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찬 공기를 쐬어서일까, 황궁에 들어서며 뒤집어썼던 검은 마력의 기운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듯했다.
“아, 그리고 보니 로즈니, 파트너는 어쩌고 혼자 여기까지 온 거예요?”
세이린이 가져다준 따뜻한 와인을 홀짝이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러자 로즈니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오라버니라면 안쪽 어딘가에 계시겠죠. 만나볼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전하고 바로 밖으로 나온 거라 잘은 모르겠어요.”
“······.”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무관심한 제스처와 심드렁한 표정.
로즈니의 언행에서 그녀가 제 오빠를 어찌 생각하는지가 훤히 드러났다.
‘뭐, 로즈니의 오빠가 그녀와 비슷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알아서 잘 처신하고 있겠지.’
나 또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보다 공녀님, 슬슬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세이린의 말에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세이린이 연회장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각하께서 도착하신 모양입니다.”
“아.”
나는 커튼을 살짝 젖혀 연회장 안쪽을 살폈다.
우리가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던 귀족들이 한 곳으로 집결해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네요. 이제 슬슬 들어가 보는 게 좋겠어요.”
더 있으면 감기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기에 냉큼 세이린의 권유를 승낙했다.
세이린은 대답 대신 제 팔을 내밀어 왔다.
나는 그녀의 팔에 손을 얹고, 반대쪽에는 로즈니를 대동한 채 다시 연회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시선이 뜨겁다 못해 따갑다, 따가워.’
그야말로 유명 연예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벌써 피곤이 몰려왔다.
‘아까 느꼈던 검은 마력의 여파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돌아가면 율렌에게 회복시켜달라고 해야겠어.’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세이린이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공녀님, 각하를 만나보시려면 저쪽을 헤치고 들어가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세이린이 눈짓하는 방향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
훌쩍 큰 신장 탓에 사람들 위로 빼꼼 드러나 있는 아르반의 새카만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르반의 주변을 둘러싼 인파들 또한.
나는 잠깐 말없이 그곳을 바라보다가 세이린을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조금만 우리끼리 시간을 보내다 인사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편하실 대로.”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나는 그대로 몸을 돌리려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봤다.
옆에 서 있어야 할 로즈니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방금 우리가 서 있던 자리를 돌아봤다.
그러자 어쩐 일인지 한곳을 향해 눈길을 고정한 로즈니가 다소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아직까지 나와 세이린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한 로즈니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요, 로즈니?”
“아··· 별일 아니에요.”
내가 넌지시 묻자 로즈니는 조금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제가 보고 있던 방향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로즈니의 얼굴에는 여전히 묘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뭐랄까, 언짢음?
‘왜 저러는 거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녀의 눈길이 머물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로즈니가 바라보던 무언가를 확인하고는 작게 입을 벌렸다.
구석진 벽에 홀로 자리 잡고 있음에도 시선을 끄는 진분홍빛 머리칼의 남자.
‘누, 누가 봐도 로즈니 오빠다.’
사실 말이 진분홍이지, 실상 거의 형광 핫핑크에 가까운 색상이었다.
더구나 다른 곳은 몰라도 눈매만 놓고 보면 로즈니라 해도 믿을 만큼 닮아있었다.
나는 로즈니의 오빠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로즈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빠가 신경 쓰이면 가보면 될 텐데, 왜 마뜩잖은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걸까.
“공녀님. 저희는 저쪽에서 샴페인이라도 한 잔 들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떨까요.”
의아함이 가득 담긴 내 시선에도 로즈니는 눈에 빤히 보이게 말을 돌리려 했다.
나는 다시 한번 벽에 기대있던 남자를 보았다. 그는 잠깐 사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로즈니.”
그러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그런 나와 달리 로즈니는 예상했던 모양인지, 한숨과도 같은 한마디를 토해냈다.
“···왜 그러시나요, 오라버니.”
남자는 로즈니를 몇 초간 지긋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 뵙는 분들이 계시는데, 소개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구나.”
그녀를 향해 뱉어내는 목소리는 나긋했다.
하지만 로즈니는 그런 제 오빠를 못마땅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로즈니가 제법 매서운 눈길로 그를 흘겨보자 남자 역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어우, 남매 기 싸움을 하는데 끼어있으려니 좀 그러네.’
내가 조금 뻘쭘한 기분을 느낄 때, 두 사람 중 먼저 백기를 든 쪽은 의외로 로즈니였다.
그녀는 여전히 제 오빠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매섭게 쏘아보았지만, 평소와 같은 사근사근한 어조로 우리를 소개했다.
“그럴 리가요. 당연히 소개해 드릴 생각이었답니다.”
글쎄, 내가 봐서는 절대 아니었다.
로즈니의 오빠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인지 일순간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공녀님, 아델 경. 이쪽은 저희 멜라니스 백작가의 장남이자 제 하나뿐인 오라버니, 루페르 멜라니스 경이세요.”
표정과 목소리가 완벽한 부조화를 이룬다.
내가 그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 남자, 루페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로즈니의 오라비, 루페르 멜라니스입니다.”
