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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55화 (55/153)

55화.

그러자 내 품에 눌려있던 짧은 앞발을 꼬물거려 꺼내든 율렌이 쇄골 쪽을 툭툭 두드리며 불만스레 말했다.

“궁금하게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말해 봐.”

“…….”

“아, 진짜! 주인이 캐묻지 않는 이상 네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해줄게. 응?”

궁금한 건 답을 듣지 않고는 넘어갈 줄을 모르는 작은 드래곤은 내 뒷말이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머리맡에 있는 커다란 베개에 상체를 기대고 양 무릎을 세워 앉자 내 배 위에 축 늘어져 있던 율렌 또한 목을 세우고 나와 시선을 마주해 왔다.

“그럼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는 거야. 내가 죽는 날까지.”

이런 약속은 비밀을 엄수해야 하는 사람이 죽는 날까지 입을 다물겠다 하는 쪽이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율렌은 드래곤인지라 나보다 오래 살 터이니 내가 죽는 날까지 입을 다물어 준다고 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

황금빛 눈동자가 조명으로 인해 한층 더 진한 빛깔로 반짝였다.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율렌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어 내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너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기에 곧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지금 마법도 못 쓰는 애가 그런 힘이 있을 리가 없지.’

우리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여전히 미동 없이 올곧게 나를 담고 있는 황금빛 눈동자를 못 이긴 내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에 그랬지. 한 달 전쯤에 특별한 일이 없었냐고.”

“그랬지. 그리고 너는 나한테 과거의 기억을 꿈을 통해 다시 보게 되었다고 했고.”

“맞아 그랬지. 근데 그건 거짓말이야. 난 사실….”

나는 작게 호흡을 가다듬고는 율렌을 바라봤다.

분명 말하겠다고 다짐을 했음에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사이에 긴장 때문인지 손은 식은땀으로 약간 촉촉해져 있었다.

나는 괜히 손을 한 번 꼼지락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율렌은 그런 내 손을 바라보며 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가 너를 지금과 다르게 대할 일은 없을 거야. 네가 무어라 말해도 화를 내지도 않을 거고, 네 말을 믿을게.”

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였다.

항상 태양과 같이 빛나던 녀석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가라앉아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내가 알고 있는 율렌이 아닌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한 편으론 의아하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율렌의 마력을 흡수했다지만 난 이 드래곤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수많은 인간 중 하나에 불과하다.

처음에 오해했던 것처럼 율렌의 주인 되는 아르반의 반려도 아닐뿐더러, 율렌이 다시 마력을 회복한다면 더는 볼 일이 없어지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인간일 뿐인데….

‘어째서 이런 말까지 해주는 걸까.’

솔직한 마음으로는 나를 믿어주겠다는 율렌의 말이 기뻤다.

그 작은 안도감에 세차게 뛰던 심장의 박동도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솟구쳤다.

“왜,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를 믿어준다고 하는 건데?”

약간 잠긴 목소리로 질문하는 나를, 율렌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직시해 왔다.

“네 덕분에 내가 살았으니까.”

내 덕분에?

의아한 내가 되묻기 전에 녀석이 말을 이었다.

“드래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칙이 몇 가지가 있어. 그중 하나가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

“…….”

“또 다른 하나는 받은 은혜와 원수는 반드시 같은 무게로 돌려줄 것.”

“…은혜?”

“은혜를 입었으니까. 너에게.”

율렌은 어느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평소와 같은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은혜라니, 난 딱히 너한테 해준 게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율렌과 이름을 걸고 약속을 한 적도 없을뿐더러, 은혜라고 말한 만큼의 무언가를 베푼 적 또한 없었다.

내가 원작을 파괴하고 아르반과 에시트 산맥에 올라 성검을 뽑았다는 게 은혜라면 은혜일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아르반의 동행이었을 뿐이다.

성검의 주인이 된 것은 원작에서와 같이 아르반이었다.

율렌이 깨어날 수 있었던 것 역시 아르반이 성검을 뽑았기 때문이니,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율렌에게 해준 것이 무엇 하나 없었다.

“없긴 왜 없어. 네 덕분에 내가 폭주해서 죽을 일이 사라졌고, 주인이 팔을 잃지도 않았잖아.”

“하지만 그건….”

“차원의 균열이 생겨서 내가 마력을 떼어버릴 수 있었다는 말, 기억해?”

“…응, 기억하지.”

율렌이 폭주하지 않은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그 차원의 균열이었으니까.

“나도 널 처음 만났을 때는 단순한 우연으로 네가 차원의 균열 근처에 있어서 내 마력을 흡수할 수 있었던 건 줄 알았어. 그런데 이곳으로 와보니까 확실히 알겠더라. 여기에 열렸던 차원의 균열은 일반적인 균열과는 양상이 달랐어.”

“…….”

“여기. 이 방에, 아주 옅지만, 차원의 균열이 발생했던 흔적이 남아있거든. 그리고 그 균열이 닫힌 자리에 엘리, 네 영혼과 같은 향이 섞여 있었고.”

