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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65화 (65/153)

65화.

나는 뜬금없는 율렌의 발언에 눈만 깜빡였다.

폴리모프라니, 그러니까 우리 아몬의 모습을 바꿔주겠다고? 아니, 다른 사람 모습으로? 그러고 파티에 가라는 거야?

갑작스러운 제안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어지는 녀석의 호언장담에 입을 쩍 벌렸다.

“그래, 폴리모프. 꼭 지금 꼬맹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겠다는 건 아니잖아?”

그렇긴 했다.

사실 우리 아몬이 좀 많이 어른스럽고 의젓하니 성인의 모습으로 바뀐다고 해서 위화감이 들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다른 사람 얼굴을 하고 가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아몬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어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주저하자 율렌이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이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신분패에 얼굴이 찍힌 것도 아닌데, 본바탕까지 바꿀 생각 없어. 지금보다 좀 더 커진 모습으로 바꿔서, 신분만 그럴싸하게 준비하면 되는 거 아냐?”

이어지는 율렌의 설명에 나는 머리를 팽팽 돌렸다.

그… 럴 듯한데?

확실히 사교계에 데뷔하지 못하는 하급 귀족이야 널리고 널렸으니 그중 하나의 신분을 사거나 빌리는 건 어렵지 않을 듯했다.

“아…. 율렌 넌 진짜….”

계산을 마친 나는 밀려드는 감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에 율렌은 다른 생각을 했는지 계속 툴툴거려왔다.

“뭐! 이것도 싫어? 그럼 나도 몰라!”

“누가 싫대? 너무 좋아서 그렇지!”

내가 작은 몸을 와락 끌어안고 작은 몸통에 얼굴을 비비자 율렌이 자지러졌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뭐 잘 못 먹었어?!”

“아니, 그냥 좋아서! 하여간에 예뻐 죽겠다니까.”

“무슨…! 그만해!”

“싫은데? 정 싫으면 알아서 빠져나가시던지.”

풀어달라는 요구에 괜히 장난기가 발동해 더 세게 끌어안고 침대를 대굴대굴 굴렀다.

그러자 율렌은 기겁하며 꼬리로 연신 내 몸을 아프지 않게 때려댔다.

미약하게 발버둥을 쳐대고 있었지만 율렌이 작은 몸체에 비해 얼마나 힘이 좋은지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앙탈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여간에 빠져나갈 생각도 없으면서 괜히 투덜거린다니까. 귀엽게 구네.’

나는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율렌을 지긋이 내려다봤다.

내가 알고 있는 드래곤이란 존재들은 홀로 고고한 이들이었다.

그건 이전 세계에서도 익히 잘 알려진 판타지 세계의 흔한 설정 중 하나였고, 이곳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항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겪으며 보니 율렌은 드래곤임에도 은근히 스킨십을 좋아했다.

내가 방에 들어오면 항상 무릎이나 어깨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쓰다듬어 주거나 안아주면 얌전히 몸을 맡겨 온다.

물론 마력을 회복해야 하니 붙어있어야 한다는 게 우선 전제로 붙는 것도 있겠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율렌은 치대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수백 년간 정신만 깨어있는 채로 혼자 지내와서 그런 걸까.’

나는 손으로 비교적 다른 곳보다 말랑한 율렌의 뱃가죽을 긁어주며 물었다.

“근데 폴리모프라는 거 마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마법 아니야? 네가 언제 회복할 줄 알고 마냥 기다려.”

“나 자신한테 거는 게 아니라 인간한테 사용하는 건 그렇게 많은 마력을 필요로 하지 않아.”

“…반대 아닌가? 자기 자신한테 사용하는 편이 마력 소모가 적다며.”

요즘 들어 종종 시간이 날 때면 율렌에게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아무래도 녀석이 가장 잘 아는 것 중 하나기도 하고, 나로서도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약간의 마법적 상식 정도는 머리에 담아 둘 수 있었던 터라, 문득 의문이 들었다.

