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나는 세이린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씻고 옷을 챙겨입은 후 곧장 개인 응접실로 향했다.
안에는 언제 도착했는지 벌써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로즈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
“공녀님. 그간 안녕하셨나요? 천천히 오셔도 되시는데, 머리도 다 못 말리고 나오셨군요.”
로즈니의 걱정스러움이 섞여든 목소리에 세이린 또한 눈썹을 늘어트리며 염려가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 감기라도 드시면 어쩌시려고…. 다시 가서 머리를 말리고 오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니에요. 이래 보여도 건강해서 잔병치레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두 분이 이렇게 와계시는데 집주인인 제가 늦장 부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사실 머리도 거의 다 말리고 와서 괜찮았다. 만약 감기에 걸리더라도 율렌이 있었기 때문에 걱정 없기도 하고.
“늦장 부리셔도 뭐라고 할 사람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맞아요. 아! 그보다 공녀님, 아델 경. 이것 좀 드셔보세요. 저희 살롱 옆에 새로 오픈한 가게의 디저트인데, 맛이 정말 좋답니다.”
로즈니가 탁자에 올려둔 종이 상자 안에는 조각 케이크 몇 개와 마카롱, 그리고 타르트가 예쁘게 포장되어 들어 있었다.
“와! 데코레이션이 화려하네요.”
그래 봐야 입으로 들어가면 사라져 버릴 부질없는 것들이지만.
진짜 여기에 카메라만 있었어도 음식 사진도 찍고 풍경도 찍고 다른 사람들 사진도 잔뜩 찍었을 텐데….
‘가만, 그런데 영상구라는 게 존재하면 카메라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 알아봐야지.’
내가 속에 맺힌 한에 영혼 없는 리액션을 하자 로즈니가 그런 내 모습이 귀엽다는 듯이 작게 미소 지었다.
“모양뿐 아니라 맛도 훌륭해서 분명 공녀님 입맛에도 맞으실 거예요. 직접 맛을 보고 반해 공녀님과 아델 경께도 드리고 싶어 사 왔답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로즈니. 이렇게 신경을 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머, 아니에요. 저희 사이에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죠.”
로즈니의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순간 흠칫한 내가 그녀를 바라봤다.
언뜻 들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의 입을 통하면 좀 더 뭐랄까…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로즈니는 평소와 같이 말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로즈니의 입에서 나온 ‘저희 사이’에는 세이린 뿐만 아니라 나도 포함되어있는 듯 보였다.
“일부러 신경 써주시다니, 고마워요. 그럼 따뜻한 차랑 같이 들까요?”
내가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며 에바에게 눈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에바가 상자를 들고 가더니 따뜻한 차와 함께 정갈히 디저트를 담아 내어왔다.
로즈니가 인원수에 맞춰 구매했는지 접시에는 각자의 몫으로 케이크와 타르트, 마카롱 두 개씩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딸기 타르트를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
“어때요? 훌륭하죠?”
“…네. 솔직히 크게 기대 안 했는데, 정말 맛있네요.”
기대 안 한 정도가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
타르트가 아무리 맛있어 봐야 타르트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진짜 맛있잖아? 나중에 아몬이랑 먹으러 가야지.’
타르트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연신 먹을 수 있을 만큼 맛있었다.
“아델 경도 마음에 드셨나 봐요.”
웃음기 섞인 로즈니의 목소리에 접시에서 눈을 떼고 세이린 쪽을 바라보자 그녀의 케이크가 벌써 반이 사라져 버린 것이 눈에 띄었다.
“아, 하하. 맛있어서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보기 흉했나요.”
멋쩍게 웃어 보이는 세이린의 모습에 나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흉하긴요. 보기 좋기만 한데. 편하게 드세요. 전부터 생각했지만 릭스 경도 그렇고 아델 경도 정말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 것 같아요.”
“맞아요.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것 같은걸요.”
로즈니의 말대로였다. 보고 있기만 해도 배가 부른 기분이고, 내가 괜히 흡족해서 더 챙겨주고 싶어졌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편하게 먹겠습니다.”
“얼마든지요. 부족하면 얘기하시고요. 이보다는 못해도 저희 집 파티셰 솜씨도 나쁘지 않으니까.”
“감사합니다.”
실제로 세이린은 우리 집 파티셰가 만든 에클레어를 상당히 좋아했다.
가끔 이렇게 시간을 보낼 때면 다른 건 몰라도 에클레어만큼은 꼭 남김없이 먹어 치우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로즈니가 여상스레 말했다.
“그리고 보니 대공 각하의 탄신 연회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대공 각하라면… 카넬로웰 대공 각하 말인가요?”
나는 아르반의 이름을 부르려다 의식적으로 그의 성을 언급했다.
“…예, 이제 열흘도 남지 않았네요.”
잠시 침묵하던 세이린이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덧붙였다.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그늘져 보였지만 불현듯 기분이 상한 나는 세이린이 왜 불편해 보이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
‘…나만 모르고 있었나 보네, 아르반의 생일.’
