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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59화 (59/153)

59화.

세이린은 무거운 목소리로 나지막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연회의 초대자 명단을 확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도 명단을 확인하고 솔직히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질 않더군요.”

“…….”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른 질문을 덧붙이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기로 했다.

“폐하께서 초대하길 권하신, 아니, 명하신 귀족들의 명단은 온통 미혼의 영애들뿐이었습니다. 그것도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들은 제외된 채로요.”

***

이 또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가 모르는 이가 없는 사실이었다.

세이린은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너무도 노골적인 황제의 의도에 넌덜머리가 났다.

‘이건 탄신 연회라는 이름의 선발식에 불과한 것을….’

그것도 진짜 대공비의 자리를 채워주기 위함이 아닌, 멸시의 의미가 듬뿍 담긴 악의적인 조롱.

‘이번 일로 가신들 사이에서 큰 파란이 일었지.’

특히나 보좌관들 사이에서는 더욱 그랬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세이린은 아르반의 기사이면서 동시에 보좌관으로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주군과 파티에 참석한 이래로 그녀의 주군은 세이린이 레이디로서가 아닌, 보좌관으로서 참석하길 바라셨다.

그 이후 사교계와 귀족들에게 학을 떼 버렸지만, 때때로 주군의 명이 있을 때면 종종 연회에 참석하고는 했다.

‘어쩌다 보니 병행하게 되었던 보좌관 업무가 의외로 적성에는 잘 맞았지.’

세이린은 아르반의 수석 보좌관, 브리온에게 정식으로 보좌관이 될 생각이 없냐는 권유까지 받았던 전적이 있었다. 물론 거절했지만.

그녀는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만 주군의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해 보좌관 행세를 하곤 했다.

그럼에도 브리온은 그녀를 상당히 아끼고 신뢰하였기에 손이 부족할 때면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그 부름이 대체로 자신을 불러 얼굴이나 보고자 하는 브리온의 엄살에 불과하단 걸 알고 있음에도 세이린은 대체로 넘어가 주곤 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아르반의 탄신 연회에 초대되는 귀족들의 목록을 보게 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번 연회의 초대 명단은 둘로 나뉩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습니까?”

질문이었지만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하나는 폐하께서 지명하신 귀족들의 명단. 또 하나는 저희 측에서 작성한 초대자 명단입니다.”

리엘리는 세이린의 말을 듣고 내심 놀랐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초대객의 반절 이상이 폐하께서 지명한 자들이니 연회 당일에는… 아마 상당한 진풍경이 펼쳐질 겁니다.”

세이린은 이를 꽉 깨물었다.

어쩐 일로 황제가 주군을 위해 연회를 열어주나 했다.

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도 승전식을 치렀던 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었다.

그러니 이번 일도 좋은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진즉 눈치챘어야 했다.

‘그렇다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세이린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번졌다.

한편 세이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리엘리는 요지를 찾아 되물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번 각하의 생일 연회는 사실상 그의 짝을 찾아주기 위한 자리다. 뭐 이런 말인가요?”

리엘리는 약간 뚱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세이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리엘리의 모습에 작게 미소 지은 세이린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특별히 황궁 내의 연회장에서 귀빈들을 초대해 각하의 짝이 될만한 영애들을 만나보는 게 어떠냐고, 권하셨죠.”

명하셨죠, 라고 말할 뻔했지만 애써 내리누른 세이린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경직되는 표정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영 쉽지가 않았다.

세이린은 잠시 고민했다.

그녀에게 연회의 목적에 대해 말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비록 지금이야 모르고 있다지만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있는지라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실상을 알아내는 것이야 쉬울 것이다.

만약 직접 나서서 소문을 캐내지 않는다 해도 로즈니가 연회에 참가하는 이상 어떻게든 알게 되겠지.

고민은 짧게 끝을 맺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 여기서 자신이 입을 다물어봤자 그녀의 기분만 상하게 할 뿐이다.

결론을 도출한 세이린은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차기 대공비를 구하기 위함이란 미명이 붙어있음에도 후작가 이상의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들에게는 초대장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단 한 명에게도요.”

황제가 고위 귀족 가문에 대한 초대를 암묵적으로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주군인 아르반이 별도의 명을 내린것도 아니었기에, 그들로서는 백작가 이하의 가문들로 적당히 초대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실로 확실한 물 먹이기였다.

“…실상은 각하께 드리는 경고의 의미이자, 귀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말을 이어갈수록 세이린의 표정은 걷잡을 수 없이 차갑게 굳어져 갔다.

“그 자리를 통해 황실이 각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알리겠다는 것이겠죠.”

냉기가 흐르는 세이린의 표정을 처음 본 리엘리와 로즈니는 그녀가 이번 일로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기실, 누군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수모를 당할 것이 뻔한 자리를 앞두고 있다면 화가 나지 않겠는가.

리엘리와 로즈니는 그리 생각하며 침묵을 유지했다.

“무엇보다 황성에서 열리는 행사임에도 황실 측에서는 연회에 참석한다는 말씀 한마디조차 없습니다.”

말을 마친 세이린은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작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무 흥분했다.

하지만 그 잠깐 사이 그녀의 머릿속은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과열되고 있었다.

