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누님.”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아 멀끔한 모습의 아르반과는 달리 아몬은 서늘한 날씨에도 머리끝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대충 땀만 닦고 바로 내게로 온 탓인지 평소보다 거리를 두고 있는 아몬을 보고 내 쪽에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아몬이 크게 움찔하더니 이내 두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게 아닌가.
응? 이거 봐라?
그에 나는 아몬이 거리를 벌린 만큼 더 가까이 따라붙었고, 같은 행동을 두어 번 더 반복한 후에야 아이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훈련을 받느라 땀이 많이 나서 냄새가 날 거예요. 불쾌하실 수 있으니 떨어져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냄새는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그런 거로 신경 쓰지 말고 이리 가까이 와봐.”
내 말에도 머뭇거리기만 할 뿐 거리를 좁히지 않는 아몬의 모습에 나는 슬쩍 발을 떼 가까이 다가가 섰다.
그러자 약간은 체념한 모양인지, 더 이상 자리를 옮기지는 않았다.
나는 도로록 눈동자만 굴려대는 아몬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귀엽기도 하지.
평생 동생이란 존재가 있었던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나 싶다.
내가 안아주기 위해 팔을 뻗자 아몬은 손이 닿는 순간 다시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잽싸게 낚아채듯 아몬을 끌어안아 버렸다.
그리고는 가볍게 등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오늘도 고생했어. 누나가 각하랑 따로 할 말이 있으니까, 있다 저녁 먹을 때 보자.”
“…네. 그때 봬요.”
부끄러운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하는 아몬이 귀여워 작은 웃음을 흘렸다.
천천히 품에서 떼어내자 안 그래도 격한 훈련으로 상기되었던 볼이 한층 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귀 끝까지 붉은 물이 든 아이의 모습에 내심 흐뭇하게 웃다가 번뜩 아르반에게로 생각이 번진 나는 아몬을 들여보내고 그와 함께 응접실로 장소를 옮겼다.
나는 아르반과 함께 착석하며 즉각 입을 열었다.
“용건은 금방 끝날 것 같은데, 차를 내어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그의 대답에 고개를 숙인 세바니가 자리를 뜨자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아르반. 저한테 뭐 줄 거 없어요? 아니면 할 말이라던가.”
세이린으로부터 이미 내 이름으로 작성된 초대장이 없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음에도 구태여 물어봤다.
지금이라도 눈치를 채고 초대장을 준다고 하면 그대로 넘어갈 생각이고, 아니라면 잔뜩 꽁해있을 예정이었다.
아무리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가 퇴색한 연회라고는 하나, 초대받지 못한 것은 심히 서운한 일이었다.
‘본인 입으로 전달하기 뭐해서 그런 거면 하다못해 세이린을 통해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도 있었잖아.’
그럼 이해하고 조용히 선물만 전해주려 했을 수도 있는데….
나는 살짝 눈매를 좁히며 그를 쏘아봤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내 기분도 좀 알아달라고. 하마터면 당신 생일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잖아.’
***
새초롬한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리엘리의 모습에 아르반은 의아해졌다.
그는 바로 짚이는 바를 생각해 보았다.
줄 것이나 할 말이라….
‘전혀 모르겠군.’
짧은 시간 동안 맹렬히 머리를 굴렸지만 끝끝내 정답을 도출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제 생일 연회를 떠올리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에게 언급하지 않았으니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은 그녀가 연회의 존재를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다.
만에 하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제 생일 연회 따위에 초대받고 싶어 할 리 없다고 여겼다.
아르반은 근거 없는 확신에 가득 차 정답을 눈앞에 두고도 헤매기만 했다.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당신께 약속드리고 지키지 못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아르반은 리엘리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모르시겠어요? 저한테 줄 것도 없으시고요?”
아르반은 제 질문에 질문으로 돌아온 그녀의 말을 듣고 난감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리엘리가 저리 재차 언급할 정도라면 자신이 무언가를 그녀에게 주어야 하는 상황임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
아르반은 리엘리가 듣지 못할 만큼 미약한 침음을 내뱉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도 인사 대신 대뜸 용건부터 묻지를 않나… 심각하게 풀어져 있었군.’
심지어 그녀가 저리 불만 가득한 태도로 말을 꺼내는 이유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르반에게 있어 지인이란 모두 전장을 함께한 전우들뿐이었다.
또한 그들은 모두 그의 부하였지 동등한 관계에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르반은 리엘리를 가깝게 여기기 시작하고부터 종종 그녀에게 예를 갖추는 것을 잊을 때가 있었다.
바로 조금 전의 상황처럼.
돌아가면 예전과 같은 강도 높은 훈련을 재개해야겠다고, 아르반은 결심했다.
너무 해이해졌다. 이곳은 전장이 아니다.
자신이 발을 닫고 있는 곳은 전쟁터도, 자신의 저택도 아닌 공작저였고, 제 앞에 있는 이는 그 공작가의 적녀이자 후계로 내정된 공녀였다.
