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런 라딘의 팔을 잡고 있던 그의 동생, 샤나는 대공의 얼굴을 보고 오라비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힐끔, 다시 한번 공녀와 멜라니스 경이 춤을 추고 있는 중앙홀을 쳐다봤다.
‘분명 특별한 사이시겠지.’
샤나는 본래 대공과 안면을 트고 가까워지고자 이 자리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공에게 제대로 된 연인이나 약혼자가 없을 때나 성립 가능한 일이었다.
샤나는 조심스레 대공을 곁눈질로 살폈다.
‘저런 눈빛을 하고 계신데 내가 끼어들 틈 따위는 없겠지.’
비록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사이처럼 소개를 받는 모습을 보았지만 단순한 연막에 불과할 것이다.
샤나는 아까 공녀가 대공에게 브로치를 건네는 순간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연인 이상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자리에서 대놓고 브로치를 선물할 리가 없었으니까.
또한 그렇기에 의아하기도 했다.
대공이 어째서 공녀에게 춤 신청조차 하지 않고 작별 인사를 고했는지.
‘사실 지금도 모르겠단 말이야.’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질투가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샤나는 카넬로웰 대공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며 제 오라비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만 돌아가요, 오라버니.”
“어, 어어. 그래.”
어찌 됐든 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이미 다른 여자를, 그것도 공녀를 마음에 품은 대공을 어찌해볼 생각을 할 만큼 샤나는 담이 크지 않았다.
*
어느새 음악이 멈췄다.
루페르는 나와 맞인사를 하며 나직이 속삭여왔다.
“잠시 나가서 이야기를 이어가도 되겠습니까.”
“···좋아요.”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차였다.
그와 함께 발코니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우리의 주변은 기웃거리는 귀족들로 인해 붐비고 있었다.
내 위치가 그들보다 까마득하게 높았기에 함부로 먼저 말을 걸어올 수 있는 이가 없어 다행이었다.
밖으로 나서기 전, 루페르는 목이 탔는지 내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샴페인을 한잔 비워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잔을 비워내는 바람에 나는 내심 걱정하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냥 술이 들어가면 얼굴이 빨개지는 체질인가 보네.’
춤을 추는 와중에도 말이 많아졌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취한 듯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었지.
나는 더 이상 그의 음주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