‘데뷔탕트 시즌을 앞두고 있어서 다른 큰 연회가 열리지 않는 가운데 황성에서 주최되는 이번 주군의 탄신 연회에 상당한 이목이 집중되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

거기다 정작 그 주체자인 황제는 참석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 강제로 제 옆자리를 탐내는 영애들에게 둘러싸일 처지에 놓인 주군은….

‘본인의 일임에도 별다른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참으로 기묘한 연회가 될 것이다.

발 없는 말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살을 불려 퍼져나갈지를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했다.

세이린은 그 중심에 존재하는 이가 제 주군이라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것참, 당황스러운 상황이네요.”

내뱉는 말 만큼이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로즈니의 표정에 리엘리 또한 공감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어이가 없네요. 그런데 사실 저는 잘 이해가 가질 않아서요. 각하께서는 왜 그런 황실의 횡포를 묵인하고만 계신 거죠?”

황제가 정말 단순히 아르반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판이라고 한다면, 아르반은 대체 왜 그 위에서 순순히 장기 말이 되어 주는 걸까.

리엘리가 보았을 때 아르반 카넬로웰은 혈통을 떼어놓고 보더라도 충분한 부와 명성이 있었다.

또한 그를 따르는 부하들과 여러 가신이 존재한다.

그런 그가 대놓고 자신을 압박하고 깎아내리려는 황제의 수작에 순순히 놀아 나주는 데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기라도 한 걸까.

‘설마 정말 대공비의 자리를 채워 넣기 위해서? 아냐, 고위 귀족가의 영애는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건 아닐 텐데….’

아르반이 정말 대공비를 원하는 것이라면 좀 더 조건을 따질 것이다.

리엘리는 의아함과 답답함에 속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리엘리의 의문에 로즈니 역시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세이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간신히 한마디를 뱉어냈다.

“…실은 저도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세이린 역시 이러한 일이 발생할 때면 언제나 그들과 같은 의문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지만 차마 제 주군에게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기에 여태 미지로 남아있는 물음이었다.

왜? 어째서?

사실 기사단 내부에는 세이린과 같은 의문을 품은 이들 역시 상당수가 존재했다.

그들은 술을 진탕 마신 어느 날,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난제를 꺼내어놓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일 것 같냐.”

“글쎄다. 힘이 없어서?”

누군가의 의문에 한 기사가 답했다.

세이린은 그 대답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힘이 없어서.

다만 그 힘이란….

‘무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돈과 권력,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이 부족하다.

카넬로웰에는 인해 전술을 펼칠 만큼의 병사와 기사가 부족했다.

그들이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는 건 적의 요충지를 급습해 그들이 대응할 새도 없이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르반 카넬로웰이라는 독보적인 강자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전술.

‘이런 무력은 어디까지나 목숨을 내건 전투에서나 쓸모 있는 것이지.’

황제와 대립한다는 건 무력이 아닌 권력이 필요한 일이었고 권력을 거머쥐기 위해선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르반 카넬로월이 사람을 쥐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했다. 돈과 의지.

승전에 대한 포상으로 영지의 크기는 두 배 이상 부풀었지만, 실속이라고는 전혀 없는 땅덩이에 불가했다.

그렇다고 카넬로웰이 가난하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여타 귀족들이 황제를 등지고 그의 옆에 서게 할만큼의 부유함은 아니었다.

‘하지만 돈이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들어올 거야.’

이번에 발견된 마정석 광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하면 사정이 급변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로베르와 나눠 대충 반절 정도라 치더라도 몇백 년 치 영지 예산을 넘어서는 거금이 들어올 것이다.

또한, 금전적 문제를 떼어놓고 보더라도 아르반 카넬로웰이라는 존재가 지닌 무력, 그 위명은 예삿 것이 아니었다.

그를 증명하듯, 아르반의 보좌관으로 널리 알려진 세이린에게 연락을 취했던 귀족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현 황제를 못마땅히 여기는 고위 귀족들도 상당수였고.’

그들이 바라는 건 단 하나.

더 이상 황권이 커지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 자를 원했다.

현 황제와 대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대귀족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더구나 현시점에 있어 황제의 권위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니 반발심을 품은 자는 많았으나 정작 제대로 된 반기를 들 수 있는 자는 몇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럴만한 힘을 지닌 자가 둘 있지만… 서로 손잡을 만한 이들이 아니지.’

그 둘이 얼마나 제멋대로인지를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러니 더욱 아르반을 향한 귀족들의 갈망은 컸다. 그가 중간에 서서 둘을 중재하는 역할이 된다면 금상첨화일 테니.

하지만 아르반은 그들의 바람을 쳐냈다.

‘세이오넬 공작의 제안을 거절해야 했을 땐 정말이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그자와 손을 잡았다면 분명 평탄치는 않았겠지만 더는 황제의 비위를 맞춰야 할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러니 더욱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다 생각이 들었다면 세이린 역시 이리 속 끓일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애써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제가 백날 고민한들 결론이 나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다른 생각 또한 속이 터지기는 매한가지였다.

바로 황제가 노골적으로 주군을 암살하려 든다는 사실을 처음 목격하게 된 순간을 떠올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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