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나는 그대로 뒤돌아 아몬의 방문 앞에 섰다.
지서안이었을 때의 나는 외동이었기에 가족이라고는 엄마뿐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가족 또한 아몬, 그 아이가 유일했다.
“아몬, 안에 있니?”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그러자 곧장 문을 열고 나온 아몬이 나를 반겼다.
“누나, 어서 오세요. 식사는 잘 마치셨나요?”
“아니. 역시 아몬이 없으니까 먹기 싫어서 빨리 나와버렸어.”
예상과는 다른 답이었는지 아몬의 얼굴에 작은 동요가 비쳤다.
맑고 투명한 그 눈동자를 마주하자 머릿속이 한결 편안해졌다.
“잠깐 안에 들어가도 되니?”
“아, 물론이죠. 들어오세요.”
내게 자리를 권하는 아몬에게 이끌려 소파에 앉았다.
아몬은 어느새 전속 시종, 릭을 불러 따뜻한 밀크티를 준비하라 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소파에 몸을 기댔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먹구름같이 머릿속을 잔뜩 뒤덮고 있던 안 좋은 기억들이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릭은 작게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나는 내 앞에 착석하는 아몬에게 시선을 던졌다.
처음 봤을 때와는 정말 많이 달라졌다.
소설 속 남주다 보니 잘 먹지 못했을 때도 출중한 외모로 인해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어여뻤다.
‘어쩌면 내가 아몬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찬찬히 아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키가 조금 큰 것 같았다.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몬. 누나 옆에 와서 서볼래?”
“네.”
별다른 궁금증이나 불만을 표하는 대신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아몬의 모습을 보니 기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앉아 있는 내 앞에 선 아몬은 나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작은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피부가 말랑하고 따뜻하다.
그렇게 볼을 살살 쓸다가 보드라워 보이는 머리카락으로 올라가 머리를 빗겨주듯이 쓰다듬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나와 마주하는 게 어색하고 부끄러운지 뽀얗던 아몬의 볼이 은은한 장밋빛으로 물들어갔다.
예쁜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 둘 곳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결국 아래로 내리깔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입가에 은은하게 스며드는 미소를 막을 수가 없었다.
“내 동생, 예쁘네.”
이다지도 예쁜데, 리엘리와 공작은 어째서 너를 본 체도 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단 하나뿐인 가족이 된, 내 동생.
그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불쌍한 아이라 생각하고 책임감에 널 돌보겠다 마음먹은 게 엊그제 같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 아이와 함께하며 그 생각은 점차 바뀌어 갔다.
내가 베푸는 호의에 눈을 빛내고, 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아이.
처음으로 받아보는 관심과 애정에 목말랐음이 분명함에도 자신을 사랑해 달라 칭얼거리는 대신 내가 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 든다.
안타깝게만 느껴지는 아이의 행동에 신경 쓰다 보니 지금에 와서는 단순히 불쌍한 아이, 혹은 돌봐야만 하는 존재가 아닌 진짜 내 동생, 내 가족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 더더욱 아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어쩌면… 아이의 의지가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과 달리, 오히려 내가 아이에게 기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사람. 가족.
그 범위에 아이가 들어왔음을 통감한 나는 그대로 아몬을 끌어안았다.
“…누, 누나.”
미세한 떨림이 섞인 목소리였지만 내 허리께를 감싸는 작은 온기로 미루어 보아 이 상황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를 좀 더 꼭 끌어안았다.
“아몬. 네가 모자람 없이 모든 것을 누렸으면 하는 마음에 가정교사들을 여럿 붙여 주긴 했지만 네가 그 어떤 것도 잘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어.”
조금 뜬금없지만 언제나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래도 넌 언제까지나 내 자랑스러운 동생일 거야.”
아이가 항상 필사적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내게 실망을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는 아몬이 무엇이든 능숙하게 해내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내 앞에 있는 아이는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었던 아몬 로베르가 아닌 내 동생인 아몬일 뿐이니까.
내 속삭임에 품에 안겨 있던 아몬이 작게 몸을 떠는 것이 느껴져 왔다. 나는 계속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어갔다.
“물론 열심히 해주는 건 기뻐. 하지만 네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하는 말이야.”
“…부담이라뇨. 그렇게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항상 감사하게 여기고 있는걸요.”
“감사하다 생각하지 않아도 돼. 원래 네가 이 로베르 공작가에서 태어나 누려야 했던 모든 권리가 지금에서야 돌아왔을 뿐이야.”
나는 끌어안고 있던 아몬을 놓아주며 얼굴을 마주했다.
리엘리가 널 어찌 생각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 짐작과 달리 제 동생을 싫어하지 않는 듯했지만 아몬에게 접근하는 것을 꺼리던 의뭉스러운 모습만을 과거의 기억을 통해 엿본 게 다였으니까.
