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나는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실내로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가 훅 밀려들어 왔다.
세이린이 입구에서 초대장을 건네자 대기하고 있던 시녀 한 명이 다가왔다.
우리는 그녀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쪽입니다.”
앞서 걷던 시녀는 어떤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지기들은 시녀가 건넨 초대장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나와 세이린은 물러가는 시녀의 모습을 뒤로한 채 연회장으로 입장했다.
우리가 회장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외쳤다.
“로베르 공작가의 리엘리 로베르 공녀님과 세이린 아델 남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쩌렁쩌렁하게 귓전을 때리는 호명 소리에 하마터면 관리하고 있던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우리의 입장을 알리는 외침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삽시간에 집결되었다.
나는 세이린의 팔을 슬쩍 잡아당기며 물었다.
“저기, 아델 경. 원래 황성의 행사에서는 입장 시에 호명을 하나요?”
“예. 황실에서 주최하는 행사는 그렇습니다.”
내가 소곤거리며 묻자 그녀 역시 귓속말로 답해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절차가 이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심히 부담스러웠다.
“…세상에! 지금 들었나요?”
“공녀님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로베르 공작가의 공녀님이라면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귀족들이 소란스럽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이 좁아졌으나, 불쾌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표정을 풀고자 애썼다.
‘하, 표정 관리. 표정 관리하자.’
당연하지만 그 호기심과 경악 어린 시선들이 썩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저리들 반응할 일인가?’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때 세이린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각하께서 입장하시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발코니로 가시죠.”
아무래도 내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의 권유가 기꺼웠던 나는 반색하며 답했다.
“그래요.”
우리는 등 뒤로 따라붙는 눈길들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으….”
발코니로 나가니 순간 불어온 찬바람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마법을 사용해 난방을 가동하고 있는지 생각만큼 춥지는 않았지만 워낙에 얇은 옷을 입었던지라 금세 한기가 몰려왔다.
내가 가볍게 몸을 떨자 세이린이 제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런 세이린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거절할 생각이었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따뜻한 옷을 입은 건 아니었으니까.
“괜찮아요. 경도 추울 텐데 입고 있어요.”
“공녀님께서 입고 계시는 편이 더 좋을 듯합니다.”
세이린은 강경하게 내 어깨를 감싸듯 쥐어오며 내 행동을 제지했다.
그 바람에 재킷을 도로 벗어주지도 못한 채 그녀의 품에 갇힌 듯한 모습으로 안겨있어야만 했다.
“…이러면 아델 경이 춥잖아요. 각하께서 오실 때까지만 있으면 되니까 괜찮아요. 참을만해요.”
“그냥 입고 계십시오. 그게 제 마음이 편합니다.”
세이린은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하며 내 어깨에 걸쳐준 재킷을 재차 여며 주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거절하려고 입을 떼는데, 발코니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무례한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분명 우리가 발코니에 들어오며 사람이 있다는 표시로 커튼을 쳐뒀었다.
‘그럼에도 저렇게 밀고 들어오다니, 대체 어디 사는 누구인지 좀 보자.’
하지만 이내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얼굴을 보고 곧장 표정을 풀었다.
“로즈니.”
갑작스러운 로즈니의 등장에 내가 대뜸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뒤이어 세이린이 반갑게 인사했다.
“레이디 로즈니, 어서 와요.”
로즈니는 붉은빛이 인상적인 드레스를 입고 그보다 조금 어두운 컬러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꼭 걸어 다니는 장미 같네.’
붉은 머리의 그녀가 머리 색과 똑같은 드레스와 모자를 매치했음에도 과하다거나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머…! 제가 방해한 건가요?”
로즈니가 짐짓 눈을 크게 뜨며 장갑 낀 손으로 호들갑스럽게 입술을 가리니, 어쩐지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로즈니의 반응 덕에 나와 세이린은 비로소 우리가 상당히 애매한 포즈를 취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방해라뇨! 그럴 리가요.”
“맞아요. 제가 어깨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으니 아델 경이 배려해준 것뿐이에요.”
로즈니가 등장하기 전만 해도 재킷을 돌려주려 했었는데, 이미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아 그냥 입고 있기로 한 나는 세이린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아델 경.”
“천만에요.”
빙그레 미소 지은 세이린이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비록 두꺼운 천 위에서 느껴지던 것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의 온기가 떨어져 나가니 어깨가 서늘해졌다.
아르반도 그렇더니, 세이린도 손에 열이 많은 편인 것 같다. 아니면 검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것일까.
나는 세이린의 손을 힐끔 내려다봤다. 얇은 천에 감싸인 늘씬하고 단단한 손.
아르반의 손은 세이린보다 한마디 이상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현듯, 그의 커다란 손을 꼭 붙잡고 거리를 거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 체온이 나보다 훨씬 높으니까 서늘한 날씨와 대비돼서 분명 기분 좋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괜히 혼자 민망해져 화끈거리는 볼을 문질렀다.
