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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75화 (75/153)

75화

한 영애가 경악에 젖은 음성을 토해냈다.

“세상에! 영애가, 아니, 공녀님께서 먼저 대공 각하께···.”

브로치 선물이 유행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영식이 종종 공식적인 자리에서 브로치를 선물하며 청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영애의 새된 비명과도 같은 한마디에 옆 사람의 숨소리마저 들릴 법했던 침묵이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아니면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지 알 길이 없는 리엘리는 그저 뿌듯한 웃음을 그려 보일 뿐이었다.

“자, 됐어요. 역시 잘 어울리시네요.”

리엘리는 아르반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가까운 사이에서나 나올 법한 리엘리의 편안한 손짓에 근처에 서 있던 또 다른 영애 하나가 비명과 같은 감탄을 내뱉었다.

“어머···!”

하지만 이를 듣지 못한 리엘리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각하의 눈동자와 같은 색상이라 골라봤는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뜻깊은 선물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르반은 감사를 표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보이지 않는 브로치의 형태를 가늠하고자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분명 리엘리의 손에 올려졌을 때 브로치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신경을 쓰느라 선물 자체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뜻 다정하게만 보이는 아르반과 리엘리의 모습에 주변의 귀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 지금 대공께서 공녀님이 선물하신 브로치를 받아주신 건가요?”

“···믿기지 않지만, 네. 그러네요.”

“어쩜 저럴 수가···.”

“아무리 공녀님이라고 하지만 아직 데뷔도 전부터 이렇게 대공 각하의 탄신연회에 발을 들이시고 저런 선물까지···.”

“사실 두 분 사이에 벌써 혼담이 오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번 연회는 그저 보여주기식 행사일 뿐이고···.”

“그렇다기는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연회를 주최하신 분은 대공이 아니라 황제 폐하신걸요.”

“맞아요. 대공께서 공녀님과 혼담이 오가는 사이셨다면 폐하께서 굳이 이런 자리를 마련이나 하셨을까요?”

“하지만 보세요. 카넬로웰 대공께서 로베르 공녀님의 브로치를 받아주셨잖아요? 두 분이 특별한 사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겠죠.”

“그럼 황제 폐하께서도 두 분의 관계를 모르고 계셨던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귀족들 사이에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그런 웅성거림 사이로, 한 영애의 감탄이 섞여들었다.

“아무리 이전부터 연인 관계셨다더라도 여성분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브로치를 선물하시다니···.”

그녀는 리엘리를 존경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각하와 연인이란 사실을 이렇게 명확히 밝히시고 다른 영애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저렇게까지 하신다는 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이린은 속으로 대꾸했다.

‘대체로 오해에 불과하지만, 대단한 분이란 건 사실이지. 그것도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또한 아주 대담한 분이기도 했다.

‘무려 브로치를 선물로 준비해두셨었다니···.’

이건 그녀로서도 전혀 상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 세이린에게 로즈니가 물었다.

“아델 경. 공녀님께서 각하의 선물로 브로치를 준비하셨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세이린이 청명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반색했다.

“어쩌면 이 일을 계기로 각하와 공녀님 사이에 혼담이 오가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황제 측에서 어중간한 방해만 해오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공녀님께서 먼저 브로치를 선물하셨으니, 자연스레 혼담이 오갈 만한 상황이다.’

물론 리엘리 공녀가 단순히 공녀의 위치에 머물 시에는,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말이었다.

아직까진 아들에게 작위를 양도하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세이린의 머릿속에도 차기 공작은 아몬 공자라는 생각이 박혀있었다.

비록 리엘리와 아몬의 나이 차이가 상당하지만 그럼에도 흔한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실상 세이린과 같은 경우는 많지 않았다.

‘우리 가문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당연히 소공작의 자리는 공자가 차지하게 되겠지.’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공작이 이른 나이에 일선에서 물러날 수도 있으니, 공녀가 소공작의 위치에 서더라도 크게 이상치는 않은 일이다.

공녀의 데뷔탕트를 마치고 난 후, 그에 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대체로 가문의 후계는 미리 내정된 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당사자가 사교계에 데뷔함과 동시에 세간에 공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로베르 공작께서는 당신을 후계로 삼을 생각이 있으신가요? 공녀님.’

그렇다면 축하해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당신께서 제 주군의 옆자리를 지켜주셨으면 하는 건··· 제 지나친 욕심일까요.’

마음속으로만 질문을 던진 세이린이 근심 걱정 없이 환히 웃고 있는 리엘리를 보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니 묵직하게 짊어지고 있던 감정과 생각들이 조금은 증발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아르반이 제가 걸어준 브로치를 손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그러면서 자신과 눈을 맞추는 행동에, 리엘리는 홀린 듯이 그와 시선을 교환했다.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아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푸른빛이지만 일순 검은색으로 착각할 만큼 어두운 빛을 띠고 있는 눈동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브로치와 그의 눈동자를 비교해 봤다.

아, 지금은 브로치의 빛깔이 그의 홍채보다 밝다.

