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꿈속에서 눈을 뜬 내 앞에는 지금보다 젊어 보이는 공작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나, 그러니까 과거의 리엘리 사이에는 묘하기 그지없는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리엘리의 앞에 선 공작은 그녀에게 하얀 꽃다발을 건네며 곧 사그라질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빠가 미안하다, 리리. 올해도 잘 부탁하마.”
“…다녀올게요.”
공작의 사과를 받지 않고 뒤돌아선 리엘리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품 안에는 공작이 건넨 꽃다발이 한 아름 자리하고 있었다.
옆에서 전속 시녀인 카렌이 대신 꽃다발을 들겠다고 나섰지만 리엘리는 살살 고개를 저어 거절하고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리엘리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깥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미동 없이 앉아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여전히 하얀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서서히 속도가 줄어든 마차가 멈춰 선 것은 보랏빛의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보랏빛 호수라니….’
마치 보랏빛 물감을 가득 부어놓은 듯, 호수는 수면 아래가 보이지 않을 만큼 진하고 아득했다.
나는 그 신비한 호수를 조금 더 바라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리엘리는 호수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기에 아쉬운 마음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리엘리가 마차에서 내려섰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뺨을 스치는 감각이 영 불쾌했다.
‘…추워.’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다만 시야에 들어오는 호수가 얼어붙지 않고 찰랑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버틸 만은 한 날씨인 성싶었다.
리엘리는 그대로 앞장서서 호수의 옆쪽으로 나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말없이 걸었다.
그녀의 뒤를 카렌과 에이미가 따랐다. 그녀들뿐 아니라 주변에는 상당수의 기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허나 그들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기에 옷자락이 스치는 작은 소음과 발걸음 소리만이 적막을 채워 왔다.
아직 한낮임에도 태양을 가린 구름이 짙어 하늘은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그때, 마른 땅을 밟는 퍼석한 발걸음들 사이로 서늘한 돌풍이 파고들었다.
휘우웅-
주변의 마른 잔 나뭇가지들이 부딪히며 정적을 깨는 소음을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침울한데 휑한 마찰음이 더욱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꼭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만큼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내가 긴장을 하는 것과 별개로 꿈은 계속 이어져갔다.
리엘리의 걸음이 오솔길을 따라 더는 호수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르자 꽤 넓은 터가 나타났다.
잘 정돈된 묘지였다.
‘어쩐 일로 공작이 외출을 허락했나 했더니, 성묘 때문이었구나.’
많은 무덤 중에 리엘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묘비 앞에 가서 섰다.
곧이어 기사들은 사방으로 멀리 흩어졌고 시녀들 또한 물러났다.
제 어머니의 묘비 앞에 선 리엘리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제 귓가에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 올해도 나 혼자 왔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큼이나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섞여든 슬픔이 내게도 전해져왔다.
“…항상 미안해. 아빠가 왜 엄마를 보러오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는 마. 엄마까지 아빠를 미워하면, 아빠가 너무 가엽잖아.”
리엘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하얀 입김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희미하게 존재하다 사라져 버리는 숨결이 공허해 보였다.
“아빠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엄마밖에 몰라. …그래서 아몬한테도 아직 화가 나 있나 봐.”
내게 전해지는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리엘리는 아몬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아몬이 잘못한 게 아닌데, 아빠가 왜 저렇게까지 아몬에게 못되게 구는 건지 모르겠어. 물론 나도 처음에는 아몬이 미웠던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 애는 내 동생인데….”
리엘리는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말아쥐었다.
“엄마가 아빠 꿈에라도 나타나서 그러지 말라고 말해주면 안 돼? 나 너무 힘들어….”
그녀가 말을 내뱉는 동안 시야가 점점 뿌옇게 흐려져 갔다.
“엄마가 떠나고 나서부터 아빠가 너무 이상해졌어. 무서워, 엄마….”
뱉어내는 목소리에도 습기가 한가득이라 곧장 울음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큰 눈망울 하나 가득 고여있을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았다.
리엘리가 입술을 꽉 깨물고 어떻게든 울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나, 여태 얘기하진 못했는데… 사실 전에 아빠가 아몬 방에 들어가는 걸 봤어. 그리고… 그 애한테 손을 뻗는 것도.”
그녀는 울지 않기 위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빠랑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어도 표정을 보고 알았어. 아빠가 아몬에게… 나쁜 짓을 하려고 했다는 거.”
