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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76화 (76/153)

76화

리엘리와 세이린은 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참, 레이디 로즈니도 보통 고집이 아닙니다.”

“네에. 그렇죠.”

척 보기에도 몸이 안 좋아 보이는 데 저런 말이나 하고 말이야. 좀 더 자기 몸을 아껴줬으면 좋겠는데···.

리엘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즈니는 연회를 즐기라고 했지만 그녀가 이렇게 자리를 뜬 시점에서 연회에 대한 흥미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세이린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리엘리와 세이린은 구석진 자리에서 하릴없이 샴페인을 홀짝이며 시간을 죽였다.

잔을 기울여 입술만 축여가며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지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리엘리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

“···루페르?”

분명 로즈니와 함께 휴게실에 있어야 할 그가 왜 다시 연회장에 나타난단 말인가.

나는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세이린 또한 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정확히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가 우리의 앞에 서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경, 로즈니는 어쩌고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신 거죠?”

날카롭게 책망하는 어조가 튀어 나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몸도 안 좋은 동생을 그대로 버려두고 돌아온 거야?’

세이린 역시 나 못지않게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런 우리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루페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난감한 웃음을 머금었다.

“로즈니의 협박··· 아니, 부탁 때문에 온 것뿐이니 부디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 그만둬주셨으면 좋겠군요.”

그의 한탄에 잠시 멈칫했다.

로즈니의 부탁, 아니지, 분명 협박이라고 말하려 했다.

“저라고 돌아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닙니다.”

“그러면요?”

“로즈니가 공녀님과 아델 남작께서 연회를 즐기고 계신지를 감시, 아니, 확인하지 않으면 약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루페르의 얼굴이 잠시 어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웃는 낯으로 돌아왔다.

“바로 돌아가면 또 쫓겨날 것이 분명하여···.”

“······.”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 애는 예전부터 고집이 세 한 번 마음을 먹으면 결정을 번복하는 법이 없습니다.”

나도 이제껏 로즈니의 여러 모습을 봤기에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도 같았다.

또한 루페르가 단순히 변명하려 드는 게 아니란 것도.

“그게 로즈니의 단점이자 장점이겠죠. 저는 그 아이의 고집이 싫지만은 않습니다만··· 이런 상황에 드릴 말씀은 아니긴 하군요.”

그는 머쓱한지 지나가는 시종이 들고 있던 와인을 한 잔 받아 들며 입술을 적셨다.

“로즈니는 데려왔던 사용인들을 시켜 먼저 돌려보낼 생각입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나는 루페르의 얘기에도 안심이 되질 않아 물었다.

“그럼 경께서도 함께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두 분이 연회장에 있는 동안은 이곳을 지켜야 할 것 같군요.”

그는 조금 난감한 눈치로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두 분의 감시역으로 보내진지라, 제가 돌아간다면 로즈니도 집에 가지 않겠다 할 것이 뻔합니다.”

루페르의 의견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로즈니라면 그러고도 남을 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어찌 됐든 지금 로즈니가 혼자 있다는 말이 되는데···.’

시녀들이 붙어있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보호자 격인 루페르가 이곳에 있으니 완전히 안심이 되질 않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손가락으로 두드려댔다.

그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세이린이 조금 주저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레이디 로즈니를 댁까지 모시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경.”

“음··· 죄송하지만 저희 로즈니의 고집이 보통이 아닌지라 가시더라도 금방 내쫓기실 겁니다.”

“그렇더라도 가보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몸이 좋지 않은 레이디를 혼자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세이린이 뜻을 굽히지 않자 그녀를 빤히 응시하던 루페르는 왜인지 나를 향해 지어 보였던 것과 같은 진한 미소를 내걸었다.

“그렇다면 제가 다시 돌아가 보는 편이 옳습니다. 그 아이의 파트너로 참석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가족이니까요.”

루페르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남작께서는 공녀님의 파트너로 참석하셨으니, 자리를 지키셔야 하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는 돌아가셔도 내쫓기실 거라고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물론 그렇겠지만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사랑으로 보듬어주어야 할 하나뿐인 여동생이니, 감내해야죠. 그리고 남작께서 이렇게까지 염려해 주셨다고 전하면 그 아이도 한풀 꺾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랑을 논하기에는 아까 로즈니와 기 싸움을 하던 루페르의 모습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 있었기에 나는 조금 떨떠름해졌다.

그런 내 심정이 표정에도 묻어났는지, 루페르가 짐짓 서운하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니 믿어주셨으면 좋겠군요.”

나는 영양가 없는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막고자 다시 본론을 언급했다.

“그보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누구라도 로즈니에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루페르가 돌아가는 편이 제일 좋겠지만, 내 의견 역시 그와 동일했다.

아무리 나와 세이린이 로즈니를 걱정해 그의 에스코트를 거절했다 해도 루페르가 돌아간다면 높은 확률로 다시 쫓겨날 것이다.

로즈니는 나긋하고 여유로워 보이지만 한 번 흥분하면 뒤를 돌아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타인인 우리에게도 그러한데, 가족인 그에게는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터.