하지만 아르반의 눈동자는 밖에서 보았을 때 좀 더 밝은 빛으로 반짝이니, 그때는 아마 같은 색상으로 보일 터였다.

‘분명 아주 예쁘게 빛나겠지.’

그의 목덜미를 장식한 브로치보다도.

리엘리는 아르반의 손가락에 가려졌다가 다시 보이기를 반복하는 브로치에서 그의 손가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얇은 장갑에 가려진 커다란 손.

저 크고 단단한 손의 촉감을, 자신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디가 굵지만 투박하다는 느낌보다 오히려 섬세해 보이는 길쭉한 손가락··· 이었지.’

그리고 아주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

아르반의 손을 빤히 바라보던 리엘리는 곧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르반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리엘리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알 수 없는 열망을 엿볼 수 있었다.

“아···.”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의 눈동자가 이리도 푸르게 타오르고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리엘리는 궁금증을 삭히고 슬슬 자리를 떠야겠단 생각을 했다.

목적은 달성했고, 더는 할 말도 없었다.

“그럼 탄신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는 파트너가 기다리고 있어 이만 물러 가보겠습니다, 각하.”

아르반은 제게 인사를 건네는 리엘리를 보며 대체 무슨 의미로 이런 선물을 준비한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대놓고 언급할 만한 질문도 아니었거니와 보는 눈도 많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만 보내줌이 옳다.

하지만 막상 인사를 건네려니 이번에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함께 춤을 추지 않겠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아르반은 주먹을 꽉 쥔 채로 제게 허리를 숙인 리엘리를 응시할 뿐이었다.

‘묻기만 한다면 엘리, 당신은 망설임 없이 내 손을 잡아 오겠지.’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입을 뗄 수 없었다.

이미 브로치까지 받아버린 마당에 더 거리낄 것이 무엇 있나, 하는 마음과 그래도 자신이 춤을 신청한다면 정말로 더는 돌이킬 방법이 존재치 않는다는 이성이 충돌했다.

하지만 아르반은 언제나 그렇듯, 이성의 편을 들고자 노력하며 제 본심을 숨겼다.

“감사합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로베르 공녀.”

리엘리는 여태 알고 지내던 그와 처음 보는 시늉을 하며 깍듯하게 예를 차리는 이 상황이 참 작위적이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과 주변의 반응은 판이한 듯했다.

리엘리가 아르반에게 인사를 건네고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자 마치 저잣거리에 광대를 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처럼 몰려있던 귀족들이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와중 우연히 자신과 눈이 마주친 이들이 은근슬쩍 눈길을 피하는 것을, 리엘리는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흥미로운 구경거리긴 했겠지.’

이곳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긴장되고 심장이 쿵쾅거렸는데, 지금은 신기하리만치 무덤덤해졌다.

리엘리는 홍해의 기적을 일으키듯이 사람들을 가르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들 사이에 섞여 있던 세이린이 다가와 자연스레 그녀를 이끌었다.

“경, 우리가 연회장에 얼마나 머물렀나요?”

리엘리는 그녀를 따라 로즈니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작게 물었다.

세이린은 품에서 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입장하고부터 대략 사오십 분 정도 지난 것 같습니다.”

“흠···.”

시간이 너무 애매했다.

연회에 초대를 받으면 기본적으로 한두 시간쯤은 머무는 게 예의라 했으니 조금 더 이곳에 머물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춤이라도 한 번 더 추고 돌아갈까요? 라고 물어보려던 리엘리의 질문은 입 밖으로 뱉어지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세상에, 로즈니. 몸이 많이 안 좋아요? 얼굴이 창백해요.”

바로 제 앞에 서 있는 로즈니의 낯빛이 아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창백했기 때문이었다.

“아. 저는 괜찮아요, 공녀님. 신경 쓰지 않으셔도···.”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정말 괜찮답니다. 술을 조금 마셨더니 속이 울렁거려서 그래요.”

“그렇지만···.”

비단 리엘리만이 그녀를 신경 쓰는 게 아닌지 세이린 또한 걱정스러운 얼굴로 로즈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로즈니의 오빠, 루페르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 또한 로즈니의 얼굴을 보았는지 미간을 좁히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로즈니, 몸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그냥 좀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휴게실로 가요, 오라버니.”

“그래. 그편이 좋겠다.”

루페르는 자연스레 로즈니를 부축했다. 삽시간에 식은땀까지 흘리게 된 로즈니는 힘없이 그에게 몸을 맡겼다.

리엘리 역시 그런 두 사람을 따라 자리를 옮기려 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로즈니로 인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두 분께서는 연회를 충분히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이리 아름답게 꾸미셨는데 겨우 춤 한 번 추고 돌아가시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에요.”

“그렇지만, 로즈니···.”

“그렇지만은 없어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부디 천천히 연회를 즐겨주셨으면 해요.”

리엘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대꾸하려 했지만 어느 때 보다 딱딱하게 굳어진 로즈니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턱에 주름이 질 정도로 앙 다물린 입술과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녀의 의지를 표명하는 듯했다.

‘하여간에 로즈니도 고집이 참 세단 말이야···.’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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