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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68화 (68/153)

68화.

***

“오늘 저 때문에 많이 당황스러우셨죠.”

리엘리는 마차에 오르려는 아르반에게 멋쩍게 말했다.

아까 자신이 우격다짐으로 밀고 나가 많이 곤란해 보였다.

‘저 사람은 그래도 날 생각해서 초대하지 않은 건데.’

너무 제 생각만 하고 몰아붙인 것 같아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닙니다. 친분이 있음에도 아무 말 없이 넘기려 했던 제 잘못이 큽니다.”

아르반은 리엘리에게 허리를 약간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아, 오랜만이네.’

이런 형식적인 인사는.

리엘리는 그의 커다란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어 올렸다.

그러자 아르반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춰왔다.

“……!”

리엘리는 그가 자신과 시선을 맞춘 채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입을 맞추는 순간까지 그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아르반이 입술을 떼고 다시 허리를 꼿꼿이 펼 때까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이런 인사는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의 손에 제 손을 겹칠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아르반과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이상할 만큼이나 의식이 되었다.

역시 저리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익숙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가 보다.

리엘리가 붉어지려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재빨리 손을 빼내자 아르반은 묘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번 일은 제가 미숙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르반은 갑작스레 비어버린 제 손을 꽉 움켜쥐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는 별것 아닌 연회라 할지라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명백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당신이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정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주변에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이 있어 본 적이 없었기에 발생한 부주의였다.

‘앞으로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한번 신중히 생각해봐야겠어.’

자신이 아닌, 그녀의 입장에서.

“…….”

리엘리는 아르반의 사과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물론 그로 인해 마음이 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랬기에 이렇게 아르반에게 따졌던 거니까.

하지만 그가 저리 저자세로 나오니 그녀의 마음에 미안함이 더욱 커져 버렸다.

“…아니에요. 당신이 잘못했다기보다는, 우리가 서로를 온전히 헤아리지 못한 거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리엘리는 그녀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해 아르반의 염려를 등한시했고, 아르반은 타인의 시선과 서로 간의 입장만을 생각하느라 리엘리의 감정을 바라보지 못했다.

인간관계에 있어 모든 부분을 맞추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것을, 리엘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해.’

리엘리는 아르반과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마음에 앙금이 남기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당신도 나처럼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리엘리는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럽고 표정 없는 아르반의 얼굴을 살폈다.

애초에 감정 표현이 많지 않은 사람이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자신이 초대장을 원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내어준 것 임에도 불만을 표하기보다 사과를 해 온다.

‘당신도 나와 잘 지내고 싶어서 내게 맞춰주기 위해 이러는 거야? 아니면 정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사과하는 걸까.’

분간이 가지 않았다.

리엘리는 이 순간이 가기 전에 제가 지금 떠올린 바를 그에게 전하고 싶다 생각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푸른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실 아르반.”

“예, 말씀하십시오.”

“아마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저는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예?”

그가 약간 커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반문하자 리엘리는 보기 드문 그의 모습에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봐요. 지금도 당신이 제 혼삿길 걱정해준 건데 저는 초대장 안 줬다고 따지기나 하고.”

“그건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당신이 제 생일을 그리 중요하게 여겨 주실 줄 몰라서….”

“당신은 그래도 저를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던 거잖아요. 어차피 참석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솔직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죠?”

“아뇨. 아닙니다. 당신의 말을 듣고 제 잘못을 뒤늦게 알았을 뿐입니다. 이득 될 일 하나 없음에도 고작 제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들려주신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기뻤… 습니다.”

그녀가 고작 제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연회에 참석하고 싶다 말했을 때,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뻤다.

‘당신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리에 참석해 뜬소문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직 나에게 축하를 건네고자 한다는 게.’

그래서 조금 전 그녀가 자신에게 초대장을 달라 요구했을 때, 만족감을 느꼈다.

아르반은 새삼 자신의 감정에 동요했다.

그리고 리엘리는 아르반의 동공이 약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곧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변명을 듣고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흐… 흠흠!”

자신이 아르반을 비난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잘못을 꼬집어 말했을 뿐인데 마치 제 일인 양, 아니, 제 일보다 당황하여 대신 변호하려 드는 게 귀여웠다.

“…엘리?”

갑작스레 헛기침을 하는 척, 웃음을 참는 리엘리를 보고 아르반이 의아하게 그녀를 불렀다.

