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당시 방황하던 그는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제 인생의 새로운 길잡이로 삼았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고, 네가 진짜 바라는 것을 이루고 살아가….”
남들에게는 별것 아닐 수 있는 한마디가 아르반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난제였다.
“저한테 좋을 일 없어도 돼요. 저는 그냥 당신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을 뿐이니까.”
“…….”
아르반은 여전히 불만으로 가득 찬 그녀의 음성을 들으며 제 착잡한 마음을 숨겼다.
이제 어머니의 유언보다 리엘리 로베르라는 사람이 아르반에게 있어 더욱 중요한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더욱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적정선의 거리를 지켜야만 한다.
그녀와 자신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아무리 로베르 공작의 딸이라 한들 황제가 작정한다면 표적이 되지 못할 이유 또한 없다.’
물론 그러기에는 황제 측에서도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일단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는 멀리하는 게 최선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아르반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리엘리 로베르라는 이를 자신의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놓고 싶지 않다는 마음 역시 그의 안에서 점점 더 부피를 키워갔다.
‘이쯤에서 멀어진다면 문제 될 것은 없겠지.’
그 뒤에 남겨질 자신을 제외한다면.
허나 아르반은 그녀를 놔버릴 생각이 없었다.
처음 상실을 겪었을 때는 슬픔에 잠겼고, 그다음에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후로는 수도 없이 좌절했으며 절망에 빠졌다.
언제나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벅찬 시련이 아르반을 덮쳐왔지만, 그는 결국 그것을 딛고 일어나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르반은 의문을 품곤 했다.
과연 다음에도 자신은 이와 같은 일을 겪고 버텨낼 수 있을까.
유모가 눈앞에서 끔찍한 몰골이 되어 쓰러지던 순간에도, 어머니가 독에 중독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순간에도 같은 생각을 했다.
언제나 사건이 벌어진 뒤에서야 떠오르던 의문이, 지금 아르반의 뇌리를 강하게 파고들었다.
‘만약 다음 황제의 표적이 당신이 된다면, 당신을 잃고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아르반 자신조차 감히 추측할 수 없었다.
리엘리 로베르는 아르반에게 있어서 처음 사귄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그녀의 웃는 얼굴에 이리도 느슨하게 풀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겠지.
허나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에게 있어 어머니나 유모만큼이나 중요한 존재가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것까진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르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또 리엘리가 소중하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답 역시… 내릴 수 없었다.
“아르반?”
의아한 듯한 리엘리의 목소리가 아르반의 상념을 깨트렸다.
“제가 연회에 참석하는 게 그렇게 탐탁지 않아요?”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이 참석할 만한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엘리 당신은 약혼자도 없는 몸 아닙니까.”
“아. 제 혼삿길 걱정해 주는 거였어요?”
어쩐지 허탈하게 들리는 리엘리의 음성에 아르반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가뜩이나 사교계에 데뷔조차 하지 않은 당신이 처음 참석하는 연회입니다. 분명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겁니다.”
아르반의 우려에 리엘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그래도 가고 싶다면요? 애초에 내 혼사를 아르반이 신경 써줄 필요는 없어요. 저는 딱히 결혼할 생각도 없고….”
아르반은 예상치 못한 리엘리의 발언에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그는 인상을 구기며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되짚어보았다.
‘공작의 적녀가 결혼할 생각이 없다라….’
다른 이의 입에서 들었다면 재미없는 농으로 취급했을 테지만 그 말을 한 상대가 리엘리 로베르이니 진담이 분명했다.
아르반은 더는 그녀를 거절할 명분이 사라졌음을 느끼고 결국 하고 싶지 않던 말을 입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꼭, 빠른 시일 내에 보내주셨으면 해요.”
아르반은 리엘리의 힘이 잔뜩 들어간 뚝뚝 끊기는 목소리를 들으며 착잡한 심정과 별개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당신이 이렇게 열을 낼 만큼 연회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어.’
제 생일을 축하해 주겠다는 이유도 분명 거짓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매년 돌아오는 단순한 연례행사일 뿐이었다.
혹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라도 더 있는 것일까.
그리 생각하니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건 당연하게도 이 연회의 목적이었다.
아르반 카넬로웰의 짝을 찾는다는 웃기지도 않은 거짓말.
‘하지만 이건 말이 되질 않아.’
아르반은 그녀가 일개 공녀가 아닌, 공작의 후계로 내정된 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그 사실에 대해 아는 이가 얼마 없지만 데뷔탕트 이후 공작이 정식으로 발표를 할 터였다.
‘더구나 방금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한 바도 있으니.’
결혼할 생각이 없노라고.
만약 그녀가 결혼하게 된다 해도 그녀는 로베르 공작 위를 계승해야 하니 그 부군이 될 자는 리엘리보다 신분이 낮은 사내여야 했다.
아르반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뭔데요?”
리엘리는 어딘가 결연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긴장한 채 대답했다.
“연회장에서 저희는 처음 만나는 사이처럼 행동하는 겁니다.”
