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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61화 (61/153)

61화.

***

리엘리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세이린과 로즈니는 알았다.

그녀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것을.

격하게 치밀어 오르던 감정을 갈무리하는 데 성공한 세이린은 리엘리로 인해 적잖이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귀여우신 분이라니까.’

이러니 공녀의 앞에 서면 항상 저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된다.

잔뜩 경직된 눈매로 한쪽 입꼬리만 비정상적일 만큼 끌어올려 웃는 리엘리의 모습은 살벌하고 이상해 보였다.

하지만 눈에 콩깍지가 씐 세이린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귀엽다 여기며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각하의 탄신일에 축하해 드리러 가지 못하셔서 서운하신가요?”

매우 직설적인 세이린의 질문에 리엘리는 물론이요, 그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즈니의 동공 역시 양껏 확장되었다.

리엘리는 제 본심을 간파해낸 세이린의 말에 놀라서였고, 로즈니는 세이린의 질문에서 유추한 남녀 사이의 애정 문제에 흥미가 동했기 때문이었다.

로즈니는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리엘리를 바라봤다.

잠시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던지라, 이런 흥미로운 주제로 탈바꿈한 현 상황이 매우 기껍게 다가왔다.

반면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한 티를 있는 대로 다 내고 있던 리엘리는 입만 붕어처럼 뻐끔거리다가 속삭이듯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저는 이제 각하랑도 많이 만나 뵈었고… 저희 아몬의 스승이시기도 한데 아무리 형식적인 자리라고는 하지만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려서….”

변명거리를 줄줄 읊어대던 리엘리는 종국에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리엘리는 삽시간에 열이 몰린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자괴감에 젖어 들었다.

정말이지, 살다 살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날이 올 줄이야.

손등을 타고 전해지는 열기가 불이 붙은 듯이 이글거리는 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듯했다.

그런 리엘리를 바라보던 세이린이 말했다.

“앞서 설명해 드린 대로 돌아가는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각하께서 공녀님을 초대하지 않으셨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가요?”

“예. 각하께서는 공녀님이 쓸데없는 풍문에 휘말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

그렇겠지. 사실 리엘리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이게 남의 일이 아닌 나 자신의 일이다 보니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리엘리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둘을 살펴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이번에는 로즈니가 제 의견을 꺼냈다.

“제 생각에도 그래요. 공녀님께서는 다른 약혼자가 계신 것도 아닌데 이번 대공 각하의 탄신 연회에 참석한다면 분명 염문을 피할 수 없겠죠.”

“맞습니다. 각하께서는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공녀님을 초대하지 않으신 것이 분명해요.”

로즈니의 주장에 세이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 힘을 실어주었다.

그녀들은 유심히 리엘리의 표정을 살폈다.

경직돼 보이던 아까보다는 다소 풀어져 보이는 모습에 둘은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세이린은 아직도 약간 불그스름한 리엘리의 뺨을 바라봤다.

공녀님께서 제법 귀여운 고민을 하고 계셨지만 굳이 황제가 깔아놓은 판 위에서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와 제 주군이 잘 풀려서 약혼하게 된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란 생각 또한 들었다.

‘로베르 공작가의 가세는 황제라 하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지. 더구나 로베르 공작이라면 주군처럼 황제의 수작을 마냥 두고 볼 리도 없다.’

사실 세이린의 생각에는 가장 최선의 방향이라 할 수 있었다. 리엘리 공녀와 주군이 맺어지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주군도 지금처럼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을 터였다. 더불어 로베르 공작 역시 그를 뒷받침 해줄 테고.

“…그렇겠죠. 근데 저는 그런 소문보다 각하와 나름대로 친분이 있는데 탄신일을 챙기지 못하는 게 더 마음에 걸릴 뿐이에요.”

그냥 초대장 없이 들이닥치면 안 들여보내 주겠죠?

농담처럼 운을 뗐지만 세이린은 리엘리의 말이 진담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침울한 기색을 보이며 중얼거리는 리엘리의 모습을 눈에 담다 보니 세이린은 마음속에서 갈등이 생겼다.

제가 생각하기에 리엘리는 아직 주군에게 깊은 감정을 품은 건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더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여기서 멈추고, 이번 연회 또한 참석하지 않는 쪽이 좋다고 본다.

‘하지만 공녀님과 주군이 이루어진다면 여러모로 좋긴 하겠지.’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당사자가 상관없다며 꼭 참석하고 싶어 하는데, 자신이 그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는 걸까.

그녀는 어린애가 아니었고 자신은 이미 리엘리에게 연회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충분히 인지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리엘리는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 가득해 보였다.

‘결국 선택은 공녀님의 몫이니 지지해 주는 게 옳은 건가.’

살아오며 생사를 함께한 동료들은 넘쳐났지만, 친구라 말할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은 처음인 세이린은 짧은 순간 머리가 터져라 고민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제가 알고 있는 친구란 서로에게 조언해주고 의견을 존중하며, 잘못된 길로 빠지려 할 시 손을 내밀어 주는 존재였다.

어쩌면 자신의 생각보다 그녀의 감정이 깊어, 그 마음이 소문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섰을 수도 있다.

