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미묘하게 태도가 달라진 로즈니를 의아하게 여긴 세이린이 그녀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리엘리에게 말을 걸었다.
“초대장을 받게 되시고, 만약 공녀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에스코트는 제가 해드리고 싶습니다.”
자신과 함께한다면 또 이상한 소문이 나돌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공녀 홀로 연회에 참석하기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세이린은 생각했다.
그녀가 연회에 참석하는 사실만으로 그 파장은 엄청날 것이다.
‘애초에 사교계에 데뷔조차 하지 않은 공녀님이 연회에 참석한다면 누구나 두 분의 사이를 의심하겠지.’
그런 공녀의 옆을 지키는 이가 항상 주군의 보좌관으로 파트너의 자리를 차지하던 자신이라면, 더더욱.
사실 두 사람을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데까지 가보자는 생각에 세이린은 남몰래 마음을 먹었다.
주군과 공녀 사이에 진척이 있을 수 있도록 자신이 약간의 도움을 주자고.
이러한 세이린의 생각을 까맣게 모르는 리엘리가 눈을 반짝였다.
‘역시 세이린 밖에 없어! 내가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아 안면 있는 영식이 전혀 없음을 알고서 배려해주는 거구나.’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괜찮다마다요! 정말 감사하죠.”
어차피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이라면 세이린과 가는 편이 자신으로서도 더 좋았다.
싱글벙글 웃으며 세이린에게 대답한 리엘리는 로즈니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로즈니, 혹시 아델 경이 입을 연회복도 같이 만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오히려 제 쪽에서 먼저 말씀드리려 한걸요. 맡겨 주시면 그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답니다.”
어린아이처럼 들떠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 로즈니가 눈을 빛냈다.
그녀는 생경하지만 자신을 흥분시키는 감각에 눈을 가늘게 떴다. 고양감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로즈니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이 순간을 망막에 새겨 넣듯, 한참 동안 둘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런 걸 두고 흔히들 뮤즈라고 칭하는 것이겠지.
직접 접하기 전까지는 그저 그런 것이 있다고만 생각하며 가벼이 여겼는데, 하마터면 이렇게 설레고 기분 좋은 고동을 모르고 살아갈 뻔했다.
눈 부신 햇살을 맞으며 그야말로 태양의 화신처럼 반짝이는 리엘리와 그 옆을 지키는 고귀한 모습의 기사, 세이린.
그 둘의 형상은 로즈니의 뇌리에 깊숙이 파고들어 한참 동안 그 잔상을 남겼다.
***
나는 세이린과 로즈니와의 대화를 틈틈이 곱씹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깜깜한 정원을 밝히는 램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약간 뒤숭숭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생각도 정리할 겸, 직접 카모마일 티를 두잔 준비해 아몬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제가 들겠습니다.”
이 시간에 아몬의 방을 방문하면 늘 나를 반기는 것은 아몬의 전속 시종, 릭이었다.
“아냐. 이 정도는 내가 들 수 있으니까 자리 좀 피해줄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 가보겠습니다.”
에드가 역시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지만 릭은 그보다 더 눈치가 빨랐기에 나는 내심 그가 마음에 들었다.
“누나, 이쪽으로 앉으세요.”
“응. 고마워.”
나는 아몬이 이끄는 대로 통유리로 된 커다란 창문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두고 앉았다.
내가 가끔 이렇게 찾아오면 가까운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새로 들인 테이블이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 자기 전에 같이 차나 한잔 들까 해서 왔어.”
“다른 사용인을 부르지 그러셨어요. 물론 직접 차를 내와 주신 건 감사하지만, 누나가 이런 허드렛일을 하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몬의 보랏빛 홍채가 조명의 불빛을 머금어 평소보다 밝은색을 띠고 있었다.
조금씩 내게 제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 아이의 모습에 괜스레 가슴이 찡해졌다.
“생각할 게 조금 있어서, 그래서 그랬어. 혼자 걷고 싶기도 하고… 너랑 얘기도 하고 싶어서. 겸사겸사.”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말씀해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대책을 강구해 볼게요.”
아몬이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입술을 꾹 다물고 나를 직시해왔다.
나는 그런 아몬의 모습에 울렁이기 시작한 가슴을 다스리고자 찻잔을 들어 올렸다.
파문이 일어난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신경 쓰며 가볍게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천천히 잔을 내려놓으며 찻물에 비친 내 얼굴이 요동치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열 살도 안 된 작은 아이가 저렇게 믿음직스러운 말을 하다니.
문득 기대고 싶어지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나는 찻잔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어쩜 저렇게 감동적인 말을 하는지….’
참 바르게 자랐다.
아이가 이만큼 자라기까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은 경험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서글플 만큼.
아몬은 역시 원작의 남주이기 때문인지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비단 육체적인 능력을 넘어 이렇게 감성적인 부분에서도 툭, 하고 허를 찌르고 들어오곤 했다.
“누나?”
한참 찻잔을 들고 움직임이 없는 내 모습이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다.
물끄러미 나를 살피던 아몬이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나를 불러왔다.
“…응, 아냐. 별건 아니고, 요즘 안 하던 운동을 하려니 피곤해서 그래.”
같잖은 변명을 하며 설핏 웃어 보였다.