“…….”
아르반의 말을 듣고 잠시 당황했던 리엘리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가 어떤 의도로 저런 조건을 꺼냈는지는 알겠다.
아르반과 자신은 본래 아무 연고 없는 사이여야 마땅하다.
그런데 초대를 받아 연회에 발을 들이는 것부터 이미 파란의 대상이 될 것은 뻔했고, 거기다 친근하게 인사를 한다면….
‘그와 내가 약혼, 아니다. 어쩌면 결혼하게 될 거란 소문이 나돌지도?’
원래 소문이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 한도 끝도 없이 불어나기 마련이니까.
사실 리엘리는 소문이 나도 크게 상관없다 생각했다. 다만 그런 자신과 달리 아르반은 곤란한 거겠지.
‘정말 대공비를 들이려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다. 황제의 명과 별개로 결혼에 대해서는 긍정적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비록 원작에서 그는 미혼으로 등장하긴 했으나 상황이 달라졌으니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리 생각하자 또다시 심사가 뒤틀렸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그에게 불만을 토해낼 수는 없었다.
그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남의 결혼사업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리엘리는 마지못해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아르반은 리엘리의 답에 작게 안도하며 이번에는 그녀의 파트너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아직 데뷔하지 않았으니 같이 참석할 만한 마땅한 영식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 쪽에서 적당한 인물을 붙여 주는 게 좋을 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떠오르는 이는 몇 명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를 그녀의 옆에 배치해보아도 마뜩잖았다.
“아르반.”
별안간 아르반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자 그걸 보다 못한 리엘리가 그를 불렀다.
아르반은 순식간에 얼굴을 펴며 평소와 같은 낯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리엘리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제가 강제로 초대장 뜯어가서 화났어요? 너무 그렇게 인상 쓰지 마요. 고운 얼굴에 주름 생기겠어요.”
“제가 그랬습니까.”
아르반은 여상스러운 말투로 대꾸했지만 사실 그의 머릿속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자신이 인상을 찡그렸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네. 그러니까 말을 하죠. 솔직하게 얘기해 봐요. 저 때문에 짜증 났어요?”
리엘리는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그에게 넌지시 물었으나,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단번에 눈치챈 아르반은 순간 제가 느낀 감정을 뒤로한 채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저 당신의 파트너 문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아….”
“아직 데뷔하지 않았으니 대동할 마땅한 파트너가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건 괜찮아요. 아델 경이 파트너로서 동반해 주시기로 했거든요.”
당신이 그런 걸 걱정했다니.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리엘리가 어찌 됐든 납득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제야 홀가분하다는 얼굴로 시원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을까.
아르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무어라 말을 붙일 수는 없었다.
여기서 더 말렸다간 그녀의 기분만 상하게 만들 뿐이었다.
‘연회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황제의 눈이 당신에게도 붙게 될 텐데….’
아르반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져 왔다.
더구나 그녀의 파트너가 아델이라니.
‘엘리는 모르고 있더라도 아델은 알고 있을 텐데.’
자신의 보좌관으로 이미 사교계에 자리매김한 그녀가 공녀의 파트너로 참석하는 게 다른 이들의 눈에 어찌 비칠지에 대해서.
그렇지만 아델 말고 다른 이를 대동하라는 부탁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째서?’
분명 다른 영식을 동반하는 편이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나은 선택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고, 결국 아르반은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
아르반은 리엘리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생각을 알 길이 없는 리엘리는 밝게 웃기만 했다.
더욱이 리엘리는 사교계에 자신에 대한 어떤 말이 나돌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여겼기에 전혀 걱정이 없었다.
‘애초에 사교계라는 것 자체가 나랑 맞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고.’
우아함과는 거리가 머니 숨 막히지나 않으면 다행일지도.
그리 생각하며 리엘리는 아르반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억지로 뜯어내는 꼴이었지만 일단 초대장을 보내주겠다는 확답을 받고 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사교계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진다면 아몬의 친구를 만들어 주는 일에 다소 난항을 겪게 될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리엘리 로베르는 로베르 공작가의 적녀였으니까.
아몬 역시 마찬가지로, 공작저에서야 공작의 명령으로 사용인들의 무시를 받아왔다지만 누가 뭐라 해도 아몬은 공작의 적자였다.
‘소문나 봐야 그래 봤자지.’
신분제 사회에서는 신분 높은 게 깡패였다.
자신은 그냥 아몬이 자랄 때까지만 버티다가 사교계에서도, 그리고 후계의 자리에서도 물러나면 그만인 것이다.
‘후계자로 내정되었던 리엘리가 어째서 타국으로 시집을 가게 됐는지는 아직 알아낸 게 없지만….’
머지않아 그녀의 기억을 모두 떠올리게 된다면 그에 대한 사실도 알 수 있게 되겠지.
“그럼,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뇨. 일이 있는 사람을 잡은 건 저인데요.”
“초대장은 시종을 통해 오늘 중으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리엘리는 활짝 웃어 보였고, 아르반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