나는 짐짓 모른 체하며 로즈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다음 주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로즈니는 참석하나요? 대공 각하의 탄신 연회.”
“네. 일단 얼굴은 비출 예정이에요. 정말 얼굴만 비치고 돌아올 거지만.”
내 물음에 순순히 입을 연 로즈니가 빠르고 단호한 어조로 제 의사를 피력했다.
경직된 목소리와 미세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연회에 가는 게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로즈니의 모습에 의문이 드는 한편, 내 표정은 한층 더 굳어졌다.
로즈니의 탓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초대를 받지 못했는데 그녀는 초대를 받았다는 불편한 현실 때문에 그랬다.
“레이디 로즈니께서는 연회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신가요?”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한 나와 달리 이전 세계에서의 나와 동갑인 로즈니는 많은 연회와 파티에 초대를 받아봤을 테니 호불호가 확실히 존재할 터였다.
“네, 뭐…. 연회장의 분위기는 좋아하지만 다른 영애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라서요. 그리고 이번 대공 각하의 탄신 연회는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불편하기도 하고요.”
“무슨 문제가 더 있나요?”
내가 로즈니를 바라보며 묻자 로즈니는 의외로 곧장 대답하는 대신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세이린을 바라봤다.
그런 로즈니의 시선을 따라가 세이린에게로 눈길을 돌리자 그녀 역시 곤란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보니 공녀님께서는 아직 데뷔탕트 전이셨군요.”
“네. 그게 무슨 관계가 있나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딱히 이상할 건 없는 것 같은데.
빙의하고 리엘리의 기억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지식으로 생활하기에는 솔직히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시간이 남을 때면 이곳의 예법이나 기본적인 지식이 담긴 책을 읽고는 했다.
덕분에 수박 겉핥기식의 얕은 지식 정도는 갖출 수 있던 나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하면 일반적인 연회나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는 게 관례에 맞았다.
그렇지만 데뷔 이전에도 친분이 있는 귀족의 생일 연회 정도는 초대장을 받아 참석하는 경우는 왕왕 존재한다.
그러니 아르반과 꽤 친해졌다 여긴 내가 느낀 배신감과 서러움은 예사 것이 아니었다.
‘아니, 말이라도 해줄 수 있는 거잖아. 여태 나만 친해졌다고 생각한 거야?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서로 막 이름으로 부르고 그러냐고.’
하지만 세이린과 로즈니 둘 다 저런 떨떠름한 얼굴로 내 눈을 피하니 여간 수상한 게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자 로즈니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홀짝였고, 세이린은 내 눈빛을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이번 각하의 탄신 연회는 단순히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녀의 해명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일 파티가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원래 각하께서는 연회에 참석하시는 건 물론이고 주최하시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아르반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 같아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그 남자가 연회를 좋아해 뻔질나게 들락날락했다면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에 작년 탄신일에는 그냥 조용히 넘어가기도 했고요. 그런데 올해에는 황제 폐하의 명으로 황성에서 연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순간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황제?
“황제 폐하요?”
“예. 이미 공공연히 돌고 있는 소식이지만, 이번에 각하의 탄신 연회를 열게 된 건 폐하의 권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무슨 생일 파티를 권유씩이나 해?
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세이린은 착잡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뭐… 권유라고 하셨지만 거부권이 없으니 실상은 명령이었죠. ”
그리 말하는 세이린의 눈동자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분위기가 가라앉은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공녀님과 산맥으로 떠나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던 사항입니다. 초대장 또한 그때 모두 전달되었고요.”
세이린의 설명에 로즈니가 약간 놀라고 의아한 듯한 기색으로 물어왔다.
“아델 경, 공녀님과 함께 산맥에 다녀오셨나요?”
“아, 네.”
그리고 보니 딱히 말할 이유가 없어 로즈니에게는 산맥에 다녀온 일에 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나는 아르반과 세이린을 포함한 소수의 인원으로 에시트 산맥에 위치한 마정석 광산으로 시찰을 다녀온 과정에 대해 간략히 그녀에게 설명했다.
“…실은 전에 로즈니의 가게에서 승마복을 구매해간 이유이기도 해요.”
“어머….”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승마를 배울 생각은 없었고, 그냥 산맥을 다녀오는데 편한 복장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선택한 게 승마복이었어요.”
“그러셨군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공녀님께서 승마에 흥미를 갖고 저와 어울려 주셔서.”
빙그레 미소 지은 로즈니가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에요. 어울려 주다니, 저도 두 사람과 이렇게 만나는 일이 즐거운걸요.”
나는 부드럽게 답하며 세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말랑하게 풀어진 분위기를 망치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이건 꼭 알고 싶었다.
“그런데 아델 경. 방금 하시던 말씀의 뒷이야기는 어떻게 된 건가요? 폐하께서 대체 어떤 명을 내리셨길래….”
사람의 생일 파티를 명령으로 강제할 정도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리 생각하며 세이린을 바라보자 그녀는 내 시선에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한숨과도 같은 말을 토해냈다.
“이번 각하의 생신 연회는 그럴듯한 포장에 불과합니다. 그 내용물은 따로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