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뭐지?’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뒤돌아섰다.
“……!”
하지만 계속 들려오는 소음에 신경이 쓰여 나도 모르게 문을 닫지 않고 새어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아무리 아빠…, 아니, 주치의님이라도 안 된다고 계속 말씀드리고 있잖아요!”
“그럼 왜 그렇게까지 문을 걸어 잠그고 계시는 건지 설명이라도 좀 해 보거라. 에바야, 응?”
“아이참, 진짜!! 아가씨 정말 안 계신다고요!”
“문만 걸어 잠그고 계신 건 아니니? 제발 부탁이니까 들어갈 수 있게 좀… 아니면 에바네가 들어가서 아가씨께 말씀이라도….”
나는 잠시 귀 기울여 대화를 듣다가 곧 누구의 목소리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에바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어떤 남자가 그녀에게 사정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문을 닫지 않고 문고리를 잡은 채 가만히 서 있자 아몬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아이에게 조용히 설명했다.
“아몬, 아무래도 나가봐야겠다. 내 전속 시녀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조금 큰소리로 다투는 것 같아.”
“저도 같이 갈게요.”
“여기서도 들릴 정도로 다투는데 뭐 좋은 일이라고. 그냥 여기 있어. 릭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 내오라고 했으니까 그거 마시고 자. 알았지?”
“…네. 그렇게 할게요.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그럴 거야. 그럼 내일 보자. 좋은 꿈 꾸고.”
“안녕히 주무세요.”
곧장 문을 열고 나가자 말다툼 소리는 안에서와 비교할 수조차 없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아몬의 방문 역시 내 방과 같은 방음 마법이 걸려있었기에 이제껏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체 뭔 일인 거야.’
그 와중에 내가 나오는 소리를 용케도 들었는지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목소리의 주인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고 나를 돌아봤다.
한 명은 예상대로 에바였고, 다른 한 명은 옅은 밀 색에 가까운 금발에 연둣빛 눈동자의 처음 보는 중년 남자였다.
‘어쩐지 유약해 보이는 사람이네.’
흐릿한 색채 때문일까.
“…아가씨!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일찍 인사드리러 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차림새로 보아 하급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의 절박해 보이던 표정이 나를 발견하고는 단번에 펴지는 것이 꽤 인상 깊게 다가왔다.
“아가씨! 세상에, 주치의님께서 글쎄 아가씨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으시는 거 아니냐고 계속 물어보시는 거예요!”
“에, 에바야…!”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도 자꾸 아가씨한테 말 좀 해달라고, 문 좀 열어달라고 어찌나 사정하시는지, 어휴.”
잔뜩 흥분한 어조로 씩씩거리던 에바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치의라는 남자가 에바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보아 둘은 제법 친밀한 관계처럼 보였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저 주치의는 어딘가 멀리, 혹은 장시간 이곳을 떠나 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에바는 내 전속 시녀가 되기 전에도 이 공작저에서 일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 짧은 기간 안에 만나서 친해지기도 힘들었을 텐데, 뭐지.’
작은 궁금증이 일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에바 개인의 인간관계였고, 내가 여기서 둘의 관계를 캐묻는 것은 그녀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에바는 열심히 하소연을 이어갔다.
“제가 뭐 거짓말이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정말 기분 나빴어요!”
씩씩거리는 에바의 모습에 나는 눈동자만 굴려 남자를 바라봤다.
곁눈질하는 내 눈초리가 제법 매서웠는지, 아니면 저 남자가 심약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단번에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며 변명해왔다.
“그, 그게 아니라 가주님께서 아가씨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하니 반드시 상태를 면밀히 살피라는 엄명을 내리셔서….”
“그런다고 그렇게 막무가내로 구시면 어떡해요?! 정말 아가씨가 방 안에 계셨으면 그냥 안 넘어가셨을 거예요!”
그리 말하며 내게 동의를 구하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보다 박력 있는 에바의 모습에 다소 얼떨떨했다.
“아, 아가씨 상태를 좀 봐 드려도 되겠습니까?”
눈치를 보는 와중에도 물어볼 건 다 물어보네. 그래도 끈기 하나는 쇠심줄인가보다.
‘아니면 나보다는 공작 쪽의 후환이 더 두려운 걸 수도.’
그리 생각하니 심사가 약간 뒤틀렸다.
나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
“됐어. 몸 아픈 곳 없으니까 이만 가봐도 돼. 아버지께는 그냥 체기나 몸살기가 있는 것 같다고 둘러대고.”
“그… 그것도 있지만 사실 더 중요한 일이….”
“정말 괜찮아. 아버지가 신경 쓰이는 거면 내가 내일 가서 변명할 테니까 일단 그렇게 둘러대.”
아무래도 한동안 보고 싶지 않았지만 저렇게까지 불안해하는 주치의의 모습을 보니 이렇게라도 말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아니라, 아가씨…. 가주님의 문제가 아니라 아가씨의 일 때문에….”
나는 계속 나를 잡고 늘어지는 그의 행동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그냥 가봐도 될 텐데.
“다른 일 때문이라면 확실하게 말을 해.”
