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제법 날카로운 어조가 튀어 나갔지만 시선은 공작을 향하지 못했다.
나는 거의 입에 대지도 않은 접시의 음식에 눈길을 고정했다.
안쓰러워 보이는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아서였다.
‘나는 아몬의 옆에 서기로 했으니까.’
만에 하나 공작이 아몬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다 하더라도 아몬의 의사를 우선시해야 하는 게 지금의 내 입장이다.
‘하물며 공작은 아몬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관심조차 없는 상황이지.’
지금 우리 둘만이 자리한 이 식사 자리만으로도, 그 사실은 명백했다.
그러니 공작에게 어쭙잖은 동정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별일 없이 무사히 돌아온 것 같아 다행이구나. 정말 많이 걱정했단다.”
기껏 세리나를 빼닮아 예쁜 얼굴인데, 상하기라도 하면 아빠는 마음이 아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구나.
공작은 안타깝다는 듯이 부드럽게 읊조렸다.
일부러 감정을 섞지 않기 위해 최대한 무감정하게 입을 연 나와 달리 여전히 차분하고 부드러운 어조였다.
아까도 느꼈지만, 여느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였다.
또한 그 음성에는 꽤 묘한 발언 또한 들어 있었으나 나는 이상하다 느낄 정신이 없었다.
그 안온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모순되게도 내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생각났다. 아까 공작의 목소리를 듣고 느꼈던 기시감.’
공작에게서는 처음 듣는, 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머릿속에 새겨질 만큼 질리도록 들었던…
‘아빠의 목소리.’
공작이 내뱉은 한마디는 옛날, 상냥하고 다정하게만 들렸던 아빠의 음성과, 지독하리만치 닮아 있었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 속에서부터 격한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르며, 목이 막혀왔다.
처음 공작과 대면했을 때 이와 흡사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쓸데없는 희망과 미련.
그리고 이미 환멸을 느꼈음에도 과거로부터 파생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 자신을 향한 경멸과 한심함이 거센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공작이 아닌, 진짜 내 아빠를 향한 원망과 미련이 공작의 모습에 투영되어 이제는 잊었다 여긴 과거의 기억을 헤집어 놓았다.
결국 나는 천천히 공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그리도 무정한 태도를 고수했음에도 공작이 나를, 리엘리를 바라보는 표정에 변화가 없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어.’
나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무시하고 공작을 바라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은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이 환하지도, 그렇다고 산맥을 떠나기 전 보았던 어색한 미소와도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공작의 웃음에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러니? 우리 리리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필시 구겨진 종잇장처럼 엉망이 되었을 내 얼굴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지적하는 공작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공작의 그 한마디가 내 머릿속 깊은 곳에 매장해둔 기억을 파헤쳐 버렸다.
“우리 서안이, 얼굴이 말이 아니네. 이게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만한 일인가?”
정신이 혼미해 질만큼 경악으로 가득했던 그 날의 아빠가, 공작의 얼굴에 겹쳐 보였다.
그 환영이 스친 순간 나는 고개를 팩 돌리며 즉시 몸을 일으켰다.
“저, 먼저 일어나 볼게요. 피곤해서요.”
내가 무어라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뒤에서 공작이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내 방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잠시 숨을 골랐다.
뛰어 올라와서 숨이 찬 게 아니었다. 그저 극도의 긴장과 불안한 마음에서 기인한 답답함 때문이다.
‘왜 갑자기 떠올라 버린 거지? 그날 이후 벌써 십수 년이나 흘렀고, 여태 괜찮았는데….’
나는 문고리를 잡고 있음에도 덜덜 떨리고 있는 손을 반대 손으로 세게 움켜잡았다.
그럼에도 잔떨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흐….”
나는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한심하기 그지없다.
공작이 아빠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다.
공작은 죽은 부인을 아직까지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제 자식인 리엘리 또한.
비록 심각하게 엇나간 데다 그로 인해 또 다른 제 자식인 아몬을 배척하고 있다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 아빠와는 분명히 달라.’
엄마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아빠가 우리를, 아니, 엄마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 털어놨던 순간.
솔직히 믿어지지 않았다. 내게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하는 아빠의 표정이 너무도 평상시와 같았던 탓이었다.
은은한 미소가 배어 있는, 온화하고 단정한 얼굴.
아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서 있던 내 등을 떠밀어 방 안에 들여보낸 엄마가 아빠에게 쏟아내던 폭언.
그리고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여전히 담담하기만 한 아빠의 목소리.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쾅-하는 소음과 함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온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한 착각이 일만큼, 무서운 적막이 흘렀다.
