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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74화 (74/153)

74화

리엘리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아르반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넬로웰 대공 각하. 로베르 공작가의 리엘리 로베르라 합니다.”

“저 또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리엘리 로베르 공녀. 아르반 카넬로웰입니다.”

리엘리는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는 아르반을 멀거니 바라봤다.

예상보다 더 근사한 그의 모습에 눈길을 떼기가 어려웠다.

공작저를 방문할 때의 그는 아몬의 수업을 위해 편안한 차림을 하고 있었기에 앞머리를 반쯤 넘기고 말쑥하게 예복을 차려입은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본래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외모다 보니 오늘 연회에서도 누구보다 눈에 띌 것이라 생각은 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았을 때도 새삼 잘생겼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미남이 작정하고 외모를 가꾸니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평소처럼 마주 서 있을 뿐인데···.’

어쩐지 시선을 마주하기가 부끄러워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영애들이 그의 주변에 바글바글 몰려들었음에도 말을 거는 이가 한정돼 있던 이유를 알겠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아르반에게서는 특히나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니 몇몇 용기 있는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영애들은 그 주변을 맴돌기만 할 뿐,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한 듯했다.

“연회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리엘리와 인사를 나누던 아르반은 이내 파티장 안에 숨어 있는 황제의 눈을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간 공작저를 그렇게 들락날락했으니, 자신이 공녀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을 황제가 모를 리가 없었다.

‘분명 자세한 내막을 파헤치기 위해 공녀의 주변을 맴도는 이가 있을 터.’

아니나 다를까.

아르반은 모두가 호기심과 경악으로 뒤섞인 낯을 하는 가운데 두 명,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을 포착했다.

‘허?’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리엘리는 별안간 저를 면전에 두고 한눈을 파는 아르반의 모습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야, 아무리 내가 좀 억지를 부려서 연회에 참석했다지만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건 너무 하잖아.’

본래 계획한 바는 형식적으로나마 생일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전하고 남들처럼 따로 시종에게 선물을 맡기는 정도였다.

친한 척할 것도 아니고, 선물 역시 그냥저냥 값나가는 브로치였으니 다른 이들의 선물 사이에 묻어가기 좋아 보였다.

‘근데 이렇게 나오면 나도 좀··· 기분이 좋지는 않네?’

리엘리는 아직도 저를 세워둔 채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아르반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황제의 끄나풀을 신경 쓰고 있던 아르반은 애석하게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한편,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공식적인 둘의 징검다리가 되었던 세이린은 리엘리의 표정 변화를 목격하고는 난감함에 사로잡혔다.

‘아, 이런. 곤란한데. 공녀님께서 저런 표정을 지으시니 꼭···.’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크든, 작든 간에.

세이린은 약간 긴장한 채로 리엘리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다가 가벼운 탄식을 흘렸다.

“아···.”

리엘리가 드레스 치맛자락에 숨겨져 있는 작은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세이린은 그녀가 무엇을 꺼내려는지를 알았다. 분명 주군에게 드릴 생일선물일 터.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리엘리의 손에는 작은 선물상자가 들려있었다.

세이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주군, 어쩌자고 공녀님을 면전에서 무시하셨습니까.’

귀하디 귀한 취급만을 받아왔을 공녀님께서 저리 대놓고 무시당할 일이 있었을 턱이 없었다.

그러니 저리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었다.

물론 세이린은 두 사람이 맺어지기를 소망하는 입장이었지만 그것이 리엘리의 비틀린 마음에서 비롯되길 바란 건 아니다.

‘애초에 이건 남들 눈에만 그럴듯해 보일 뿐, 정작 공녀님은 심술이 나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에 불과하니···.’

참 난감할 따름이다.

“각하.”

그때, 리엘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부른 이는 아르반 하나였지만 그 목소리에 세이린 또한 함께 반응해 버렸다.

저도 모르게 대답할 뻔한 세이린은 의식적으로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리엘리의 강렬한 눈빛에 뒤늦게 그녀를 바라본 아르반이 흠칫 놀라는 모습이 세이린의 시야에 선명히 들어찼다.

아르반은 심통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리엘리의 모습에 당황했다.

‘불과 몇 초 눈을 뗐을 뿐인데, 무슨···.’

그는 답지 않게 치솟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러십니까. ···공녀.”

당황한 나머지 리엘리를 이름으로 부르려다 멈칫한 아르반이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의 동공을 마주한 리엘리는 제 손에 들린 상자를 그에게 내밀며 활짝 웃어 보였다.

“각하, 오늘 이렇게 연회에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준비한 선물, 받아주시겠어요?”

“······.”

망설임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음악이 멈춘 연회장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때마침 악단이 잠시 쉬어가는 순서였던데다가 화제의 인물 둘이 한 곳에 모여있었기에 모든 이들의 관심이 그들을 향해 집결된 상태였다.

더구나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하는지에 집중하던 여타 귀족들로 인해 회장은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기에 리엘리의 목소리는 더욱 선명히,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닌 척하면서 카넬로웰 대공을 주목했다.

과연 대공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그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직접 선물을 전달받은 적이 없었다.

