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여느 때와 같던 전장의 한복판.
일대가 대규모 화염 마법으로 초토화되고 또다시 날아드는 광역 화염 마법으로 인해 정신이 없는 와중, 불현듯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세이린이 뒤를 돌았을 때.
‘그자와 눈이 마주쳤지.’
황제가 보내준 지원군 중 하나였던 마법사는 모든 마법사가 광역 마법을 펼치는 가운데 홀로 아주 작은 화염의 화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세이린은 마법사의 암살 시도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낌새를 감지하고 뒤를 도는 순간, 이미 몸을 움직여 단번에 그자의 목을 쳐내 버린 아르반으로 인해서.
암살을 시도한 마법사가 발현했던 마법은 그대로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적의 몸뚱이에 쑤셔박혔다.
그 마법을 맞은 인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까맣게 타들어 가는 모습을, 세이린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모두 지켜보았다.
그녀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아르반이 세이린에게 선수를 쳐 명했다.
“함구해라. 말이 돌아봐야 좋을 게 없다.”
그에 세이린은 무어라 질문하는 대신 검을 들었다. 전장에서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 뒤로도 세이린은 임시 막사로 귀환하기 전까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이제는 모를 수 없게 되었다.
‘황제가 주군을 눈에 가시 정도로 여기는 것이 아닌, 제거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주군에게 그 일에 대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시 한번 사건이 터졌다.
전장이 일단락되고 마법사들과 황제 측 지원군들 사이에서 원성이 빗발친 것이다.
그들은 대공이 살육에 미쳐 피를 보면 피아 구분을 하지 못해 아군마저 죽이려 든다는 둥 헛소문을 퍼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황제 측 지원군의 행태에 기사단원들과 병사들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한심하게 여길 뿐이었지만, 어느새 민간에는 그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 뒤였다.
그들은 모두 분노했고,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세이린 역시 그들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황제 측 지휘관과 마법사들은 총사령관인 대공이 횡포를 부려 그저 실수를 저지른 마법사를 즉결 처형했다고 주장하기만 했다.
아르반 카넬로웰은 그들의 주장에 친절히 해명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벌레가 날아들기 전에 제거한 것뿐이니,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겠다. 이런 내 밑에서 싸우고 싶지 않다면 이만 돌아가 보도록.”
그는 황제가 지휘관이랍시고 발탁하여 제 앞에 서 있는 오합지졸들을 표정 없는 낯으로 훑었다.
“사실 전부터 자네들이 사라져줬으면 했거든.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내가 전장의 한 가운데에 서면 아군조차 구분 못 할 만큼 미쳐 날뛴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나.”
짙은 푸른빛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그들을 훑고 지나가는 동안 입을 열 수 있을 만큼의 배짱을 가진 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니 목숨이 아까운 자들은 이만 돌아가도 좋다. 폐하께서도 그대들을 책망하지 않으실 테지.”
상당히 수치심을 자극하는 발언이었기에 그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양,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들의 태도에 세이린은 어쩌면 저들이 원하던 것은 처음부터 퇴출이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군의 이미지가 바닥을 치게 됐지.’
당시에는 속이 꽤 쓰렸지만, 후일 돌아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황실 측 지원군이 빠져나간 이후에도 그들은 연전연승을 거머쥐었고, 그로 인해 민중에 흉흉하게 퍼진 무성한 소문은 중화되어 갔다.
‘그 뒤로도 암살 시도는 틈만 나면 이뤄졌지만, 아마 내가 목격한 것이 전부가 아닐 터.’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자신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샤루스 제국의 지고한 태양, 황제.
‘전장에서 귀환하고 벌써 일 년이 넘었구나….’
생각해 보니 한동안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긴 했다.
귀환한 이후 세이린이 제 주군과 함께 참석한 연회나 파티는 모두 황제의 크고 작은 압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니.
그동안 잠잠했으니 큰 게 하나 터질 때가 되었긴 했다.
‘아직도 주군께서 왜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시는지를 모르겠어.’
아니, 아니다. 분명 모종의 이유가 있겠지. 다만 제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세이린은 한순간 비집고 나온 의문을 누르며 자신을 다독이려 했지만,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아르반 카넬로웰의 죽음을 바라며 대놓고 위협을 가해오는 황제, 그리고 그러한 황제의 만행에도 이를 드러내지 않고 침묵을 일관하는 주군.
세이린의 마음에서는 주군을 향한 답답함과 황제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늘어났고, 지금 리엘리의 말을 기점으로 폭발해 버렸다.
“저도… 솔직히 이해되질 않습니다. 각하께서 왜 이렇게까지 황제에게 숙여주시는 건지.”