어렸던 나는 그 상황에서 느껴지는 심각성과 긴장으로 인해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울고만 있었다.
그러다 불안한 마음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도 없으리라 여겼던 거실에는 아까와 같은 자리에 아빠가 있었다.
나는 단번에 달려가 아빠를 끌어안고 울었다.
‘펑펑 울면서 뭐라고 했더라?’
아, 그래.
“아빠… 엄마랑 싸우지 마. 엄마한테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엄마도 금방 아빠한테 괜찮다고 할 거야.”
울음 섞인 부정확한 발음이었지만 그래도 아빠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볼 리가 없었을 테니까.
당시의 나는 아빠의 허리께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다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어 아빠에게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고 정신없이 우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이상하다. 내가 이렇게 울고 있는데 울지 말라고 달래주지도, 안아주지도 않아.
내가 평소와 다름을 인지했을 때, 아빠의 크고 따뜻한 손이 내 어깨를 감싸왔다.
익숙한 온기에 사고방식이 단순했던 어린 나는 금세 안도하며 아빠를 쳐다봤고, 그대로 얼어붙듯 굳어버렸다.
울던 것도 잊은 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는 나를, 아빠는 조용히 양손에 힘을 주어 밀어냈다.
그리고 무기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무 감정도 서리지 않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나는 그늘진 아빠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다시 숨을 들이켠 건, 아빠가 입을 열고부터였다.
이때 아빠가 했던 말은 하도 곱씹어 아주 오래된 기억임에도 뭉그러지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서안이, 얼굴이 말이 아니네. 이게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만한 일인가?”
“아, 아빠…?”
그린 듯한 미소, 사근사근하고 다정하게만 들리는 목소리.
하지만 그와 대조되게 싸늘히 식어 있는 눈동자.
그리고 그 속에 비치는 불안에 떨고 있는 내 모습까지.
“잘 들어. 이제 우리 서안이… 아니지, 이제 우리가 아니구나. 지서안, 너와 나는 남이 되는 거란다.”
“아빠… 왜, 왜 그래… 무서워….”
“한 번만 말해줄 거니까 잘 들어두렴.”
그리 말하며 아빠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내가 더 이상 네 엄마를 사랑하지 않게 됐거든. 다른 진정한 사랑을 찾았어.”
“…….”
“이제 나는 그녀의 아이들을 내 아이로서 사랑하고, 아껴줄 예정이란다. 네 엄마와는 갈라설 생각이니, 서안이 너는 이제 내 딸이 아니야.”
그 말이 머릿속에 박혀 나를 묶어두는 사슬이라도 된 것처럼 아빠가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뿐이었다.
다시 엄마가 집으로 돌아와 나를 안아줄 때까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부정했다.
“사랑하지 않게 된 게 아니라, 애초에 사랑한 적이 없었던 거겠지….”
잊으려고 노력했으나 당시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 나이를 먹어서도 문득문득 나를 괴롭히곤 했다.
수천, 수만 번도 넘게 생각해본 결과, 지금의 나는 인정하고 결론을 내렸다.
‘아빠는 날 사랑한 적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 마음이라는 게 동전 뒤집듯이 쉽사리 바뀔 턱이 없었으니까.
애초에 아빠는 날 사랑한 게 아니다. 그는 엄마를 사랑했던 것이고, 나는 엄마의 부속품과 같은 것이었을 뿐이다.
아빠가 만약 나를 사랑했다면 엄마를 향한 마음이 식은 것과는 별개로 나를 사랑했어야 마땅했을 테니.
‘나를 아껴준 건… 내가 단지 엄마의 딸이었기에, 다정하게 대해주는 시늉을 했던 것뿐이야.’
그 사실을 혼자 생각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처음에는 부정했고, 그 뒤에는 슬퍼하고 분노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그리워했다.
그러다 우연히 거리에서 아빠와 그의 새로운 가족을 마주하게 됐을 때에서야, 내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아…. 더 생각하지 말자.”
생각해봐야 나만 비참해지니까.
아직도 이런 고리타분한 옛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지겹고 한심하다.
또한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내겐 아빠를 제외하더라도 엄마가 있었다.
비록 바빠서 얼굴을 마주할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분명 엄마는 나를 많이 사랑했다.
그리고 나 또한 단 한 순간도 엄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곳에 와서도 불현듯 엄마에 관한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엄마를 그리워하는 대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몬에게 향하고는 했다.
혼자서 청승 떨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걸.’
결국 현실도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다 보면 결국 지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 오래전에 깨달아버렸다.
그러니 이번에도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더 길어지기 전에 잘라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