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70화 (70/153)

70화.

“어머…!”

“너무 아름다워요, 아가씨.”

비단 나만이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립해 있던 시녀들에게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고마워.”

그들에게 옅은 웃음을 지어주고는 드레스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금색 원단으로 만들어진 치맛자락은 조금만 움직여도 마치 황금빛 바닷물이 출렁이는 듯이 아름다운 형태로 흐드러졌다.

그대로 몇 걸음 걷다가 멈춰서니 에바가 다가와 어깨에 검은색 숄을 둘러주었다.

어차피 연회장 안은 저택에서와 마찬가지로 따뜻할 것이기에 다른 옷을 걸치지는 않았다.

“아가씨, 이제 이 구두로 갈아 신으셔요.”

에바가 멋들어진 상자에서 드레스와 어울리는 은은한 금빛 구두를 내 발밑에 내려놓았다. 나는 나를 부축하는 에바에게 기대어 발에 구두를 끼워 넣었다.

높은 굽의 구두는 걸을 만은 했지만 어색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실용성은 배제하고 철저하게 심미적인 부분에 중점을 둔 것이니,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겠지.

“아가씨, 아델 경께서 준비를 마치시고 문 앞에서 대기 중이세요. 들어오시라고 말씀드릴까요?”

“아니, 잠시만.”

세바니가 다시 드레스 룸으로 들어서며 하는 말에 나는 일단 다른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그러자 늘 그렇듯 침대 아래에 기어들어가 있던 율렌이 잽싸게 튀어나왔다.

녀석은 어지간히도 입이 근질거렸는지 한껏 격양된 음성으로 내게 조잘거렸다.

“와…! 생각보다 훨씬 괜찮을걸? 걸려있을 때랑 입었을 때 느낌이 많이 다르네. 예쁘다.”

율렌의 미사여구 없는 순수한 감탄에 나는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예쁘지? 로즈니가 만든 회심의 역작이야.”

이거 만든다고 로즈니가 며칠 밤을 새웠는지….

“응, 예뻐. 너도, 드레스도. …근데 좀 아쉽네.”

“아쉽다고? 뭐가?”

이 모습을 보고도 어디가 아쉽다는 건지 납득이 가지 않아 되물었다.

그러자 율렌이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날 관찰하던 것을 멈추고 대답해왔다.

“내가 폴리모프할 수만 있었다면 널 에스코트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아쉬워서.”

약간 침울하게 들리는 녀석의 음성에 나는 발치에 있는 율렌을 달랑 들어 올려 눈높이를 맞췄다.

“너 이제 마법도 쓸 수 있게 됐잖아. 조금만 더 기다려봐.”

“…….”

내 위로에도 아무 대답 없는 율렌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중에 네가 폴리모프할 수 있게 되면 그때 에스코트해줘. 기다릴 테니까.”

“…그래, 기대해도 좋아. 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도 아주 아름다우니까.”

“좋아, 기대하고 있을게. 그러니까 오늘은 세바니랑 같이 집 잘 지키고 있어. 알았지?”

내가 키우는 강아지에게 당부하듯 말하자 율렌이 큰 눈을 반 정도로 가늘게 접으며 대답했다.

“…그 말은 뭔가 기분이 이상하지만, 알겠어. 갔다 와.”

강아지 취급한 거 들켰나 싶어 뜨끔한 나는 얼른 율렌을 침대 위에 올려주고 방을 나섰다.

에바가 문을 열어주자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던 세이린과 아몬의 모습이 보였다.

둘이 나란히 서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공녀님.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빛나시는군요. 회장의 모두가 공녀님의 아름다움에 취해버리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세이린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내게 정중히 손을 내밀어왔다.

하얀 정장을 입고 있는 세이린의 손에는 마찬가지로 새하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손가락이 길어서인지 그 손짓이 매우 우아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정석과도 같은 에스코트 요청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장난기가 가득했고, 동시에 매우 즐거워 보였다.

‘하긴, 한 번쯤은 에스코트를 해보고 싶었다고 했었지.’

기사가 되었지만 여자이다 보니 귀족 영애를 에스코트해본 경험은 없다고 했다.

에스코트를 요청할 만큼 친분이 있는 영애나 부인이 없기도 했고, 있었다 한들 쉽사리 성사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에스코트는 남자들의 전유물이었으니까.

공식적인 자리에서 귀족 여성이 성별이 같은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는 일례는 아주 드물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금세 납득했다.

‘그래, 여기서는 여자가 기사가 되는 경우도 흔치 않다고 했으니까.’

에스코트하게 되는 경우는 당연히 더 적을 수밖에.

또한 다른 남자 기사들이나 영식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굳이 같은 성별의 기사를 대동하고 연회에 참석해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는가?

보수적인 귀족 집단의 특성상 대놓고 비웃음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였다.

오죽 파트너로 선택할 사람이 없었으면 같은 성별의 기사에게 에스코트를 받겠냐는 식의 수군거림이 나돌겠지.

그러나 내게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내 신분이 공녀인데, 황족쯤 되지 않는 이상에야 누가 감히 내 앞에서 대놓고 나와 세이린을 비난할 수 있을까.

‘만약에 있다면… 죽음뿐이지.’

정말로 그런 자가 있다면 절대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세이린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앞에서 말이 나올 리는 없었으나, 뒷말은 황제라도 피해갈 수 없었기에.

‘애당초 나랑 같이 참석하지 않는다면 말이 나돌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나는 세이린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환한 낯으로 웃고 있었다.

그런 세이린의 모습에 나는 약간의 안도를 느꼈다.

나는 느릿하게 세이린이 내민 손에 내 손을 포개어 올렸다.