“폴리모프는 외견을 변형시키는 마법이야.”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래, 하여튼 같은 인간을 인간으로 변형시키는 건 크게 마력을 요하는 일이 아니야. 하지만 드래곤을 인간의 모습으로 변형시키는 건 상당량의 마력이 소모될 수밖에 없어. 애초에 종족이 다르잖아.”

“흠. 그럼 아몬을 폴리모프시켜 줄 만큼 마력이 회복돼도 너는 그 모습 그대로일 거라는 말이네.”

“그렇지. 그리고 내가 마력을 회복해 본체에 가깝게 몸이 더 커질수록 폴리모프 때 필요한 마력의 양도 비례해서 상승할 거야.”

“뭐야…. 그럼 정말 나중이 되겠네.”

“아마 그렇겠지? 그래도 마법을 사용할 만큼 회복되면 그 뒤로는 금방이라고 봐.”

그리 말한 율렌은 내 품에서 꾸물꾸물 빠져나와 앞발을 들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율렌의 행동에 멀뚱히 녀석의 앞발을 내려다보던 나는 바로 앞에서 벌어진 놀라운 현상에 눈을 크게 떴다.

은빛의 짧은 앞발 위에 아주 작은 불꽃이 피어올라 있었다.

그러니까, 라이터 불꽃만큼 작은 불꽃이.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순간적으로 그 불꽃의 크기가 율렌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비율적으로.

하지만 이 말을 꺼내 봐야 율렌의 눈총만 살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사족을 붙이는 대신 순수하게 기뻐해 주기로 했다.

“와! 이제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야?!”

“이건 마법이 아냐.”

내 감탄에 율렌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뚱한 어조로 답해왔다.

사실 마법 물품은 이것저것 접해봤지만 실제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정말 신기한 마음에 한 말이었는데… 율렌의 대답에 나 또한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그럼 이건 뭔데?”

내가 율렌의 발 위에 떠 있는 라이터 불꽃만 한 마법의 산물을 가리키며 묻자 율렌이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마법이 되다 만 찌꺼기.”

그 신랄한 어조에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아니, 너는 네가 만들어낸 건데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니?”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이런 걸 마법이라 칭한다면 그거야말로 마법에 대한 모독이고 수치니까.”

“하이고…. 그러세요. 그래도 저는 기쁘네요.”

뾰로통한 율렌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며 말하자 율렌이 약하게 내 손가락을 앙, 물어버렸다.

“아, 왜 이래! 네가 드래곤이지 강아지야?”

“…흥!”

콧방귀를 뀐 율렌이 팩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도 어찌 됐든지 간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은 마력을 회복했다는 증거였기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많이 회복됐나 보네. 축하해.”

“축하해 주려면 나중에 해줘. 이런 마법 같지도 않은 것을 사용했을 때 말고.”

“원하신다면야.”

율렌의 투덜거림에 내가 장난스레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취하자 율렌도 내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소리 내 웃었다.

“흐… 하여튼 아직 마법을 사용하려면 멀었으니까 빨리 나 좀 끌어안고 있어 봐.”

웃으며 내 무릎 위로 기어올라오는 율렌을 밀어내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다리에서 꾸물거리는 율렌을 들어 올려 꼭 끌어안고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잠들기 싫다.”

잠이 들면 또 꿈속에서 리엘리의 기억을 받아들여야겠지.

율렌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그럭저럭 익숙해졌던 일이었지만 이제는 너무 방대한 기억들이 한 번에 쏟아져 들어와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일어날 때 아픈 것도 충분히 기분 나쁘긴 하지만….’

그래도 율렌이 곧장 회복을 시켜주는 데다 익숙해지니 나름 버틸 만한 것 같았다.

“잠 안 오면 지난번에 먹었던 약이라도 먹어 보던가.”