본래 누구나 편한 사람 앞에서 더욱 거침이 없어지는 법이니까.

‘나보다는 세이린을 보내는 쪽이 거절당할 확률이 낮겠지.’

마음 같아서는 나도 같이 가고 싶었지만, 함께 갔다가는 사이좋게 퇴출당하리라.

무엇보다 아까 로즈니가 자리를 뜨기 전, 특히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나는 곧장 세이린에게 당부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가보세요, 경. 로즈니를 잘 부탁할게요.”

세이린의 한 손을 꼭 붙들고 얘기하니 그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반대 손으로 내 손을 토닥여주었다.

“로즈니가 저택의 침실에 몸을 누이는 것까지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파트너로 참석했음에도 이렇게 자리를 비우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뜻밖의 사과였다.

아니, 사람이 아프다는데 파트너나 에스코트가 별 대수일까.

나는 고개를 붕붕 내저으며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세이린의 죄책감을 덜어주고자 입을 열었다.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아, 여기 파트너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신사분이 한 분 계시니 에스코트를 부탁드려도 되겠네요.”

내가 문득 루페르의 존재를 상기해내고 말을 꺼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거들어왔다.

“물론입니다. 저희 로즈니를 위해 흔쾌히 파트너를 보내주시는 공녀님을 신사 된 입장에서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능청스럽고 매끄러운 루페르의 언사에 눈을 세모꼴로 뜨고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루페르는 의외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좀 능글맞게 들려서 그런가, 오해했네.’

잠시나마 한량 같다 여긴 게 조금 미안해졌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멜라니스 경.”

“저야말로 로즈니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델 남작.”

루페르와 이야기를 마친 세이린은 내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쏜살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단둘이 남겨진 나와 루페르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초면인 데다 친구의 오빠라는 존재는 아무래도 편하게 대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을 두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수도 없고.’

나는 머쓱한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만 홀짝이다 어느새 한 잔을 모두 비워버렸다.

빈 잔을 내려두고 새로운 샴페인 잔을 집어 들려는데, 어느새 루페르의 잔 또한 빈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의 몫까지 챙겨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루페르와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연회장 쪽을 보고 있는 쪽이 속 편했던 나는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했다.

루페르 역시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기에 나는 연주곡이 세 번 바뀔 동안 가만히 서서 자리를 지켰다.

그때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문득 옆을 바라보자 루페르가 붉은 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

어느새 한잔을 다 비운 모양이다.

‘이런.’

루페르와 눈이 마주쳤다.

슬쩍 바라본다고 본 건데, 저쪽에서도 나를 신경 쓰고 있던지라 서로 시선을 피하기 뭐한 상황이 됐다.

“공녀님, 혹시 아까 제가 로즈니를 부축해 나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잠시 나갔다 와보니 연회장이 소란스럽던데요.”

그는 마치 우리가 원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던 양, 매우 자연스럽게 질문해왔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참 침묵을 지키다 물어오는 것으로 봐서는 정말 궁금하다기보다 그저 눈이 마주쳤으니 말을 거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아마 내가 선물을 건넸던 것 때문에 소란스러웠던 일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걸 내 입으로 말하기도 어쩐지 좀 민망해서 그냥 얼버무렸다.

“네, 뭐.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렇습니까.”

내 예상처럼 정말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 아닌지, 그는 되묻는 대신 그러려니 넘어가 주었다.

그에 다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불현듯 그가 생뚱맞은 제안을 해왔다.

“괜찮으시다면 저랑 한 곡 추시겠습니까.”

“···지금 그런 말씀이 나오시나요?”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쏘아붙였다.

‘이 사람 정말 로즈니를 걱정하는 게 맞는 거야?’

어떤 신경줄을 지녀야 이런 상황에서 춤이나 추자는 소리가 나오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의 제안을 곱씹으며 서서히 감정의 온도가 높아지려는데, 루페르가 여우같이 올라간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나긋하게 해명했다.

“물론 그럴만한 상황도, 기분도 아니시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그런 소리를 하셨다?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다음 말에 표정을 풀 수 있었다.

“다만 로즈니의 성격상 자신 때문에 공녀님께서 연회를 즐기지 못하셨다고 생각하며 저를 괴롭··· 아니, 자책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

“······.”

“그 아이라면 분명 자신이 자리를 뜨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물을 겁니다.”

루페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약간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가리는 만큼 제 사람이라 여긴 이들에게는 누구보다 애정을 갖고 신경을 쓰는 아이니까요.”

“···그렇군요.”

“저도 연회를 즐길만한 기분은 아닙니다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분명 로즈니의 원망을 사게 될 터라, 후폭풍은 두렵군요.”

“음···.”

그 말이 너무 마음에 와닿아 차마 무어라 책망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까지 그녀의 뒤끝이 닿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고.

‘아니, 정말 그럴 것 같은데.’

순간 완성된 드레스를 들고 나를 찾아왔던 로즈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약간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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