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69화 (69/153)

69화.

“로즈니, 혹시 요즘 잠이 잘 오지 않나요?”

나는 눈가가 까맣고 얼굴이 푸석해 보이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그러자 로즈니는 초췌한 얼굴을 활짝 펴며 웃었다.

“잠을 자는 것보다 가치 있고 행복한 일을 하고 있답니다.”

분명 환하게 웃고 있음에도 안쓰러운 마음을 자아내는 낯빛이었다.

“그… 그렇군요.”

나는 슬쩍 그녀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드레스의 디자인으로 눈길을 돌렸다.

열정도 열정이지만 그녀가 디자인한 드레스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나는 골드, 세이린은 화이트 색상의 의상이었는데, 사실 딱 보자마자 파격적인 디자인이란 생각이 우선 뇌리를 스쳤다.

어깨가 다 드러나는 드레스는 등 쪽 역시 과감하게 모두 노출되어 있었다.

날개 뼈 아래에서부터 꼬리뼈 바로 위까지 브이자 모양으로 파인 라인에 가느다란 끈이 달려 있었고, 그것을 코르셋과 같이 당겨서 착용하는 레이스업 형식의 드레스였다.

이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과감한 노출도의 드레스였지만 나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세련돼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좀, 아니, 많이 파격적이라 엄청 눈에 띄겠지만.’

이미 내가 연회에 참석하는 시점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다.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예뻐 보이는 드레스에 흡족해진 나는 로즈니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다행히 이 제스처는 이곳에서도 통하는 모양인지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정말 뜬금없지만, 이 드레스를 보니 문득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만 보더라도 저 드레스는 춤을 추면 더욱 아름다울 것이 분명했다.

이전에 비슷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뮤지컬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진짜 예뻤는데….’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함께 춤을 추며 드레스의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는 장면.

오래된 기억이지만 여태 머릿속에서 생생했다.

이런 드레스를 입고 춤 한 번 추지 않고 돌아오기에는 로즈니가 만들어 준 정성과 매력적인 디자인이 아까웠다.

‘연회 전날까지 춤을 좀 연습해야겠어.’

그리하여 나는 본격적인 춤 연습에 돌입했다.

일단 춤을 연습하는 데 가장 중요한 파트너 문제는 세이린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며 나서주었다.

세이린의 배려 덕에 한동안 승마를 중단하고 더 급한 춤 연습에 매진했지만, 역시 많이 부족하긴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사람과도 연습해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물론 이번 연회에서는 아르반이랑 아는 척도 하지 않기로 했으니 세이린 외의 사람과 춤출 일은 없겠지만.’

애초에 아는 사람도 없으니.

그렇지만 나중에 다른 연회에 또 참가할 일이 있을 테니, 연습해 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나는 또 다른 연습 상대가 되어줄 사람을 떠올렸다.

‘생일날 춤을 못 추니까 연습으로라도 함께하면 좋잖아.’

흥흥. 나는 아르반이 거절하리라고 생각지도 않고 그를 찾아갔다.

이제는 그가 수업을 마치길 기다리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각하, 바쁘신가요?”

돌아갈 준비를 하는 그에게 다가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물었다.

“아닙니다. 말씀하십시오.”

“혹시 시간 괜찮으실 때 제 춤 연습 상대가 되어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고 싶어서 왔어요.”

“예. 물론. 모래는 일정이 있어 어렵겠지만 내일은 가능합니다.”

“저야 빠를수록 좋죠.”

“그러시다면 내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내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아르반은 의외의 동요 없이 대답을 해왔다.

‘조금 당황할 줄 알았는데….’

그를 놀라게 하는 취미는 없었지만 내심 아르반의 반응을 끌어내는 데 실패해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

‘그리고 보니 아르반이 아몬의 수업이 없을 때 우리 집에 오는 건 오랜만이네.’

리엘리는 그리 생각하며 연회 날 입게 될 디자인과 최대한 흡사한 드레스를 옷장에서 골라 입고 아르반이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향했다.

“제가 조금 늦었죠, 미안해요.”

“늦지 않으셨으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아, 그래요? 다행이다.”

익숙지 않은 구두와 의상을 입고 있어 평소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수 없던 리엘리는 무심하지만 평소 같은 아르반의 한마디에 안도했다.

반면 아르반은 그녀의 화려한 의상에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연보랏빛의 풍성한 드레스는 겨울에 접어든 날씨와 맞지 않게 어깨가 다 드러나 있었다.

아르반은 리엘리의 드러난 어깨가 왠지 모르게 거슬려 무의식중에 지그시 바라보다가, 제가 너무 오랫동안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그리고 서둘러 시선을 돌리려던 차에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리엘리는 안 그래도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아르반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던 차였다.

“이런 날씨에 노출 있는 의상이라 신경 쓰여요?”

“…예. 평소 선호하시는 종류의 의상은 아닌 듯하여.”

