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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63화 (63/153)

<63화.>

“저, 여러모로 생각을 많이 해봤지만… 아니에요. 누나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장소는 아무래도 좋아요.”

나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작스럽게 망설이는 아몬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우리 아몬이 여태 이렇게 어물쩍 넘긴 적이 없는데….’

필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 듯했다.

“어디에 가보고 싶어서 그래? 누나가 다 들어줄게. 말만 해 봐.”

까짓거 외국 여행이나 황성 구경이 하고 싶다고 해도 어떻게든 시켜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로베르 공작가의 공녀인 내게 그 정도의 권력과 재력은 차고도 넘쳤으니까.

물론 외국으로 향한다고 하면 이번에야말로 공작이 불같이 날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드니 충동적으로 정말 그래 보고 싶기도 했다.

아빠와 닮은 모습도, 어딘가 이상하게만 보이던 모습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소리치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본다면 공작에게 덧씌워진 아빠의 그림자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잠시 공작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우물쭈물하고 있던 아몬이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와 쓸데없는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말 별것 아니에요. 좀 허무맹랑한 말씀을 드리려 한 거라… 잊어주세요.”

부끄러운지 마주했던 슬쩍 눈길을 피하며 작게 웅얼거리는 아몬을 보고,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게 말로만 들었던 애교인가!

세상에, 우리 애가! 비록 티도 안 나게, 아주 약간 말을 늘인 것뿐이었지만 내게는 아주 크게 다가왔다.

나는 아몬 쪽으로 몸을 붙이며 아이의 찰떡같은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흥분해서 너무 덥석 잡지 않기 위해 나름의 조절을 했음에도 아몬은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몬. 누나 믿지?”

“네. 물론이죠.”

내 뜬금없는 발언에도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대답한 아몬이었지만, 여전히 크게 뜨고 있던 눈은 나를 회피했다.

나는 그에 굴하지 않고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하며 아이에게 말했다.

“그럼 누나 믿고 말해줘.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네가 말한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 실현해 줄게.”

너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니.

고작 어딜 함께 가는 것조차 못 해줄 리가.

지금 내 기분 같아서는 아몬이 옆 나라 왕실에 쳐들어가 왕좌에 앉아보고 싶다 말하더라도 어떻게든 이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결연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여전히 내게 얼굴이 잡혀있던 아몬이 눈동자만 굴려 나를 바라봤다.

하얀 도화지에 붉은색과 분홍색 물감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색을 칠한 것처럼 곱고 수줍은 빛깔로 물들어 있는 아몬의 뺨이 내 손에까지 따스한 온기를 선사해 주었다.

“…그냥 듣고 잊어주세요.”

잊긴 뭘 잊어. 머릿속에 확실히 박아두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데려가 줄게-. 말만 해봐.

속으로는 적극적으로 대답했지만 생각한 대로 뱉어냈다간 아몬이 기겁할지도 모른다.

나는 최대한 정제된 언어를 골라 대답했다.

“네가 어떤 곳을 가고 싶다 해도 놀라지 않을게. 설령 황제의 침실이라고 해도.”

말하고 보니 이건 좀 곤란하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웃어 보였다.

아몬이 만약에 황제의 침실같이 삼엄한 보안을 유지하는 곳을 가 보고 싶어 한다면 마법 외에 의지할 길이 없었다.

‘율렌, 믿는다. 급속충전기가 매일 안고 다녀줄게.’

입가에 웃음을 내건 채 율렌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몬은 여전히 수줍어하는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누나와 함께 파티에 참석해 보고 싶어요. 누나를 에스코트해드리고… 함께 춤을 추는 파트너로서.”

“…파트너?”

솔직히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이었다.

***

목이 탔다. 아몬은 마른침을 삼키며 누님의 얼굴을 살폈다.

부탁드리면서도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입 밖으로 냈다는 것을.

아몬은 누님이 처음 제게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해 두라 언급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고민했다.

사실 누님과 가고 싶은 곳을 말하는 것보다 가보고 싶지 않은 곳을 셈하는 쪽이 빠를 것 같았다.

그만큼 아몬은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았고, 할 수만 있다면 당연하게도 누님과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누님께서 다음을 기약해 주셨다 해도 과욕을 부리면 안 돼.’

특히나 누님의 농담처럼 정말 황제의 침실을 방문해보고 싶다든가 하는 종류의 무리한 요구는 절대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이야 누님께서 자신을 어여삐 여겨주셔 이곳저곳을 함께 방문하며 어울려 주실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러겠지. 누님께서는 나를 아끼고 계시니까.’

하지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열 번이 되고, 또 스무 번이 되면… 누님은 자신을 귀찮은 존재라 여기실 것이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누님께서 자신을 귀찮은 짐 덩어리라 생각하는 상황까지 치닫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아몬은 지금의 누님이 자신을 상당히 아껴주고 애정을 쏟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는 만큼, 누님의 관심을 잃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애초부터 몰랐다면 괜찮았을까.’

그마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은 나약한 존재이니, 아마 언젠가는 서서히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의 자신에게서 누님은 제 신체의 일부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만큼 중요하고, 또 항시 필요로 하는 존재.

아몬은 입안의 여린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너무 어리석은 말을 입 밖으로 냈어. 정도껏 했어야 하는데….’

