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이 거리에서 저 대화가 들리나요?”
아무리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다투고 있다지만 나로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림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거리였다.
“집중하면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다만 황궁 내부에서 마력을 운용했다간 일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들리는 소리와 입 모양으로 유추했습니다.”
“······.”
그럼 마력을 사용하면 더 잘 들을 수 있다는 말이잖아.
나는 놀라운 그녀의 능력에 치솟는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과연 정말 사람의 청력으로 이 거리에서 대화를 엿듣는 게 가능한 것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나는 남매 쪽으로 최대한 귀를 열어 집중했다.
“하하, 이번에 글렌 상단에서 말 다섯 필을 구매했는데···.”
“데이지 영애, 부채의 장식이 특이하고 아름답네요. 어디서···.”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신경을 썼답니다. 호호”
시끄러운 잡소리만이 고막을 때려와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세이린을 따라 그들의 입 모양을 눈이 빠져라 살펴보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세이린을 바라봤다.
당신, 정말 여러모로 능력자였군요.
세이린은 내 존경심 가득 담긴 눈빛에 상큼하게 웃어 보이고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각하나 로즈니 모두 늦어질 것 같은데, 저희는 춤이라도 추고 있을까요?”
“그럴까요?”
나는 세이린의 제안에 반색하며 냉큼 대답했다.
이날을 위해 요 며칠간 춤 연습에 매진했다.
연습한 춤이 그리 어려운 편이 아니기도 했고, 세이린의 춤 실력이 남달랐기에 그녀의 리드를 따르면 나도 꽤 그럴싸한 춤사위를 뽐낼 수 있게 되었다.
‘연습할 때는 재미있었지만 아무래도 실전은 많이 다르겠지.’
조금 긴장되었지만 그만큼 설레기도 했다.
“바로 가실까요?”
세이린이 손을 내밀어 왔고, 나는 그녀의 손에 손을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는 중앙에 위치한 댄스 플로어로 나아갔다.
그러자 잠시 잠잠했던 주변이 다시 소란스러워지며 군중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결되었다.
*
“후우···.”
긴 한숨을 내쉬는 리엘리의 모습에 그녀와 나란히 걷고 있던 세이린은 재빨리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리엘리는 연회장에 입장했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항상 밝고 잘 웃는 그녀의 얼굴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극명한 차이를 보이며 매서워 보일만치 딱딱하게 굳어있다.
‘정말 귀엽다니까.’
하지만 세이린은 리엘리가 단순한 긴장으로 인해 표정이 얼었음을 알았기에 그 모습이 도리어 귀엽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보면 잘게 흔들리는 리엘리의 동공과 제 팔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조금씩 더 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긴장한 것일 뿐임에도 표정은 살얼음이 날릴 만큼 싸늘하기만 하다.
그렇다 보니 주변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던 귀족들이 그녀의 섬찟한 분위기에 흠칫흠칫 놀라는 것이 재미있어, 세이린은 웃음을 참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크흠, 흠!”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헛기침으로 가리며, 세이린은 긴장으로 인해 뻣뻣해진 리엘리를 리드해 나갔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공녀님이 평소와 같이 밝은 표정이었다면 구름처럼 몰려들어 귀찮았을 거야.’
그런 의미에서 공녀님의 표정에 감춰진 진실은 자신만 알고 있는 편이 좋을 듯했다.
물론 눈치 빠른 인물이 있다면 그녀의 상태를 파악했을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지 그런 자는 없어 보였다.
세이린은 리엘리를 댄스 플로어로 이끌어 자리를 잡으며 아르반이 있는 쪽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섰다.
두 번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승냥이 떼처럼 몰려든 귀족들 사이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 안광이 그녀의 시야에 걸렸다.
주군께서 이쪽을 보고 계셨다.
‘정확히는 공녀님을 보고 계신 거겠지.’
사실 그들이 발코니에서 연회장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강렬한 시선은 그들을 쭉 따라다녔다.
그렇기에 세이린은 주군이 공녀를 바라보고 계심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닿아오는 주군의 시선이 평소와 달리 어딘가 서슬 퍼런 기색을 띠고 있다는 것도.
세이린은 음악에 맞춰 서서히 스텝을 밝으며 연습 때와 달리 뻣뻣한 리엘리의 모습에 설핏 웃었다.
그녀는 긴장을 풀라는 의미로 리엘리의 날개뼈 인근에 올리고 있던 손을 살살 움직여 토닥였다.
그런 세이린의 행동에 힐끔 그녀를 올려다본 리엘리가 조금 긴장을 덜어낸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요, 아델 경. 제가 괜히 긴장이 돼서···.”
“아닙니다. 실전은 이번이 처음이시니 긴장하시는 게 당연하죠. 자, 평소처럼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제가 리드하는 대로만 따라오세요.”
나직이 속삭이며 대답한 세이린은 여전히 따갑게 꽂혀오는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도 조금 난감한 기분이었다.
