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누님께서는 이제 곧 사교계에 데뷔하신다. 그럼 비단 스승님뿐만이 아니라 다른 남자들을 만날 기회가 무수히 많아진다는 뜻이고….’
어쩌면, 그곳에서 누님의 마음에 차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실 수도 있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몬은 제 누님과 스승님이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눈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문득문득 불안을 느꼈다.
불현듯 찾아오는 그 감정은 한 번 자각할 때마다 아몬의 모든 감각과 신경을 지배해 버리곤 했다.
만약 누님께서 스승님과 관계가 발전되어 버린다면?
그래서 스승님과 결혼이라도 하시게 된다면?
아니, 비단 스승님이 아니라 다른 남자와 그리된다면….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몬은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서서히.
누님은 상냥하시니, 곧장 자신을 외면하시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조금씩, 자신이 아닌 새로운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등을 돌리시겠지.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르고 온몸의 핏기가 가실 만큼 두려웠다.
‘어쩌면 어릴 적 공작에게서 느꼈던 공포보다 그 상황이 더….’
두렵다.
여태 외면받았던 시간은 견딜 수 있었다. 언젠가 누님께서 돌아봐 주시리란 믿음이 있었으니까. 그 작은 희망으로 버텼다.
그렇지만 새로운 가정을 꾸린 누님이 차츰 등을 돌려 당신의 부군과 자식에게만 충실한 모습을 보이신다면?
그렇게 잊히고 버려진다면….
그때 자신의 앞에는 끝없는 나락만이 존재하겠지.
이미 자신은 누님의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그 달콤하고 포근한 감각을 알아버렸다.
만약 삭막하고 건조하기 그지없는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아몬은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누님께서 어떤 남자도 만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말도 안 되는 과욕이란 사실 또한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다.
‘가문의 후계이신 누님이 결혼하지 않는다는 전제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몬은 간혹 패륜적인 망상을 할 때가 있었다.
만약 자신이 공작가의 후계자가 된다면, 그렇다면 누님께서는 반드시 결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된다면 누님께서는 계속 공작저에 머물며 여생을 보내실 수 있고, 자신은 그런 누님의 곁에서 앞으로도 쭉 귀염받을 수 있을 터였다.
또다시 치고 올라오는 허튼 생각에 아몬은 속으로 실소하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디작은 손. 제가 가녀리다 여기는 누님보다도 가느다란 손목.
후계자의 자리를 두고 형제자매끼리 경쟁하는 것도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가능한 이야기다.
누님께는 그녀를 확고히 지지하는 공작이 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생각하더라도 자신은 너무 어렸다.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이 이토록 분통 터지는 일이라는 것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고배였다.
‘아냐. 어리다는 사실에는 오히려 감사해야겠지. 이런 모습이니 누님께서 동정을 품고 나를 거둬주신 건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몬이 작위 따위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누님의 일그러진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
그게 자신으로 인해 짓는 표정이라면 더욱이.
그러니 만약 작위를 탐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한들, 아몬은 지금처럼 그저 누님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동생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결국 나는 미움받는 것이 두려워 누님께서 결혼하실 때도, 혹은… 나를 다시 내치려 하실 때도 말 잘 드는 개처럼 순종하기만 하겠지.’
아몬은 또다시 자신을 비웃었다. 한심하다.
“…아몬, 아몬.”
그러다 귓가를 스치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
“참,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 바로 앞에서 부르는데도 못 알아듣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픽 웃는 누님의 모습에 아몬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누님께서 바로 앞에 계시는데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죄, 죄송….”
“아냐. 그런 것보다, 우리 아몬이 처음으로 가보고 싶다고 한 곳인데 내가 어떻게든 들어줘야지. 근데 조금만 기다려줘.”
아몬은 재빨리 누님께 사과드리려 했지만 리엘리가 말하는 게 더 빨랐다.
그녀는 아몬의 파티에 참석해 보고 싶다는 소망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일반적인 파티나 연회에는 너랑 참석하기 쉽지 않을 거야.”
그리 말하며 리엘리는 고민에 잠겼다.
사실 설명은 이렇게 했지만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시점에서 아몬이나 자신이나 별다른 점은 없었다.
“내가 어떻게든 꼭 너랑 같이 참석할 기회를 마련해 볼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저는 그냥….”
“아냐. 네 말을 들으니까 나도 가고 싶어졌어. 너랑 같이 파티에서 춤춰보고 싶다.”
분명 재밌을 거야.
리엘리는 해사하게 웃었다.
아몬은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답게 미소 짓는 누님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이렇게 누님의 웃는 얼굴을 마주할 때면, 제 안에 가득 쌓여 있는 근심과 걱정들이 한순간이나마 잊히곤 했다.
아몬은 옅게 웃었다.
‘역시, 누님께서 제 곁에만 계셔주셨으면 좋겠어요.’
***
나는 커다란 쿠션에 몸을 기대고 편하게 누워 뒹굴거렸다.
“하아….”
그리고 벌써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토해내는데, 품에 안겨 있던 율렌이 발작하듯이 파드득 튀었다.
“뭐, 뭐야!”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율렌을 바라봤다.
그러자 동글동글한 눈을 한껏 치켜뜬 율렌이 불만이 한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 좀 해!! 대체 몇 번째 한숨인지 알긴 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모르겠다.