안일한 부탁을 내뱉고는 곧장 후회했다.

누님께서 궁금해하셨다 한들 제가 잘 조절해서 말을 아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농담이었다고 말할까.’

한동안 누님께서 오냐오냐하고 귀여워해 주시니 배가 부르다 못해 터져버린 모양이다.

‘차라리 그냥 끝까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잡아뗄 것을….’

아몬은 지나치게 제 누님에게 약했다.

사실 아몬이 영 불가능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데뷔탕트 이후 사교계에 발을 들이는 것은 그저 관습일 뿐이었으니까.

만약 아몬이 지금 당장 누님의 손을 잡고 무도회에 참석한다 해도 그걸 막을 사람은 가문의 어른, 루퍼스 로베르 공작 외에는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다만 가능하다고 해서 정말 그걸 실현하려는 사람이 없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나이가 차지 않은 상태로 공식적인 사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되바라졌는지를 만천하에 공개함과 다름이 없다.

아직 예절 선생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궁금한 점이 많았기에 직접 찾아보았다.

‘책에서 서술한 바를 토대로 봤을 때 보수적이고 원칙을 중시하는 사교계의 특성상 틀림없겠지.’

또한 그 파트너 역시 구설에 오르내리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오죽 파트너로 삼을 사람이 없어서 데뷔조차 못 한 동생을 이끌고 파티에 참석했느냐며 비웃음을 사겠지.

아몬은 그런 시궁창과 같은 상황에 누님을 밀어 넣을 생각이 없었다.

“나랑 같이 파티에 참석하고 싶니?”

아몬이 후회로 점철된 복잡한 머릿속의 정리를 마치기 전에 리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상념에 빠져있던 아몬은 그제야 누님을 마주 보았다.

제 발언에 놀란 듯 약간 커졌던 그녀의 눈이 평상시처럼 돌아와 있었다.

최근에는 항상 마주할 수 있었던 다정한 웃음 또한 여느 때와 같이 누님의 입꼬리에 걸려있다.

다행이다. 아몬은 작게 안도했다.

지나치게 방자해 보여 누님의 표정을 찌푸리게 했다면 죄책감과 불안함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아몬, 네가 원하는 게 나랑 같이 파티에 참석하는 거라면 누나가 그 정도도 못 들어 줄 것 같니?”

리엘리는 약간은 장난기가 섞인 낯으로 미소 지었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부디 실언이었다 여기시고 잊어주세요.”

아몬은 약간 불안한 심정을 누르며 누님께 말했다.

어쩌면 누님은 정말 제가 바라는 바를 이루어 주겠다고 자신을 이끌고 연회장에 입장하실 수도 있다.

여태까지 자신이 봐왔던 누님이라면 그러고도 남으시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상황을 바라고 말씀드린 건 아니었는데….’

분명 누님을 에스코트하여 사교계에 발을 들이고 싶은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건 누구나 한 번쯤 머릿속에 그려보는 허무맹랑한 망상일 뿐이었다.

또한, 아몬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는 그저 어린아이가 화려한 사교계를 동경하는 마음과는 달랐다.

아몬이 리엘리의 파트너로 서고 싶은 이유는 매우 단순하고도 명료했다.

그리한다면 누님에게 접근하는 모든 남자들을 자신의 선에서 쳐낼 수 있을 테니까.

‘…제가 바라는 건 그저 누님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아닙니다.’

아몬은 마음 같아선 누님의 데뷔탕트를 시작으로 뒤이어질 모든 사교 행사에 그녀의 파트너로서 참석하고 싶었다.

그리한다면 다른 이들이 누님께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을 테니까.

또한 그건 아몬이 현재로서 가장 바라마지않는 소망이기도 했다.

누님께서 오직 자신만을 바라봐 주시는 것.

하지만 아몬은 속내를 삼켰다.

이런 말을 뱉었다간 누님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실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찌 보면 단순히 파티에서 춤을 추고 싶다거나 무도회에 참석하여 멋진 옷을 입고 우아하게 와인을 마셔보고 싶다는 등의 어린아이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환상이 자신의 망상보다 덜 유치할지도 모르겠다.

‘누님께서 귀엽게 여겨 주신다고 내가 진짜 보통의 어린아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아몬은 자신을 향해 비소 지었다.

유치하기가 막 바닥을 기어 다니는 어린것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아몬은 자신의 잊어달라는 말에 고양이처럼 바짝 올라간 눈매를 접어 웃는 누님의 표정을 보고-, 마음속에 수장시키고자 했던 생각이 재차 부상하려 함을 감지했다.

누님이 웃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따라 미소 짓던 아몬은 자꾸 뇌리를 스치는 생각을 쳐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생각은 제 안에서 피어나는 불안과 초조함의 근원이었으니, 지워내려 노력해도 할 수 없음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르반 카넬로웰.

이제는 제 스승이 된 그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 아몬은 당시 제 기분이 왜 그리도 가라앉았었는지를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됐다.

질투. 누님께서 아시게 된다면 자신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내치셔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추악한 감정이었다.

아몬은 자신이 이러한 감정을 품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충격 또한 컸다.

그러나 한 번 자각한 감정은 금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부피를 불려갔다.

그건 곧 커다란 불안이 되어 아몬을 짓눌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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