혹자는 이제까지와 같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시종을 통해 전달받을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은 대공이 반색하며 공녀의 선물을 받아들 것이라 생각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연회장에서 아르반 카넬로웰 대공의 짝으로 가장 적합한 이는 리엘리 로베르 공녀였으니까.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모두의 기다림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르반이 아닌 리엘리였다.

“···각하, 받아주지 않으실 건가요?”

잠시의 침묵을 얌전히 기다려줄 만한 위인이 되지 못하는 리엘리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이들이 들었다면 귀여운 투정 정도로 들릴 법한 어조였다.

“세상에···.”

어느새 제 오라비를 떼어내고 돌아온 로즈니가 세이린의 옆에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레이디 로즈니. 오셨습니까.”

“네에···. 그런데 상황이 좀 그러네요.”

로즈니의 걱정스러운 말에 세이린은 다시 제 주군과 공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저렇게 들이밀면 고민할 게 아니라 빨리 받아주셔야죠. 주군.’

불경하게도 속으로 제 주군을 힐난한 세이린이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고 잔뜩 힘이 들어간 리엘리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아르반 또한 세이린의 생각과 같은 후회를 했다.

‘잘못했군. 즉각 받아주었어야 했는데.’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요즘 들어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사색에 잠기는 일이 잦았다.

‘앞으로는 이것도 신경을 써야겠어.’

아르반은 보랏빛 눈동자에 한가득 들어찬 그녀의 감정이 폭발하기 전에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리엘리는 그가 손을 내밀자 여태 앞으로 뻗고 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탓에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모두가 의아한 심정이 되었다.

허나 곧 리엘리가 직접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든 물건을 꺼내자, 대체 내용물이 무엇일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브로치라니!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어항 속의 금붕어 떼처럼 놀라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은 리엘리는 입꼬리를 좀 더 끌어올려 웃을 뿐이었다.

“목덜미가 조금 허전해 보이시네요. 입고 계신 의상과도 잘 어울릴 듯하니 제가 직접, 해드릴게요.”

직접, 이란 단어에 강세를 둔 리엘리는 아르반에게로 한 발짝 다가갔다.

무어라 말을 하거나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코앞까지 다가온 리엘리로 인해 아르반은 약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아주 서서히, 조심스레 숨을 뱉어냈다.

크게 숨을 내쉰다면 그녀가 알아차릴 수 있는 거리에 있었기에 무의식중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는 제게 손을 뻗어오는 리엘리를 보며 순간 갈등했다.

순순히 저 브로치를 목에 매달 것인가, 말 것인가를.

그리고 이번에는 빠르게 답을 내렸다.

‘받아야 한다.’

이성이 아닌, 감정에 쫓긴 판단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황제고 주변의 시선이고, 이 순간만큼은 뒷전이었다.

선물을 받지 않으면 이번에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은근한 두려움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리엘리 로베르는 단순한 귀족 영애가 아니었으므로.

더는 그녀를 어머니의 유언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대할 수도 없었다.

일평생 친구는커녕 단순하게 안면을 트고 지내는 지인 하나 없던 그에게는 제가 느끼는 감정이 생소하기만 했다.

특정 인물에게 정을 주는 경우는, 아르반 카넬로웰에게 있어 그만큼이나 익숙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니, 제가 감히 저 손길을 거부한다면.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제게 화를 내고, 돌아선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르반은 제 크라바트 위에 브로치를 고정시키고자 집중하고 있는 리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와 자신의 관계를 무어라 정의하면 좋을까.

‘친우, 라고 해야 할까.’

굳이 정의하자면 그렇겠지.

헌데,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선물을 준비한 것일까.

아르반이 그들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와중에도 리엘리는 여전히 아르반의 목덜미에서 꼼지락대는 중이었다.

그런 리엘리의 모습을 담고 있는 아르반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아 탁한 빛을 발했다.

이 선물의 의도가 제가 생각하는 방향이 맞다면 이건··· 일반적인 선물일 수가 없었다.

상대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 아니, 더 나아가 청혼에 가까웠다.

‘당신도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다만 그게 청혼을 해올 만큼 깊은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르반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혼란스러웠다.

‘···청혼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단순한 오해일 것이라 생각하고 넘겨버리기에는 너무도 노골적인 선물이었다.

브로치를 선물하는 것에 각별한 의미가 담겨있음을, 이곳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다 해도 무방할 것이었기에.

불과 2년 전, 현 황태자가 제 약혼녀에게 건네며 했던 말이 곧 유행처럼 번져버렸다.

약혼녀인 프리실라 블란드에게 그녀의 눈동자와 똑 닮은 핑크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선물하며 ‘당신이 일평생 내 곁에 머물기를 소망한다.’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던가.

황태자가 워낙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다 보니 전 국민의 이목이 쏠리는 약혼식에 특별히 신경을 썼던 듯했다.

그 이야기는 곧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까지도 전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민이라면 모르는 게 간첩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았다.

실제로도 당시 한창 전장을 누비던 아르반의 부하들까지 약혼식에 대해 떠들어댈 정도였으니, 그 파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이후로 브로치를 선물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조심스러운 행위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려 선물을 준비한 당사자인 리엘리가 손수 아르반에게 브로치를 달아주는 모습은 회장에 있던 모두를 충격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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