가까이서 본 루페르는 로즈니와 눈동자 색이 같다거나 머리카락 색이 비슷하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한눈에 혈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흡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뭔가 얼굴이 비슷하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닮았단 말이지.’
로즈니의 가족이라 그런가, 수려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기도 했다.
조각 같은 아르반과는 또 다른 느낌의 섬세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얼굴이랄까.
애초에 저런 형광 핑크에 가까운 머리카락 색이 어울리는 시점에서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진짜 놀라운 건 이제 저런 미남자를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나 자신이고.’
세상에나, 눈이 대체 얼마나 높아진 거람.
주변에 아르반이나 세이린, 로즈니와 같은 미인들에게 둘러싸여 살다 보니 면역이라도 생겨버린 걸까.
속으로 혀를 내두른 나는 한 박자 늦게 루페르의 인사를 받았다.
“···반가워요, 멜라니스 경. 리엘리 로베르예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세이린 아델 남작입니다.”
세이린이 자연스레 악수를 청하자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루페르가 이내 그린 듯한 웃음을 내걸며 손을 맞잡았다.
보기에는 좋았으나 형식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미소였다.
그녀의 손을 놓은 그가 자연스레 내 쪽으로 손을 내밀어왔다.
나는 무심코 그런 루페르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과 같이 사무적인 표정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그는 정말 기분이 좋은 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것도 꽤 예쁘다는 생각이 일만큼이나 활짝.
다소 얼떨떨해진 내가 기계적으로 손을 맞잡았음에도 루페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여전히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였다.
내가 아무리 미인에게 익숙해졌다지만 지척에서 저리 방긋방긋 웃어대니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근데 왜 나한테만 저렇게 웃어주는 거야.’
혹시 내가 마음에 들었나?
잘생긴 남자가 웃어주니 기분은 좋았지만 그 의도를 모르겠어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자 루페르가 다정한 어조로 양해를 구해왔다.
“동생에게 할 말이 있어서,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에게 마주 웃어 보이며 흔쾌히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그럼 잠시···.”
그가 로즈니와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제 보니 아이돌 했으면 딱 일 상인데···.”
저런 화려한 머리카락 색과 그에 어울리는 이목구비, 그리고 내게 웃어 보일 때마다 시선을 끌던 눈물점까지.
데뷔했으면 덕후들의 심장을 울렸을 상이거늘.
“안타깝네.”
애석하게도 이곳에서는 하등 관계없는 이야기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세이린이 질문해왔다.
나는 뭐라 대답할지 잠시 고민하다 그냥 얼버무리기로 했다.
애초에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아, 그냥··· 별거 아니에요.”
“···그렇군요.”
흠?
나는 뜨뜻미지근한 그녀의 반응에 세이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쩐 일인지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눈치로 보아하니 내 중얼거림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말을 하니 그저 반사적으로 입을 뗀 것 같았다.
“아델 경?”
“아, 죄송합니다.”
내가 그녀를 부르자 그제야 내 쪽으로 눈을 돌린 세이린이 멋쩍은 표정으로 씩 웃어 보였다.
“왜요? 저쪽이 신경 쓰여요?”
내가 눈짓으로 구석에서 서로 열변을 토해내는 듯한 남매를 가리키자 세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실례인 줄 알면서도 신경이 쓰여서···.”
“그래요?”
그리고 보니 나를 향해 녹을 듯이 웃어 보이던 모습과 달리 현재 루페르는 무섭도록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꽤 멀리 있음에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살벌한지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형제자매가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 저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많이 봐와서인지 별다른 걱정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세이린이 신경을 쓰니 나도 좀 신경 쓰이긴 하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내가 넌지시 묻자 남매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세이린이 대뜸 이상한 말을 해왔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대답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 자리를 뜨는 건 무례한 일이라고.”
“···네?”
“제발 부탁이니 조심 좀 하라는 말이다. 나야 상관없지만, 밖에서도 이런 식이면 다들 널 어떻게 생각하겠어.”
나는 갑작스러운 세이린의 엉뚱한 대답에 당황하여 반문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남매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오라버니가 자꾸 참견을 하니까 용건만 전달한 거예요. 오는 길에 마차에서 말씀드렸잖아요. 오라버니는 어디까지나 파트너가 필요해서 함께한 것뿐이고, 도착하면 친구들이랑 시간을 보내겠다고요.”
“······.”
잠깐 얼이 나가 있던 나는 곧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눈치챘다.
아, 저 남매의 대화였구나.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당황해 입을 뻐끔거렸다.
‘잠깐, 당신···. 지금 이 거리에서 저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가 들리는 거야?!’
“다행히 그냥 평범한 말싸움인 것 같습니다. 본래 이렇게 말을 엿듣는 건 자제하는 편이지만, 뭐··· 저리 다 들리게 얘기하고 있으니 상관없겠죠.”
걱정을 털어버렸는지 다시 산뜻한 웃음을 머금은 세이린이 툭,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안도에 잠시 눈을 굴려 멜라니스 남매 쪽을 바라봤다.
비록 구석진 자리라고는 하지만 언성이 높아진 남매의 모습에 주변에서도 웅성거리기 바빠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