‘미쳤나 봐, 왜 이런 상상을 하고 있어.’
나는 허튼 곳으로 튀는 생각을 돌리고자 로즈니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로즈니. 컨디션은 괜찮아요?”
“아아…. 네, 그럼요. 보시다시피 아주 멀쩡하답니다.”
로즈니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모자의 넓은 챙에 가려져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피곤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한숨과도 같이 가느다란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갑작스레 세이린과 내가 입을 연회복을 제작하게 된 로즈니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게 그저께였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기겁했었는데.’
중간에 두어 번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로즈니의 안색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디자인과 천을 고르고, 정확한 사이즈를 한 번 더 측정할 때까지는 조금 피곤해 보이는 정도였달까.
그러나 며칠 뒤 가봉과 의상에 어울리는 액세서리를 고르기 위해 공작저를 방문했을 때, 그녀의 눈가는 거뭇했고 안색은 하얗다 못해 파리했다.
‘이때도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로즈니의 피곤이 절정에 이른 것은 드레스가 완성되었던 그저께 저녁이었다.
사실 드레스는 연회 전까지만 전달받으면 되었기에 완성되었다 한들 당일에 방문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로즈니는 드레스가 완성되기 무섭게 저택 문을 두드렸다.
그때 잔뜩 핏발선 눈으로 방문한 그녀를 보고 정말 까무러칠 뻔했다.
로즈니는 피죽도 먹지 못한 채 며칠 밤을 새운 사람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나는 퀭하다 못해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이는 로즈니의 모습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로즈니.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얼굴이··· 말이 아닌데.”
“네에? 아, 아아···. 괜찮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공녀님. 어서, 어서 이 드레스를 봐주세요.”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리던 로즈니가 갑자기 눈을 희번덕거리며 손수 품에 안고 들어온 상자를 열어 보였다.
드레스는 정말 예뻤다.
다만 상자를 들고 있는 로즈니에게 더 시선이 갔을 뿐이었다.
나는 잠시 드레스를 보았다가 다시 로즈니를 보았다.
언뜻 그녀의 눈동자가 풀려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나를 위해 고생한 로즈니에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미안했지만… 솔직히 좀 무서웠다.
“···드, 드레스 정말 고마워요. 너무 예쁘네요.”
“후후,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혹시 제 드레스를 만드시느라 밤을 새우신 건가요? 전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피곤··· 해 보여서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던 나는 마주한 로즈니의 안색을 다시 한번 살피며 저 얼굴을 단순히 피곤이라는 단어로 정의해도 될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아이참, 공녀님!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 어서 들어가서 드레스부터 갈아입고 나와보세요.”
나는 그녀의 재촉에 못 이겨 드레스를 착용하고 나서야 로즈니가 왜 저런 몰골이 됐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아아! 역시….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우세요! 며칠 밤을 새워 만든 보람이 느껴지네요.”
“······.”
“이런, 하지만 이쪽은 조금 더 손을 봐야 할 것 같아요. 공녀님, 잠시만 이리로···.”
무언가에 집중하는 사람을 보고 멋있다거나 존경스럽기보다 두렵다거나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깨닫게 되었다.
내가 잠시 회상하는 사이, 로즈니가 갑작스레 우리 곁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와 세이린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로즈니는 우리가 자신을 어찌 보는지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우리를 태워버릴 듯이 뜨거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가슴께로 두 손을 모으고 선 로즈니는 무엇이 그리 만족스러운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모습에서 그저께 봤던 맛이 간 눈동자를 떠올린 나는 잠시 오한에 몸을 떨었다.
‘···그래도 두 번째라 그런지 처음만큼 무섭지는 않네.’
물론 저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저희 연회복을 만드신다고 며칠을 고생하셨다던데, 다른 이들의 도움은 받지 않으셨습니까.”
세이린이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엉킨 눈동자로 로즈니를 바라봤다.
그러자 로즈니는 핏발선 눈을 크게 뜨며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몰려드는 피곤을 억지로 떨쳐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는걸요.”
세이린의 물음에 로즈니는 어느새 평소와 같은 낯으로 나긋하게 대답했다.
“제가 만들고 싶었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로즈니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리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제 작품인걸요.”
대신 화랑에 전시된 공예품을 감상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어내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로즈니는 그대로 생긋 미소 지었다.
“아, 네. 그렇군요.”
나는 그런 로즈니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로즈니, 당신은 정말 프로답고 멋진 사람이에요. 하지만 당신을 전부 감당하기에는··· 저라는 사람이 너무 작은 것 같네요.’
나는 세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이린이 함께라 다행이야.’
내 시선을 눈치챈 세이린이 왜 그러냐는 듯한 의문을 품은 눈으로 나를 응시해왔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열정과 패기란 때때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도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