하지만 몇 번인지 모를 뿐 굉장히 많이 했다는 것만은 분명했기에 곧장 사과했다.
“미안. 고민거리가 좀 있어서.”
“그럼 차라리 말을 해! 혼자 한숨만 쉬고 있지 말고! 얼마나 신경 쓰이는 줄 알아?”
맞는 말이었다.
내가 왜 혼자서만 끙끙 앓고 있었던 거지? 율렌이 있는데.
“나 고민거리가 있어.”
나는 마치 율렌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즉각 입을 열었다.
그러자 녀석이 빽, 소리치듯 대답했다.
“나도 알아! 방금 엘리 네 입으로 말했잖아!”
짜증을 내면서도 내 품에서 벗어나지는 않는 율렌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율렌의 빠른 마력 회복을 위해 방에 있는 동안은 항상 품에 끼고 살다시피 해서 그런지 이제는 서로 붙어있게 익숙해졌다.
“응, 그래. 하여튼 나 아몬한테 약속한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게 좀 걱정이 되네.”
아몬 앞에서야 호언장담해두었다지만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나야 아몬과 파티에 가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환영할 일이다.
다만 아이를 데리고 참석할 수 있는 파티가 있기는 한 건지부터가 내 근본적인 걱정의 원인이었다.
귀족들의 사교 파티는 단순히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자리가 아니니까.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이득을 취하기 위해 몰려드는 공간에 아이를 데리고 간다면 어떤 말이 나돌지는 뻔한 일이다.
나 혼자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나는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지고자 하는 마음이 전무했기에 풍문 하나하나에 반응해줄 생각이 없으니까.
하지만 아몬의 문제라면 다르다.
나는 그 작은 아이가 벌써부터 좋지 않은 소문의 주체가 되기를 원치는 않았다.
“뭔데? 말을 해야 알지.”
“…내가 아몬한테 같이 파티에 참석하자고 약속을 했거든.”
사실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에게 내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켜야만 하는 법이다.
그 어린것에게 기대와 희망을 잔뜩 불어넣어 놓고는 풍선처럼 한순간에 뻥-터트려 버릴 생각이 아니고서야.
“근데? 그게 뭐가 문제야.”
작게 날개를 펄럭이며 율렌이 심드렁히 말했다.
나는 율렌의 날갯짓에 의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무시하며 대답했다.
“하아… 그거 자체가 문제야. 너도 알고 있잖아.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아이를 사교계에 데리고 가면 어떤 꼴이 벌어질지.”
“아아….”
내가 다시 한숨을 뱉으며 말하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린 율렌이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모로 기울이며 뭐가 문제냐는 듯이 물었다.
“그래도 문제 될 건 없지 않나? 엘리 너는 공녀잖아. 너보다 신분 낮은 귀족들만 추려서 네 이름으로 파티를 열어.”
“어….”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이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아니면 그 애의 생일까지 기다려보던가. 내가 있을 때는 데뷔탕트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생일 파티 정도는 많이 했었는데. 요즘은 아닌가?”
그 말에 순간 솔깃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날은 공작부인의 기일이기도 해. 아마 공작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냥 무시하고 내 선에서 파티를 열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 괜히 여기저기서 더 말이 많아질 수도 있다.
“난 그 애가 욕먹는 게 싫어. 그게 생일날이라면 더욱더 사양이고. …하지만 지나친 욕심이겠지.”
“뒷말이 나오는 게 싫어서 그래?”
“그래.”
“그럼 뒷말을 하는 이들은 모조리 귀족 모독죄로 엄벌에 처한다고 엄포를 내리는 건 어때?”
하위 귀족들만 불러 모은다면 가능할 거야.
그리 덧붙인 율렌은 내 고민을 해결했다는 기쁨 때문인지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러나 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이 화상아. 지금 그거 협박하라는 거거든?
확실히 이 제국에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법이 존재하긴 했다.
지위가 높은 귀족이 지위가 낮은 귀족에게 모독죄를 적용할 수 있는 경우가.
하지만 나도 자세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고, 또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니. 됐어. 너한테 말한 내가 바보다….”
“뭐? 바보? 지금 너 나 무시하는 거야?!”
“내가 바보라고. 너 말고, 나!”
“아무튼! 그게 싫으면 다른 방법도 생각해 봤는데, 됐어! 말 안 해줄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빨리 말해봐. 뭔데? 알기라도 하자.”
나는 궁금증에 율렌을 붙들고 옆으로 돌아누워 작은 몸을 잡고 보채듯이 흔들었다.
“아, 하지 마!”
“그러니까 뭔데. 말해보라니까?”
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짤짤 흔들어대자 녀석이 진저리를 쳤다.
그러다 잠깐 손을 놓자 쏜살같이 튀어 나가 내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은 율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으…. 다른 인간의 신분을 하나 구해다가 그 인간 행세를 시켜서 파티에 들여.”
“…너 지금 나랑 장난하니?”
나는 말 같지 않은 율렌의 의견에 인상을 쓰며 질책했다.
그러자 율렌이 커다란 황금빛 눈동자를 가늘게 좁히며 못마땅한 어조로 답했다.
“그러니까 방에 오래 붙어있으란 말이야. 내가 마력만 되찾으면 아몬인가 뭔가 하는 네 동생, 폴리모프시켜 줄게.”
“폴리모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