제가 공녀와 춤을 추는 몇 분 사이 주변의 다른 귀족들을 모두 쳐낸 주군이 아까보다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이린은 그 강렬한 눈빛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주변 다른 이들의 동태를 살폈다.
귀족들의 관심은 크게 두 곳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아르반 카넬로웰이라는 이 연회의 주인공과 지금 이곳에서 자신과 춤을 추고 있는 리엘리 로베르 공녀에게로.
세이린은 리엘리를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품 안에 넣으며 그녀의 드레스가 물결치듯 나풀거리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드레스나 의복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지금 공녀의 모습이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는 사실만큼은 인지하고 있었다.
‘파트너가 아니라 제삼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그림 같은 광경이겠어.’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아름다운 공녀님께서는 자신 외의 타인과 춤을 출 예정이 없었다.
‘주군께서 많이 아쉬우시겠군. 저렇게 날 태워죽일 듯이 노려보시면서 정작 춤 한 번 신청하지 못하시고 헤어지셔야 할 테니.’
함께 연습까지 했음에도.
이곳은 제 주군의 옆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영애들로 득실거리는 회장의 한 가운데였다.
그런 곳에서 리엘리 공녀와 춤을 춘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그녀와 주군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일이었다.
‘여러 영애와 춤을 추고 어울리신다면 공녀님께 춤을 신청해도 그런 말이 돌지는 않겠지만···.’
제가 아는 주군이라면 그러지 않으실 것이 분명했다.
음악은 어느새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춤을 추는 사이 댄스 플로어를 중심으로 몰려든 귀족들로 인해 주변은 어느 때 보다 어수선했다.
상당수의 귀족이 리엘리와 세이린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이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 훑어보았다.
아마 적잖이 궁금할 터였다.
아직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고, 이전까지는 저택에서 외출조차 잘 하지 않던 로베르 공작가의 장녀가 갑작스럽게 이 자리에 나타났으니, 어찌 관심이 가지 않을까.
이곳에 모인 대부분의 귀족은 주군의 눈에 들기 위해 안달이 난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사실 고위 귀족이라 불리는 이들을 초대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애당초 초대장을 돌렸다 한들 참석하는 이는 드물었을 것이다.
아르반 카넬로웰은 대공의 지위를 가졌음에도 그만큼 어중간한 위치에 서 있었으므로.
‘실상은 주군께서 그 모호한 위치를 벗어날 생각이 없으신 것에 가깝겠지만.’
무엇보다 한 번이라도 주군께 접근했던 이들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주군께서 부와 권력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는 걸.
때문에 이곳에 모여있는 이들은 대체로 정세에 어둡거나 고위 귀족들은 계륵처럼 여기는 카넬로웰 대공의 옆자리를 노릴 만큼 변변치 못한 가문의 귀족들뿐이었다.
그러니 누가 보더라도 이 자리에서 가장 대공비의 자리에 근접한 인물은 리엘리 로베르 공녀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군께서는 이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생각이 없으셨다.
또한 그 ‘누군가’의 범위에는 리엘리 공녀 역시 예외 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추측을 하든지 간에 그 예상은 필연적으로 빗나갈 수밖에 없다.
‘착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한 것도 있지.’
어찌 보면 저들 또한 황제의 농간에 놀아나는 가엾은 치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귓가를 스치는 여러 대화 소리를 대충 흘려 넘기며, 세이린은 심드렁히 생각했다.
어느새 음악이 멈췄다.
이제야 표정이 풀어진 리엘리를 앞에 두고 인사를 나눈 세이린은 그녀를 이끌고 댄스 플로어에서 빠져나왔다.
자리를 벗어나자 리엘리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하아. 많은 사람 앞에서 춤을 추는 건 처음이라 실수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하하, 잘하셨어요. 실수도 없었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긴장해서 죽을 뻔했어요.”
곧장 투덜거리며 푸념을 늘어놓는 리엘리의 모습에 작게 웃던 세이린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아델.”
“각하.”
아르반의 눈동자에 이체가 서렸다.
리엘리는 그 눈에 비친 뜻을 읽어내지 못했으나 세이린은 단번에 주군의 의지를 눈치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만남은 이게 처음이니 소개하라는 뜻이다.’
주군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세이린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리엘리를 아르반에게 소개했다.
“각하, 제 파트너로 함께해주신 로베르 공작가의 리엘리 로베르 공녀님이십니다.”
세이린은 문득 자신이 연극배우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은 공연장의 조명과 같이 자신을 비추고 있었고, 입에서 나가는 말은 꾸며낸 거짓이다.
또한 주변에는 관객과 같이 몰려든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몰래 실소를 터트렸다.
만약 이 순간이 연극의 한 장면이라 친다면, 아마 지금은 두 남녀 주인공이 처음으로 만나는 도입부일 터였다.
‘그럼 이제 두 분이 사랑에 빠질 일만 남은 건가.’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은 또 다른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