내 혼잣말에 율렌이 대답해왔다. 하지만 나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욱 이불을 끌어 올렸다.

***

나는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세이린 역시 성큼성큼 빠르게 발을 떼고 있었다.

“공녀님, 이렇게까지 서두르시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아몬의 훈련이 끝나고 나서는 일정이 있다면서요.”

“그렇긴 하지만 공녀님과 이야기를 나누실 시간 정도는 있으십니다.”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말을 달리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 그대로 연무장으로 바삐 이동하던 나는 세이린의 저지에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제가 마음이 급했나 봐요.”

“아닙니다. 신경 쓰이시는 게 당연한걸요. 그래도 이제부터는 천천히 걸어가시죠.”

나는 세이린의 걱정에 다시 평소와 같은 속도로 발을 떼었다.

아몬의 훈련이 끝나고 아르반에게 생일 연회에 관해 물어볼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에게 할 이야기까지 미리 솎아둔 상태로 말을 타니 평소보다 기합이 들어가 버렸다.

‘…너무 여유가 없었네.’

세이린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르반은 아몬의 훈련을 봐준 뒤 곧장 대공저로 돌아가 검토해야 할 업무가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뇌리에 꽂혀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보니 세이린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나와 잠깐 얘기를 나눌 시간 정도는 있는 듯했다.

나는 내 보폭에 맞춰 따라 걸어주는 세이린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내 눈길을 느꼈는지 옆을 돌아보았고 이내 나와 마주 보며 웃어주었다.

나는 덩달아 미소 짓다가 어느새 연무장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아르반과 아몬을 찾아내기도 전에 아르반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왔다.

“공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날아드는 아르반의 질문에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이제는 나한테 좋은 오후라느니, 평안하셨냐 느니 하는 형식적인 인사도 안 하는 거야?’

이걸 가까워졌다고 좋아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나를 막 대하기 시작했다 여기고 지적을 해야 하나…?

아, 근데 방금 흙먼지 뒤집어쓰고 달리다 왔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에이, 그래도 전에 같이 노숙도 했던 사이인데 이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겠지.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때는 상황이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런 것도 있잖아.

나는 순식간에 머릿속을 지나치는 여러 가지 생각들에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 코앞까지 다가선 아르반은 내 태도가 의아한지 나를 지긋이 내려다봤다.

그는 공식적인 약속과 산맥에서 내려와 나를 저택에 데려다주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몸에 달라붙는 검은 상의와 핏감 있는 하의를 착용하곤 했다. 그리고 오늘 또한 마찬가지.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그는 항상 저 의상을 즐겨 입는 것 같았다.

‘아, 그게 아니라 단순히 아몬의 훈련을 봐주기 위해 편한 의상을 챙겨 입은 건가?’

“공녀?”

멀거니 그를 바라보던 나는 아르반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안녕하셨어요.”

“예. 공녀께서도 평안하셨습니까.”

당황하다 대뜸 인사를 건네니 그제야 그도 내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한 듯 고운 미간에 미세한 주름을 잡으며 묵례했다.

평소 표정 변화가 많지 않다 보니 얼굴 근육의 미미한 움직임이 유독 눈에 띄었다.

자신이 내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듯해 보였다.

그런 그의 표정에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네, 잘 지냈죠. 그리고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잠시 들렸어요.”

아르반은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 이야기가 아니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 뒤에 일정이 잡혀 있어, 양해 부탁드립니다.”

“양해는 무슨, 저희 사이에. 갑작스럽게 말씀드린 것도 저인데요. 그럼 일단 들어갈까요?”

나도 모르게 로즈니가 했던 말을 그대로 뱉었음에도 별다른 자각이 없었다.

“저희 사이… 예, 들어가시죠.”

아르반이 내 제안에 대답하기 전에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지만, 나는 어느새 곁에 다가선 아몬에게로 시선을 돌려 제대로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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