연애나 사랑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기에 더욱 생각이 깊어졌다.

수 초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 동안 뇌리를 스치는 수많은 고민 끝에, 세이린의 입이 열렸다.

“…공녀님께서 각하의 탄신일을 축하해 드리고 싶으신 거라면, 직접 얘기를 꺼내 보심은 어떠신가요?”

자신이 내린 결론이 옳은지 모르겠다.

아마 연회가 끝나고 리엘리의 표정을 살핀 후에야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는지, 후회가 남을 선택을 했는지 그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겠지.

세이린이 번뇌를 거듭하다 심사숙고해 뱉어낸 말에 리엘리는 귀를 쫑긋거렸다.

“그… 럴까요? 무례하게 무작정 찾아가기보다는 그게 좋을 것 같긴 한데.”

리엘리는 정말 찾아가서 얼굴만이라도 보고 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 구매해 두었던 브로치가 있었다.

미리 건네줄 수도 있지만 생일 선물이었기에 가능하면 당일에 건네주고 싶었다.

‘더군다나 생일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이 다른 의도로 참석을 한다니, 한 명쯤은 순수한 의도로 생일을 축하해 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리엘리는 그리 생각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도 아델 경의 의견에 동의해요. 이제는 정해진 틀을 깨고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피력해 나갈 수 있는 시대인걸요.”

덧붙여오는 로즈니의 의견까지 경청한 후, 리엘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음에 한 번 응어리가 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가서는 쉽사리 입을 열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힘들어진다.

쌓이고 쌓여서, 후에 폭발할 때까지.

그것을 깨닫게 된 이후부터, 리엘리는 되도록 마음에 담아두는 대신 입 밖으로 내뱉는 쪽을 택하곤 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자신의 불만을 해결해 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신이 직접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세이린의 조언 덕분에 순식간에 갈피를 잡은 리엘리는 어느새 열기가 가신 깨끗한 얼굴로 돌아와 평소와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래야겠어요. 말이라도 꺼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단호하게 말하는 리엘리를 보며 로즈니는 속으로 감탄했다.

제가 사교계에 데뷔하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자유분방한 영애는 듣도 보도 못했다.

예전부터 로즈니는 평범, 보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또한 그 때문에 항상 사교계의 이단아 취급을 받고는 했다.

남다른 취미와 취향, 그리고 여타 귀족들과 다른 직설적인 화법.

지극히 보수적이고 고루한 귀족들은 당연하게도 로즈니를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를 배척하는 여러 귀족으로 인해 로즈니는 자연스럽게 사교계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건 결국 저택에 틀어박혀 제 유일한 취미생활이던 승마에만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 우연한 기회로 의상 제작에 푹 빠져들게 되었고, 자신이 그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이 있음 또한 알게 되었다.

그 뒤, 로즈니는 취미를 살려 살롱을 오픈했다.

그러자 로즈니를 배척하던 사교계 인사들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승냥이 떼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백작가의 둘째이자 장녀가 겨우 하급 귀족, 혹은 평민들이나 할법한 일을 한다고 비웃으며 그녀를 조롱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로즈니의 살롱은 많은 귀족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나날이 방문객이 늘어만 갔다.

그들은 여전히 로즈니 멜라니스라는 존재를 업신여겼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그녀가 만든 드레스에는 열광했다.

그러나 로즈니는 어째선지 착착 쌓여가는 주문서들을 바라보며 점점 의욕을 잃어갔다.

그것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왜일까….’

로즈니 본인도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처럼 즐겁지 않았다. 만들고 싶다는 생각 역시 들지 않는다.

단순히 흥미가 떨어져 버린 걸까.

‘그럴지도.’

로즈니는 그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참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다.

다만 한 번 푹 빠진 것에 대해서는 한없이 갈망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승마를 통해 자신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 일을 사랑하고 열중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었다.

어쩌면 영애들과 귀부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 깊숙한 곳에 틀어 밝혀진 멸시의 감정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쳐 버린 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로즈니는 제 일에 대해 상당한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리엘리 로베르 공녀가 그녀의 살롱을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 나온 김에 내일 각하께서 방문하시면 바로 물어볼게요.”

결의에 가득 찬 리엘리의 얼굴에 여태 근심으로 가득해 보이던 세이린의 표정이 사르르 풀리며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로즈니는 그 둘의 모습을 붉은 눈동자에 한가득 담으며 생각했다.

‘아, 저 두 사람을 위한 의상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랐다. 막연하게 어떤 옷을 만들어 보고 싶다 여긴 적은 많았다.

하지만 사람을 보고 그들이 걸치고 있는 옷이 내가 만든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단언컨대 해본 적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로즈니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로즈니는 그런 제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공녀님께서 각하의 초대를 받고 연회에 참석하게 되시면, 공녀님께서 입으실 드레스는 제가 준비해드리고 싶어요.”

“그래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죠.”

리엘리는 로즈니의 제안이 기뻐 치켜 올라간 눈매를 둥글게 접어 환하게 웃었다.

로즈니는 그런 리엘리의 모습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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