그렇긴 했다. 리엘리가 즐겨 입는 것은 드레스보다는 원피스였고, 대체로 가볍고 활동하기 용이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실은 이 드레스가 연회 날 입게 될 의상이랑 가장 비슷해서 입어봤어요.”

이전까지는 이런 드레스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아마 이전의 리엘리 로베르가 공작의 간섭을 피하고자 무차별적으로 구매한 드레스 중 하나일 터였다.

리엘리는 시녀장에게 부탁해 미리 준비해둔 영상구를 작동시켰다.

춤을 배웠던 기억을 약간은 습득했지만 그렇다고 능숙하게 출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에바와 세바니는 데려오지 않았다.

‘이렇게 못 추는데 누구한테 보이기는 좀….’

민망했다.

또한 리엘리 로베르는 어릴 적부터 춤을 배워왔으니, 아무리 함께한 지 오래되지 않은 그녀들이지만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리엘리는 영상구를 재생시키고 잽싸게 아르반과 자세를 잡았다.

세이린과 연습할 때와 같은 자세였지만 리엘리는 제 등허리를 감싸고 있는 아르반의 손바닥이 묘하게 의식되었다.

분명 장갑을 끼고 있고 자신 역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체온이 전해져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느린 연주곡이 흘러나오자 아르반은 자연스레 스텝을 밟으며 리엘리를 리드했다.

부드러운 그의 리드에 따라가며, 리엘리는 작게 감탄했다.

‘아르반은 못하는 게 없구나.’

반면 아르반은 제 손에 힘을 주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말을 모는 것이 일상과도 마찬가지였는데, 새삼 의식되었다.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거지.’

심지어 아주 느리고 기본적인 스텝만으로 이루어진 곡이거늘.

아르반은 제 한 손에 모두 가려질 듯한 리엘리의 가느다란 허리가 오늘따라 못내 신경 쓰였다.

처음 긴장한 것은 리엘리였지만 곡의 클라이맥스로 치달을수록 둘의 상태는 역전되었다.

그럼에도 아르반의 춤 실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리엘리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엇!”

그러던 중, 곡이 마무리되고 파트너에게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리엘리가 그만 발을 헛디뎌 휘청였다.

곡이 끝났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방심 탓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르반은 리엘리가 발을 헛디딘 순간 얼른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이런 구두를 신고 춤을 추는 게 미숙해서….”

“아닙니다.”

리엘리는 아르반의 팔뚝을 잡은 채 배시시 웃어 보였다.

멋쩍고 무안한 듯 웃는 그녀의 모습에 아르반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어딘가 답답하고, 심박이 조금 빨라지며 그녀와 닿아있는 부분에 열기가 몰리는 듯한 감각.

리엘리 또한 제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혹여나 아르반이 눈치채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

놀란 것도 있었지만 본의 아니게 아르반의 품에 안기게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나 몰라. 산맥에서 이 정도 스킨십은 부지기수였는데….’

리엘리와 아르반은 동시에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둘 사이에 잠시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리엘리는 아르반과 함께 한 시간 중 이리 어색하고 멋쩍은 적이 없었기에 괜히 부산스레 움직였다.

“바로 한 곡 더 괜찮죠?”

“예, 물론.”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아르반은 영상구 쪽으로 걸어가는 리엘리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

연회 전까지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세이린과 아르반의 시간이 날 때면 틈틈이 춤을 연습하고, 로즈니의 살롱에 들려 함께 수다를 떨다가 가봉 된 옷을 입어보기도 했다.

그때 로즈니의 얼굴이 한층 더 핼쑥해졌음은 두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금세 연회 당일이 되었다.

***

“세바니, 아델 경이 도착하셨는지 확인하고 와줄래?”

“네, 아가씨. 금방 다녀올게요.”

내 부탁에 후다닥, 잰걸음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거울을 봤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 얼굴에도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데….’

역시 화장을 하고 꾸미니 느낌이 굉장히 다르다. 물론 좋은 의미로.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마사지를 받고 팩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결과물과 마주하니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과정을 매번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렇게 특별한 날에만 기분 내는 용으로 좋다는 말이다.

‘이런 일을 어떻게 매일 해? 어휴….’

거울 속의 나는 머리를 땋아 위로 틀어 올려 고정시키고 있었다.

액세서리로는 비교적 심플한 디자인의 블랙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목걸이를 착용했다.

드레스가 워낙 눈에 띄는 형태였기에, 화려한 액세서리는 오히려 지나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로즈니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착용한 것들이었다.

“다됐어요. 아가씨.”

에바가 한껏 꾸미던 내 머리에서 손을 떼자 내 치장을 돕기 위해 들어와 있던 다른 시녀들이 뒤로 물러났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자 풍성한 치맛자락이 찰랑거렸다.

페티코트 위에 셔링을 준 천을 여러 겹 박아넣어 한껏 부풀린 드레스 자락은 무게가 상당했다.

‘그래도 그 무게를 감수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드레스이기도 하지.’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사락사락 움직이는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실로 아름다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