“그렇지만 누나가 저를 돌봐주시지 않으셨다 해도 아무도 누나를 비난하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저도요.”
“…아몬.”
“저를 이리 버려둔 것은 가주님이지 누나가 아닌걸요.”
아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분명하게 자기 생각을 전달해온 것도.
“누나가 언젠가 절 다시 돌아봐 주시는 날이 올 거라고 항상 생각했어요. 실제로 누나는 절 돌아봐 주셨고, 저는 그것만으로도 족해요.”
아몬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베풀지 않아도 되는 것을 베풀어 주시고 있음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
아몬은 제 누님의 눈동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입을 다물었다.
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만큼 흘러넘치는 기쁨을 갈무리하기 힘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아몬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내에서 가장 밝은 웃음을 그려 보였다.
‘누님은 내 웃는 얼굴을 좋아하시니까.’
이리 웃어 보이면 항상 마주 웃어주시곤 했다.
아몬은 제가 웃어 보이면 그에 답하듯 마주 미소 짓는 누님의 얼굴이 좋았다.
오직 자신만을 향한 미소.
로베르 공작가의 공자이기 때문이 아닌, 누님의 동생이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특권.
누님께서 자신을 그 창고 방에서 꺼내어 돌보신 이유는 의심의 여지조차 없이 로베르의 공자가 그런 좁아터진 공간에서 비렁뱅이처럼 지내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며 점점 깨닫게 되었다.
누님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셨다.
처음에는 자신이 쓸데없는 희망을 품고 있기에 과도한 망상을 하고 있다 여겼다.
그러나 누님께서 산맥으로 떠나시고 열흘이라는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오셨을 때, 그날 계단을 내려오던 제 시야에 담긴 누님의 모습을 보고 알았다.
‘어느 누가 가문의 체면을 위해 베푸는 이에게 저런 표정을 지을까.’
그날을 회상하면 아몬은 아직도 기분 좋은 설렘으로 심장이 요동침을 느끼고는 했다.
사람의 기분에 따라 심장이 이다지도 크게 박동할 수 있다는 것을 누님과 함께하며 처음 알았다.
아몬은 제 세상이 누님께서 손을 내밀어주시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누님의 곁에 선 이후 참 많은 것을 경험하고, 또 배워가고 있었다.
아몬은 계단 위에 서서 노을을 등진 누님이 제게 걸음을 옮기던 모습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모두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언제든 다시 떠올리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벅차오르는 광경이었기에.
그때 아몬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제 인생에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역시나 멍청한 생각이었다.
누님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아몬에게 있어서는 크고 작은 행복이 되었다.
그리고 아몬은 누님의 품에 안겨 제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지금도 누님이 귀환하신 날만큼이나 가슴이 뛴다고 생각했다.
“…아몬, 정상적인 집안이었다면 이 모든 것이 네게 당연히 제공되었어야 하는 것이었어.”
공작과 식사를 마치고 자신을 찾아온 누님의 표정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그때보다는 안색이 좋아 보였지만 지금 누님의 표정은 또다시 묘하게 굳어있었다.
“내가 너를 여태 외면한 게 사실이고, 그건 어떤 이유가 있든지 간에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
“…누나.”
“그러니 네가 감사 인사를 할 게 아니라, 나를 원망하고 미워한다 해도 난 할 말이 없는데….”
아몬은 당장 입을 열어 리엘리의 말을 부정하려 했지만, 그녀가 말을 잇는 편이 더 빨랐다.
“솔직히 네가 날 미워하지 않고 좋아해 줘서 기뻐.”
***
아몬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입만 뻐끔거리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만을 바라보는 모습이 귀여웠다.
덕분에 조금 전 진창으로 처박혔던 내 기분 또한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릭이 좀 늦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는지 살펴보고 올게.”
사실은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아 민망함으로 귀 끝이 화끈거리기에 꺼내 놓은 변명이었다.
나는 아몬의 답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티 룸의 문을 잡고 여는 순간 안쪽에 서 있던 릭과 눈이 마주쳤다.
“……!”
순간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릭은 아닌지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작게 속삭였다.
“차가 식어 다시 내어오겠습니다.”
그 말에 시선을 내리자 릭이 들고 있는 티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제법이네.’
이제 보니 눈치껏 들어오지 않고 여기서 기다려주었던 모양이다.
“…아냐. 할 말은 다 했으니 아몬이 마실 따뜻한 우유나 한잔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아가씨.”
릭이 제 할 일을 위해 돌아서는 모습에 나 또한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차였다.
“……!”
“……”
아몬의 방에 있을 때는 듣지 못했던 소란스러운 소리가, 티 룸을 통해 새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