그러자 세이린이 내 손등에 소리 없는 입맞춤을 선사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세이린의 입술은 여전히 예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깔끔하게 세팅해 이마와 귓등으로 넘긴 머리하며, 멋들어진 의상과 잘생긴 얼굴이 아우러져 그야말로 환상의 콜라보를 이루고 있었다.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이미지네.’

이런 잘생긴 기사님께 손등 키스에 에스코트까지 받게 되었으니 오늘은 어째 운수가 좋을 것도 같았다.

‘아, 그리고 보니 아르반 이외의 사람에게 키스를 받는 건 처음이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한테 키스를 받았는데 심장이 너무도 평온하게 뛰고 있어 잠시 의아해졌다.

하지만 아마 같은 성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세이린이 내 손을 살짝 그러쥐고 바로 서자 그 옆에 있던 아몬이 순식간에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내 눈길이 아몬에게로 돌아가자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누님. 경의 말씀처럼 정말 아름다우세요. 분명 오늘 연회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누님이 될 것임이 자명해 보일 정도로요.”

미리 준비하고 있기라도 했는지 즉각적으로 술술 튀어나오는 아몬의 찬사로 인해 나는 약간 얼이 벙벙해졌다.

“…아, 고마워. 아몬.”

“별말씀을. 사실을 말했을 뿐인걸요. 다른 초대객들이 누님의 빛나는 모습에 눈이 멀어버리지 않을까 염려가 되네요.”

…세상에, 우리 애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대체 어디서 저런 멘트를 배워서 읊어대는 건지 의아해졌으나 궁금증은 단박에 해결됐다.

말을 마친 아몬이 세이린을 힐끔 쳐다봤고, 그녀가 윙크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내가 황망히 입을 벌리자 이번에는 세이린이 아몬 몰래 내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 모습에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오늘 늦지 않게 돌아올게.”

내가 말을 하며 아몬을 안아주고 싶어 하자 그녀는 눈치 빠르게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아몬을 한 번 안아주고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에구구….’

이제 보니 드레스를 입고 허리를 숙이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 다녀올게, 있다 보자.”

“예. 즐거운 시간 되시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몬과 짧은 인사를 마치고 마차로 향했다.

앞서 대기하고 있는 로베르 가문의 인장이 찍힌 마차는 전에 탔던 것과 달리 검은 바탕에 금장을 두르고 있었다.

세이린이 먼저 마차에 올라타서 내게 손을 내밀어 왔다.

나는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지난번에 시녀장에게 명했던 대로 마차에는 황금빛 널찍한 발판이 부착되어있었다.

‘좋아, 이제 외출할 때 혼자 마차에 오르내릴 수 있겠어.’

하지만 오늘은 의상이 의상인지라 누군가의 에스코트를 받는 편이 좋으리란 생각이 들어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문을 두 번 두드려 마부에게 신호를 보냈고, 마부는 서서히 속력을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저택들을 바라보다가 퍼뜩 아르반의 집에 놀러 가겠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음. 전에 한 번 방문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놀러 간 건 아니니까 나중에 다시 방문해도 괜찮겠지?’

그때는 카넬로웰 영지에 있는 저택을 방문했던 것이니 다음에는 수도에 있는 저택이 궁금하다고 운을 띄워야겠다.

그리 생각하다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세이린과 대화를 나눴다.

평소처럼 떠들다 보니 어느 순간 마차가 멈춰 섰다.

창밖을 살피니 황성에 들어가기 전에 의례 거치는 검문 과정인 듯했다.

흰 제복을 차려입은 황성 기사들이 다가와 양해를 구해왔다.

그들은 마차 안을 눈으로 쓱 훑어보더니 이내 물러났다.

다음 마차를 향해 사라지는 황성 기사들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세이린에게 말했다.

“검문이라고 해서 샅샅이 살펴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다른 누구도 아닌, 공녀님께서 타고 계신 마차이니 그럴 겁니다.”

사실 원칙대로라면 모두 내려서 간단한 몸수색을 받고 마차의 시트까지 살펴보는 게 맞습니다.

그리 덧붙인 세이린이 싱긋 웃어 보였다.

“뭐, 엄밀히 따지자면 일종의 직무 유기지만 저희가 편하니 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 렇긴 하죠.”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고지식하고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요즘 들어 보면 또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다시 연회가 열리는 궁까지 달리기 시작한 마차 안에서, 익숙하지만 불쾌한 기운을 감지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착각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검은 마력의 기운이 황궁 깊숙한 곳으로 향할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이건….’

공작저에서 간혹 느껴지던 기운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득한 공기. 뭐라 형언하기도 힘든 불쾌감이 엄습했다.

‘꼭 유해 가스가 가득 찬 늪지대로 들어가는 것 같아.’

순식간에 머리가 아파졌다. 그만큼 습하고 불쾌하면서 몸에 해롭게 작용하리란 확신이 들게 하는 기운이었다.

‘…이래서 지난번 공작과 마주했을 때 검은 마력의 기운이 평소보다 강하게 느껴졌었던 건가.’

기분 탓이 아니었구나.

내가 별안간 표정을 굳히자 세이린이 다정히 물어왔다.

“긴장되세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긴장이 아니라 불쾌감 때문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리 비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보아하니 세이린은 황궁에 가득 들어찬 이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말 신성력을 지닌 자들만 느낄 수 있는 건가.’

내가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마차는 황궁의 외곽 쪽에 위치한 궁에 도착했다.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아 심호흡을 했다.

‘중심부를 벗어나니 그리 심하지 않은 거로 봐서는 황궁 중앙 쪽에 원흉이 자리한 모양이야.’

이건 내가 당장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나중에 율렌과 상의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예감이 좋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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