답답함에 내가 채근하자 그는 에바의 눈치를 보며 여전히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에바, 먼저 방으로 들어가 있을래?”
“…네, 아가씨.”
에바는 약간 부루퉁해 보이는 얼굴로 주치의의 어깨를 제 어깨로 툭 치고 지나갔다.
‘허어…?’
처음 보는 에바의 불량한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그런 에바의 행동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늘 드시던 약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에바가 사라지자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화제에 내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왜냐면, 나는 먹고 있는 약 따위가 없으니까.
식사 때 시녀들이 약을 따로 챙겨주지도 않았거니와, 주변 가구들에서도 약병과 같이 보이는 물건을 발견한 적도 없었다.
“…응접실로 가지.”
저게 무슨 말인지는 들어봐야겠으니.
내가 나직하게 말하자 그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개인 응접실로 들어서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차라도 한 잔 내어줘야 하나?”
“아뇨, 아닙니다. 간략히 말씀드리고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내가 짤막하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자 주치의가 들고 있던 가방을 테이블에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고향 영지에 다녀온다고 오래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약은 부족하지 않으셨습니까?”
“…괜찮았어.”
그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 무난한 답변을 꺼냈다.
“다행입니다. 드시던 양보다 넉넉하게 챙겨드리긴 했지만 이번에 여행도 다녀오셨다면서요? 그럼 잠자리도 바뀌고, 평소보다 신경 쓰실 일도 많으셨을 테니 잠도 더 못 주무셨을 텐데….”
주절주절 말하며 그는 가방에서 갈색 유리병을 하나 꺼내 내 앞에 내려놨다.
나는 그것을 들어 올려 살짝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안쪽에 들어있던 별사탕 같은 모양의 약들이 작은 소음을 만들며 흔들렸다.
‘이건….’
본 적 있는 물건이다.
다만 이전까지는 정말 별사탕이라 여겨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설마 이게 약이었을 줄이야.
“슬슬 내성이 생기 실수 있으니 가능하면 바깥 활동도 좀 하시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심이 좋으실 듯한데….”
혼자 줄줄 말을 늘어놓던 그는 내가 약병을 손에 넣고 들여다보고만 있자 그걸 어떤 의미로 해석했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그, 가주님께서 아가씨 몸이 안 좋으시다고 하신 건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아. 약도 이게 마지막이 될 것 같고. 요즘은 잘 자고 있거든.”
“정말입니까…? 다행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그 약보다 더 강한 수면제는 만델랑뿐인지라 걱정이 많았습니다.”
“…….”
“이 정도 약이야 제 선에서 몰래 전해드릴 수 있다지만 만델랑 같은 경우는 구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가주님의 눈을 피할 방법이 없었는데….”
나는 주치의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으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해 갔다.
‘그러니까, 불면증이 심했던 리엘리가 공작 몰래 이 아저씨에게 약을 받아먹고 있었다는 말이네.’
“아, 만델랑은 정말 강력한 수면제이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심각한 약입니다. 그 때문에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으니, 이렇게 좋아지신 게 천만다행입니다.”
아래를 향하고 있는 남자의 눈꼬리가 옅은 눈가 주름과 함께 올라가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기는 듯한 그의 태도에.
“…그래, 그러네. 신경 써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약을 가져다드린 것이 전부인걸요. 그럼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아가씨.”
복도에서 마주했을 때와는 천지 차이로 보이는 밝은 얼굴의 주치의가 사라지고 서도 나는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그러다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려던 차에 주치의가 나서고도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여긴 에바가 찾아왔다.
나는 약병을 주머니에 쑤셔 넣어 숨기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아, 아가씨 오셨어요?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방으로 들어가자 폭신해 보이는 푸른 벨벳 쿠션 위에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있는 율렌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율렌의 비늘을 천으로 열심히 닦고 있던 세바니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율렌은 거의 쿠션과 한 몸이 되어 늘어진 상태로 눈만 가늘게 떠 우리를 확인 하고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뭐 하고 있었어?”
그 모습이 황당해서 물어보자 세바니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율렌 님이 목욕을 하고 싶으시다고 하셔서요! 열심히 씻겨드리고 물기를 닦아드리고 있었어요. 이거 해드리면 상을 주신다고 하셔서….”
“상…. 아, 하하…. 그래. 계속해, 어차피 나도 씻어야 하니까.”
이제 보니 에바뿐만 아니라 세바니도 율렌을 제법 마음에 들어 했었나 보다.
하긴, 둘이 성격이 조금 다른 면이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취향은 비슷해 보이긴 했다.
“네. 아가씨!”
나는 해맑아 보이는 세바니의 모습에 작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율렌을 씻기느라 욕실에 있어서 밖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세바니는 다시 뽀득뽀득하게 율렌을 닦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을 뒤로 한 채 욕실로 향했다.
평소처럼 혼자 욕조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런데 피곤한 나머지 깜빡 잠이 들어 버린 모양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현상을 겪고 있었다.
꿈. 오늘은 어떤 과거를 보여주려나.
이제는 이것도 하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처럼 마냥 단순하게 지나가는 과거의 평범한 한때가 아닌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