서로 이름을 허락했다 한들 귀족으로서 예를 갖춤이 당연한 상대이거늘….
제 잘못을 돌아보던 아르반이 어울리지 않게 침울한 기색으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르반이 답지 않게 눈썹을 늘어트리며 사과하자 리엘리는 순간 움찔했다.
그가 조금 가엾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바로잡고는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힌트를 줄게요. 지금으로부터 8일 후에 있을 일 때문이에요.”
참 쉽죠?
그리 덧붙이며 리엘리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이 정도면 그냥 정답을 말해주는 꼴이었다.
아르반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생각했던 것이 적중했을 때의 당혹감은 상당했다.
‘공녀가 어떻게 연회에 대해… 아델인가.’
최근 그녀가 아델과 부쩍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쓸데없는 말을 전달한 모양이군.’
아델에게 경고를 주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 생각은 철회되었다.
기밀 사항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초대장을 돌린 연회에 대해 함구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아르반은 그녀에게 변명하려다 멈칫했다.
리엘리가 연회의 진짜 목적에 대해 알고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없으니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는 게 좋을지 난처해졌다.
‘그 또한 아델을 통해 전달받았을지도 모르니.’
아르반은 리엘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보랏빛 눈동자에는 약간의 원망과 기대감이 뒤엉켜있고 불만으로 가득 찬 표정이지만 어딘가 서운해 보이기도 했다.
아르반은 리엘리의 모습을 살피며 그녀가 이번 연회의 실상을 모르고 있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은 이상 불순한 목적으로 개최되는 연회의 초대장을 굳이 받고 싶어 할 이유가 없으니까.
“아델에게 전해 들으셨군요. 하지만 이번 연회는 일반적인 축하 연회와는 많이 다를 겁니다.”
“알고 있어요. 아델 경이 말해줬거든요. 아르반 당신이 원하지 않은 연회였다는 것부터, 전부.”
“전부, 말입니까.”
그런데도 이 연회에 참석하고 싶으십니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셨음에도?
아르반은 리엘리에게 곧장 질문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삼켜버렸다.
제가 아는 그녀라면 연회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를 중요시하기보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라는 부분에 초점을 두고 있으리라 여겨졌기에.
머릿속에서는 결론을 지었음에도 입 안에서 맴도는 질문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가슴 한구석이 울렁이는 듯한 감각이 느껴져, 그는 조금 당황했다.
아르반은 다리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비록 개최 의도가 따로 있다 하더라도 일단 당신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라는 건 틀림 없잖아요.”
아르반은 제가 말이 없자 먼저 운을 떼는 리엘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제가 예상한 생각을 그대로 언급하며 뽀로통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반은 문득 그런 리엘리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충족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자신은 분명 현 상황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리엘리 로베르가 제 생일이란 별것 아닌 행사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초대받지 못함에 서운해하는 모습에서.
“제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진짜 안 줄 거예요? 연회 초대장.”
이제 대놓고 그녀가 자신을 째려보자 제 감정을 갈무리한 아르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드리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아델에게 전해 들으셨다면 아시지 않습니까. 그 연회에 참석하는 건 당신께 무엇 하나 좋은 일이 없습니다.”
제 만족도와 별개로 그녀가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말리고 싶었다.
별것도 아닌 연례행사에 수작질이나 해대는 황제의 검은 속내에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그런 황제의 수작에 놀아나 주는 것은 전장에서 검을 드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어머니를 잃은 이후에는 황제의 역겨운 짓거리에 넌덜머리가 나기도 했다.
그전까지 아르반은 오직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전 대공과 황제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다.
허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격한 분노와 동시에 허탈함을 느꼈다.
황제의 목을 치고 어머니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다만 그보다 더 거대한 증오가 아르반을 막아 새웠다.
거의 평생이라 불러 무방한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그의 아버지이자 현 황제의 동생인 전 대공, 유젠 카넬로웰을 향한 증오.
아르반이 황제에게 검을 겨누는 상황은 죽은 제 아비가 바라마지않던 염원이었다.
반역. 유젠 카넬로웰이 아르반에게 바라던 유일무이한 이상.
아르반은 제가 황제를 죽인다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유젠의 이상을 결단코 실현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어머니의 복수를 포기하고 분노를 삼켰다.
그러고 나니, 더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태양조차 떠오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나침반도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만 같이.
그것이 불과 일 년 전쯤의 일이다.
어머니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전쟁이 종결되어 대공저로 귀환한 아르반은 그저 해야 할 일에만 매진했다.
간혹 반드시 참석해야만 하는 황성의 행사에만 얼굴을 비치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저택에서 두문불출하며 보냈다.
에시트 산맥에서 발견된 마정석 광산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번 연회까지 계속 그러한 생활을 반복해 나갔을 것이다.
아르반은 제 앞에 앉아있는 리엘리를 눈에 담았다.
‘당신을 만나고 예상보다 많은 것이 변해버렸어.’
하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