덜덜 떨리는 목소리였음에도 리엘리는 멈추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바보처럼 보고만 있다가… 그러다 너무 무서워서 도망쳐 버렸어. 그러면 안 됐는데….”
두어 번 크게 숨을 몰아쉬던 리엘리는 이제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이 속삭였다.
“…소리 지르면 아빠가 나, 나한테도 그렇게 무서운 짓을 할까 봐… 방으로 들어가서 숨어버렸어.”
느릿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는 리엘리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감을 느꼈다.
“그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아몬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었으면 어땠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무서워서 잠이 안 와.”
리엘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여 긴 머리카락으로 제 얼굴을 가려버렸다.
반질거리는 그녀의 검은 구두 위로 떨어진 굵은 눈물방울이 메마른 땅에도 자국을 남겼다.
“미안, 미안해, 엄마…. 동생이 태어나면 내가 누나니까, 아껴주고 잘 보살펴주겠다고 엄마랑 약속했는데…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마지막 말은 거의 뭉그러져서 알아듣기조차 힘들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망가진 수도꼭지처럼 멈출 줄을 모르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어린 리엘리의 목소리에 담긴 고백은 내 신경회로를 멈춰버릴 정도로 큰 충격을 선사했다.
이렇게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조차 어려운 사실이었다.
“…가씨! 아가씨!”
그러다 불현듯 귓가로 스며드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가씨! 역시 잠드셨었네요. 이러다 감기 걸리시니까 빨리 나오세요.”
“헉…!”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상체를 일으켰다.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물에 잠겨있는 몸과 물기를 머금어 몸에 감겨오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생생했다.
그리고 욕조 옆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에바가 있었다.
“많이 놀라셨어요, 아가씨? 죄송해요. 밖에서 불러도 답이 없으셔서 들어왔어요.”
“아냐. 깨워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네 말대로 감기 걸릴 뻔했네.”
나는 어깨에 수건을 둘러주는 에바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조금 전 꿈이 너무 충격적이라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에바가 이끄는 대로 욕실을 빠져나와 그녀가 머리를 말려주는 동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이건 대략 6년 전쯤의 일이야. 리엘리가 14살이던 해, 공작부인의 기일.’
나는 기억 속의 리엘리가 내뱉던 말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다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또한 그것은 소설 속에서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엑스트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행동에는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만 리엘리는 이 소설 속의 주연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왜 아몬을 등지고 외면했는지에 대해서는 원작에서 다루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동안 미스터리 같았던 리엘리의 행적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긴 하네.’
분명 아몬은 갓난아이였을 때 공작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적이 있었다.
원작에서는 고작 한 문장으로 일축되었던 그 사건의 피해자는 비단 아몬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아….”
“아가씨, 많이 피곤하세요?”
내가 한숨을 쉬자 뒤에 서서 머리를 말려주던 에바가 냉큼 말을 붙여왔다.
“그냥 조금….”
“거의 다 말렸으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응…. 그래.”
머리가 워낙 길어서 조금이라도 덜 말리면 베갯잇이 눅눅해졌기 때문에 얌전히 대답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이나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어 많이 피곤했기에 다른 말은 붙이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에바 또한 그런 내 모습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나는 뽀송뽀송하게 말린 머리를 대충 뒤로 넘긴 채 침실로 향했다.
세바니는 내가 목욕하는 사이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넓은 침실 안은 침대에 옆의 작은 탁상 램프만이 켜진 상태였기에 다소 어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율렌의 존재는 눈이 부시기까지 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사여구가 아니라 정말 사전적 의미 그대로 눈이 부셨다.
탁상 램프 바로 옆에서 자리 잡고 저리 움직이고 있으니 율렌의 비늘에 반사되는 빛이 가히 노래방 미러볼 저리가라였다.
‘대체 얼마나 열심히 닦아준 거야?’
약간 질려 하고 있는데 율렌이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왔어? 뭐야, 목욕하고 나왔는데 얼굴이 왜 그래? 욕실에서 넘어지기라도 했어?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율렌의 가볍기 그지없는 한마디에 납덩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잠시나마 뒤로 밀려났다.
나는 픽,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잰걸음으로 다가가 율렌을 집어 들어 품에 안고는 침대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품 안에서 미약하게 버둥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져 왔지만 팔에 좀 더 힘을 주자 이내 포기했는지 내 가슴팍에 머리를 올리며 투덜거렸다.
“뭐야, 기껏 걱정해줬더니…!”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근데 넘어진 건 아니고, 그냥….”
이걸 얘기하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어서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