사실 정말로 큰 고민거리를 안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르반이 내게 제 생일 파티에 대해서 일언반구조차 없었다는 점이 서운한 것뿐이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평온한 일상에 물들어가고 있던 내게는 상당한 타격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아몬이 약간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변성기가 오지 않은 깨끗한 소년의 미성이 탁하게 가라앉자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나는 괜스레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어쩌지, 아무래도 걱정거리를 숨기는 듯한 모양새가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몬의 앞에서 ‘친한 사람 때문에 생긴 서운한 마음이 네 말을 듣고 폭발해서 울 뻔했지 뭐야.’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친한 사람이라. 그러고 보니….’
아몬에게는 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교류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갑작스레 떠오른 그 생각에 나는 작게 탄식을 흘렸다.
“아….”
내 곁에는 벌써 세이린과 로즈니라는 든든한 친구들이 둘이나 존재했다.
하지만 아몬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여전히 나밖에 없었다.
아르반과도 아직 딱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해 보이는 데다가, 보다 가까운 곳에서 아몬을 돌보는 릭과 에드가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나와 에바, 세바니와 같은 친근한 관계라기보다 정석적인 도련님과 시중인의 관계로만 보였다.
‘내가 사교계에 데뷔하고, 그 후에 아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면 아몬 또래의 귀족가 아이를 소개받으려고 했었는데….’
불현듯, 전에 세이린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분명 아몬과 비슷한 나이대의 동생이 하나 있다고 했었는데, 소개받을 수는 없을까.’
어느새 울컥했던 감정은 증발해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아몬의 인간관계에 대한 걱정이었다.
“아몬, 집에서 이렇게 수업만 받고 나랑 얘기만 하는 게 지루하지는 않니?”
한국에서라면 열하나, 내지 열둘 정도가 되었을 아이였다.
한창 뛰어놀아도 체력이 남아돌고 집에 있기보다는 친구들과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할 나이.
이제는 슬슬 새로운 일상에 적응해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싫증을 느낀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지루하다니, 그렇게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제겐 지금 누나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가장 값지고 만족스러운걸요.”
“아몬….”
그건 네가 정말 즐거운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리 말할 수 없었다.
아몬은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 다른 사람과 놀러 다니거나 자유로이 돌아다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아직 그러한 종류의 즐거움을 깨우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세상에는 나랑 산책하고 차를 마시는 일보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 수두룩하니 널려있다는걸.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누나가 기분이 좋네.”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내 웃음에 마찬가지로 잔잔한 웃음을 입에 건 아몬의 얼굴을 찬찬히, 하나하나 뜯어보며 잠시 감상에 젖어 들었다.
아이의 진심 어린 애정이 담긴 말을 듣고도 감동하지 않고 배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수나 있을까.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 아닌 나조차 아몬의 진심 어린 한마디에 이리도 마음이 술렁거리는데.
이곳이 한국처럼 치안이 좋거나 놀거리가 많았다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 당장 네 손을 잡고 나가 유원지나 동물원, 수족관, 하다못해 바닷가라도 데려가 주었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혼자 아쉬움을 삼키는데, 문득 전에 꿈속에서 보았던 호수의 존재가 떠올랐다.
워낙 특색이 있는 호수다 보니 조금 알아둔 바가 있었다.
‘햇빛을 받으면 은보라빛으로 빛나고,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꿈에서 본 것 같이 짙은 보랏빛이라고 했지.’
나들이를 하기에 썩 나쁘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칼리온 호수라는 정식 명칭이 존재하지만 다들 은보라 호수라 부른다고 했다.
공작가의 가족묘 인근이라는 사실이 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은보랏빛으로 반짝이는 호수의 전경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 일단 거기라도 놀러 가보자. 사유지니까 안전 문제도 없고 괜찮을 것이다.
“…있지, 아몬.”
“네, 말씀하세요.”
“내가 전에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해 두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우리 둘이 처음으로 외출했던 날 말이야.”
“누나가 하신 말씀인데 잊어버릴 리가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몬은 망설임 없이 내가 묻는 말에 답해왔다.
그럼 벌써 다음 외출 때 가고 싶은 곳을 정해둔 걸까?
“그래? 그럼 생각해 둔 곳이 어디야?”
궁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어디일까? 교양서적을 많이 보는 듯했으니 도서관이나 미술관? 아니면 오페라 하우스?
아몬이 나보다 한참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명료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떠오르는 곳은 죄다 어린아이와는 동떨어진 곳들이다.
좀 어이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평소 내가 알고 있는 아몬이라면 저곳 중 하나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내 안에 구축된 아몬의 이미지가 그랬다.
내가 생각하는 아몬이란 아이는 누구보다 말을 잘 듣고 손이 가지 않는 아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 신경을 쓰고 섬세하게, 조심스레 대해야 하는 존재였다.
특히나 소설에서 묘사되었던 남자 주인공, 아몬 로베르와 지금 내 동생으로서 존재하는 아몬의 행동거지가 조금 닮아있었기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지금의 아몬이라면 원작에서와같이 엇나갈 일은 없으리라 여기면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원작의 아몬 로베르가 떠오르곤 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몬의 입술을 주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굳게 닫혀있던 아몬의 입술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