아무리 사적인 자리라 한들 황제에게 경칭 붙이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세이린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여태 눌러 참던 감정들이 화산처럼 터져 나와 그녀 자신으로서도 수습할 도리가 없을 만큼 흘러넘쳤다.
***
나는 얼음 조각처럼 굳어진 세이린의 얼굴을 보고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내 앞에서는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저런 무서운 표정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세이린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상황을 건너 들은 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열이 날 지경인데, 그녀의 심정은 어떨까.
항상 미소를 그리던 그녀의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다물려져 있다.
그런 세이린의 모습에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달싹였다가 도로 다물었다.
어지간히도 기분이 상한 듯 보여 말을 걸기 조심스러웠다.
‘황제씩이나 되는 자가 조카의 생일에 저런 말 같지도 않은 초를 쳐놨다는데 기분이 좋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겠지.’
우리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세이린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서였고, 로즈니와 나는 그런 그녀를 기다려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에바를 불러 냉차를 부탁했다.
각자의 앞에 차가운 음료가 놓일 때까지도 침묵은 지속되었지만 내가 잔을 들어 입을 적실 때, 로즈니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어찌 됐든지 간에 이번 각하의 탄신 연회에는 가족을 파트너로 동반한 영애들이 대다수겠네요.”
“…네. 그렇겠죠.”
아르반의 눈에 들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다른 영식을 끼고 오는 멍청이가 존재할 리가.
그녀 딴에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꺼낸 말이었겠지만 내게는 이상하게도 탐탁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조차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속내를 누르고 대답했다.
“저는 대공비의 자리를 탐낼 정도로 야망이 넘치지는 않지만, 마땅히 에스코트를 부탁드릴 신사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오라버니께 에스코트를 부탁드렸어요.”
손으로 뺨을 감싸며 난감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문득 어떤 부분에서 내 심기가 불편해졌는지를 깨달았다.
‘아르반의 옆자리를 노리는 여자들이 한 아름 모이는 연회 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
그 사실을 인지하자 내 표정 또한 세이린 못지않게 굳어졌다.
나는 표정을 가리기 위해 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키며 단숨에 열이 오르는 속을 달랬다.
탁-
시원하게 들이킨 내가 찻잔을 맥주잔인 양 거칠게 내려놓자 둘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로즈니는 약간의 염려가 섞인 시선이었고, 세이린은 분노가 많이 가신 표정이었다.
하지만 다행이라 여길 새도 없이 온몸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 열기에 나는 다시 에바를 불러 음료의 리필을 부탁했다.
그렇게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켠 후에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목이 많이 마르셨나요?”
“네, 아뇨. 아니, 아니, 네. 좀 그러네요.”
생경한 감정에 어쩔 줄 몰라 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꽤 서늘한 날씨에 차가운 음료를 두 잔이나 마셨음에도 발끝이 간질거리는 감각은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머릿속은 다섯 살 난 아이가 잔뜩 어질러 놓은 방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 마음속에 자리 잡아버린 하나의 감정을 애써 직시했다.
‘내가 지금 그러니까, 질투하고 있는 건가?’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혼이 나갈 것만 같다.
그리고 동시에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들끓는 듯한 답답한 감각에 입안을 사리물었다.
물론 내가 그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를 좋아한다거나, 반했다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아르반과 내가 뭐 특별한 사이도 아니고 그냥 단순히 이름 좀 부르는 지인, 혹은 친구 정도의 사이인데 이런 감정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진짜.’
그냥 친밀한 사이에 서운한 일이 발생하니 그로 인해 파생된 감정이겠지.
나는 구태여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좀 아쉽네요. 저는 초대 받지 못해서 각하의 탄신일을 축하해드리지도 못하는데, 탄신 연회조차 그런 의도로 점철돼 있다니.”
말하고 나서 조금 아차 싶었다.
‘꼭 내가 초대받지 못한 사실을 서운해하는 것 같잖아.’
…물론 서운하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티 낼 생각은 없었다.
‘이게 뭐라고 이리 자존심이 상하는지….’
마치 나랑 가장 친하다 여긴 친구가 다른 애한테는 생일 초대장을 줬는데 나한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 같은 기분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물론 생일 당사자가 원치 않았던 연회라는 건 충분히 인지했다.
아르반의 입장에서는 유쾌하지 않은 자리에 굳이 날 초대할 이유가 없었을 수 있다.
그도 아니라면 황제가 초대한 수많은 영애와 마찬가지의 취급을 받을 그 구설수의 장에 나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라도, 반드시 둘 중 한 가지 이유가 맞아야 할 거야.’
만약 아니라면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니까.
‘나만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잖아. 객관적으로 따져봐도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했을 정도면 지금 상황에서 서운한 게 당연한 거지.’
나는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