“……!”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차원의 균열과 영혼의 향이 섞여서 존재한다는 건 두 가지 경우가 전부야. 균열에 빨려 들어갔거나, 균열을 타고 나왔거나.”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너무 놀라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자 율렌이 앞발로 내 가슴팍을 살살 토닥이며 나를 진정시키려 들었다.

묘하게 하찮은 그 손(?)짓은 두드린다기보다 툭툭 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지만….

그래도 덕분에 놀란 가슴이 진정되긴 했다.

“내가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지만 드래곤으로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내 예지몽이 빗나갈 리가 없다는 거야.”

하지만 율렌이 내다본 미래, 원작의 내용은 바뀌었다.

“단 한 가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녀석의 설명을 듣고 사실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율렌이 언급하고 있는 특별한 경우가 나로 인해 발생한 상황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라면 미래를 바꿀 가능성이 충분하지.”

나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율렌의 입에서 저 말이 튀어나오리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육성으로 듣게 되니 또 당황스러웠다.

“네가 만약 그 차원의 균열을 통해 넘어온 다른 차원의 존재라면 너로 인해 미래가 바뀔 수 있었을 거고.”

“…….”

입을 여는 족족 모두 맞는 의견이었기에 나는 가타부타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니 네가 그 차원의 균열을 타고 넘어온 영혼이라 보는 것이 맞겠지.”

녀석의 추리를 들으며, 나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율렌의 추측이 맞았다. 나는 이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였다.

다만 율렌이 모르고 있는 것은….

“네 말대로야. 난 다른 세계에서 죽고 이곳으로 왔어. 눈을 떠보니까 여기였고, 리엘리 로베르의 몸으로 깨어났는데….”

나는 갑자기 목이 타는 듯이 말라와서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잠이 들면 꿈을 통해 리엘리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었어. 아주 어릴 때의 기억부터 최근의 기억까지 중구난방이지만.”

“호오, 역시 육체는 다른 이의 것이 맞았구나. 그래, 그래야 앞뒤가 들어맞지.”

율렌은 내 고백에 별다른 충격조차 받지 않은 눈치였다.

오히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니 내가 도리어 어이가 없었다.

“뭐야, 그 희귀한 물건이라도 구경하는 것 같은 눈은.”

짐짓 타박하면서도 그런 율렌의 태도에 나 또한 완전히 긴장이 풀려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희귀하지.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이라니.”

“그보다 난 대체 어쩌다 이 몸에 빙의하게 된 걸까? 물론 지금 생활에 불만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냐. 다만….”

찝찝할 뿐이다.

원작에서 리엘리 로베르라는 인물이 사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더구나 율렌은 정해진 미래가 바뀌는 일은 다른 차원의 존재가 개입해야지만 가능한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원래 운명대로라면 죽었어야 할 율렌이 살아있고, 아르반의 왼팔이 멀쩡한 것처럼…

‘리엘리 로베르 역시 나 때문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의 유력한 사망 원인이 나라는 존재 때문으로 확인되자 머릿속은 점점 혼잡스러워졌다.

또한 그 생각이 곧 확신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리엘리의 죽음에 대한 것으로 가득 들어찼다.

“…나 때문에 리엘리 로베르가 죽었다는 거네.”

멍하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중얼거렸다.

삽시간에 넋이 나간 내 모습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율렌은 불만스레 꼬리를 흔들다가 내 다리를 찰싹 때렸다.

“아!”

소리는 제법 크게 났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놀라서 나도 모르게 약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가 당황해 눈만 껌뻑이며 율렌을 내려다보자 녀석이 눈을 흘겼다.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하면서 땅 파지 말고 내 말부터 들어.”

단호한 율렌의 목소리에 자책에서 벗어난 나는 녀석에게로 신경을 돌렸다.

“…뭔데.”

“네가 육체 없이 영혼만 이곳으로 넘어온 거라면 살아있는 자를 해칠 수 있을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

“뭐?”

율렌의 확신에 동요한 내가 되물었지만, 녀석은 내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애초에 영혼만 있었기에 차원의 균열을 넘어올 수 있었던 거기도 했겠지만.”

“…육체가 있으면 균열을 못 넘어와?”

“차원을 넘기도 전에 다 바스러져 버리겠지. 애초에 영혼이란 물리적인 힘을 행사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존재야. 그러니 당연히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빼앗아서 빙의할 수도 없지.”

“…그럼 나는 뭐야.”

율렌의 말에 의하면 내가 리엘리의 몸을 빼앗고 빙의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버젓이 이 자리에 리엘리 로베르의 몸을 차지하고 존재하고 있었다.

내 질문에 율렌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네가 지금 들어가 있는 몸은 죽어있었을 거란 말이야.”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원래 이 몸은 나중에까지 살아있어야….”

말을 하다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빙의한 것까지는 털어놓을 생각이었지만 이곳이 어떤 소설 속 세계라는 것까지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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