리엘리는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당신이 한 말. 하늘에 맹세코 진실이라고 말 할 수 있어요?”

“…….”

“그거 봐요. 사실 지금도 제가 연회에 참석하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잖아요.”

아르반은 리엘리의 말을 듣고 약간 망설였지만 이내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닙니다.”

“네?”

“당신에게 득 될 것 없다는 말은 사실이니 정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말씀드렸던 건 모두 진심이었습니다.”

말하고 나니 가슴이 후련해졌다.

아르반은 이렇게 터놓고 누군가에게 진심을 말한 적이 없었다.

아마 무의식중에 맴돌던 생각을 얼결에 뱉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숨김없이 고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리 가감 없는 마음을 솔직히 이야기한 것이 잘한 짓인지 모르겠단 후회와 불안이 엄습해왔다.

“당신이 기뻤다니… 다행이네요.”

리엘리는 그저 제 이기심으로 인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역시 사람이란 대화를 하지 않고는 모든 일에 오해가 생기기 마련이다.

“사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지금처럼 솔직하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줬으면 한다는 거였어요.”

아르반은 리엘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짧게 고민하는 동안 리엘리의 말은 이어졌다.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르는 부분이 많잖아요. 전 당신이랑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가 원하는 걸 말하는 거고요.”

“…….”

“원래 모든 관계가 일방통행이면 한쪽이 지치기 마련이니까, 당신도 저한테 바라는 거나 서운한 게 있으면 말해줘요.”

“딱히 당신께 서운하거나 바라는 건 없습니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요. 나중에라도 생길 수 있는 거니까, 그때는 제가 한 말 기억하시고 말해줘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명심해두죠.”

“그리고… 조금 전에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어쩐지 머쓱해서 리엘리는 일부러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런 리엘리의 모습에 아르반은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녀가 저리 밝게 웃는 것을 보니 제 작은 불안도, 연회 당일 벌어질 불상사도 다 별것 아닌 일처럼 여겨졌다.

“어….”

리엘리는 그의 미소를 보고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렇게 잠깐 굳어있던 리엘리의 시간을 다시 본래대로 돌려준 것은 그들의 대화를 기다리다 못한 세이린이었다.

“각하, 말씀 도중 죄송합니다만 슬슬 출발하지 않으시면 일정에 차질이 생깁니다.”

“…알겠다.”

“저 때문에 늦어졌네요. 미안해요, 얼른 가보세요.”

리엘리는 그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르반은 무심결에 손을 내밀려 하다 한걸음 물러나는 리엘리를 보고는 자신이 이미 작별 인사를 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손을 움찔거린 아르반이 주먹을 말아 쥐며 가벼운 묵례와 함께 작별을 고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살펴 가세요. 다음에 봬요.”

리엘리를 뒤로 하고 마차에 오른 아르반은 한참 동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면 아마 그녀는 순순히 손을 내어줬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의 손등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출 수 있었겠지.

아르반은 제 손에 고정했던 시선을 억지로 떼어 창밖을 바라봤다.

쓸데없는 생각이 길어졌다.

그날 저녁, 아르반이 보낸 초대장이 리엘리의 손에 도착했다.

***

나는 손바닥만 한 보석함을 열어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전에 보석상의 밀러를 통해 세공을 의뢰했던 브로치였다.

여태 받아서 확인만 하고 보관해 두었던 물건인데,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이걸 건넬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아르반에게 초대장을 받아냈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이는 로즈니였다.

초대장이 도착했던 다음 날, 아몬의 수업을 위해 방문한 로즈니에게 바로 말을 꺼냈다.

그녀는 내 입에서 ‘초대장’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기 무섭게 눈을 홉뜨더니 시녀가 들고 있던 가방에서 스케치한 디자인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

솔직히 엄청 놀랐다.

벌써 디자인을 해두었다는 사실에 한 번, 그리고 디자인화를 들고 방문했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그녀의 빠른 행동력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공녀님의 치수는 알고 있어서 가봉에 들어갔는데, 아델 경의 치수는 알지 못해서 일단 눈대중으로 만들고 있답니다. 후후.”

그리 말하며 즐거운 듯 웃고 있는 로즈니의 눈가가 거뭇거뭇했다.

그 얼굴을 보니 기시감이 들었다.

‘뭐지, 어디선가 저 비슷한 얼굴을 봤던 것 같은데… 아!’

전에 아몬이 이틀 밤을 새웠을 때, 딱 저런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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