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좋아요. 그렇게. 잘하시네요. 원래 운동신경이 좋으셨나요?”
나는 세이린의 리드에 따라 말을 몰아 걷던 것을 멈추고 말에서 내려왔다.
겨우 몇 번 수업을 했을 뿐인데 내가 생각해도 제법 느낌이 좋다고 여겨졌다.
그런 와중에 세이린이 저리 칭찬을 해주니 콧대가 높아지는 건 정말 불가항력이었다.
“아뇨. 운동은 안 해봐서 사실 잘 모르겠어요.”
“전에 산맥에서 함께 이동할 때도 생각은 했지만, 운동을 전혀 해보시지 않았다면 온종일 말을 타는 것 자체가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공녀님께서는 다른 영애들에 비해 기본적인 체력과 회복력이 상당히 좋으신 것 같습니다.”
그때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으니 악으로 깡으로 버텼을 뿐이다.
자고 일어나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있었다는 점도 한몫 톡톡히 하기도 했고.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찬찬히 걸었다. 아직 아몬의 훈련이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아몬이 아르반과 훈련을 진행하는 연무장과는 달리 나는 그냥 저택의 길을 따라 말을 타고 걷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마차도 거뜬히 지나다니는 넓게 트인 길이다 보니 말을 타고 달리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괜히 연무장에서 연습하다 아몬의 집중을 깨뜨리는 일이 없게 이쪽에서 연습하는데, 생각보다 느낌이 좋아 만족스러웠다.
세이린과 함께 실내로 들어서며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순간 낯익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로즈니?”
그리고 보니 오늘 로즈니가 아몬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러 온다 했던 것이 생각났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이렇게 우연히 마주하게 되니 또 기분이 좋네요.”
그녀가 살포시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하지만 로즈니의 시선이 미묘하게 나를 비껴가 있는 것 같아 그 눈길을 따라가 보니, 아….
“…좋은 오후예요, 레이디 로즈니. 이쪽 옆에 계신 기사님은 제 승마 수업을 맡아 주시는 세이린 아델 남작님이세요.”
내가 세이린의 이름을 밝히자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로즈니의 눈이 번뜩였다.
“아델 경, 제 동생의 승마 수업을 맡아 주시기로 한 멜라니스 백작가의 로즈니 멜라니스 영애세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멜라니스 영애. 카넬로웰 기사단 소속, 세이린 아델이라고 합니다.”
세이린이 먼저 가슴에 손을 올리고 본인을 소개하자 로즈니 또한 그녀에게 인사했다.
“저야말로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아델 경.”
가볍게 인사를 마친 로즈니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있던 나는 순간 흠칫 몸을 굳혔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암처럼 뜨겁게 끓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목격해 버렸다.
‘아, 설마….’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사설에 등에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로즈니가 굳이 시간을 내서 아몬에게 인사를 하러 온다고 했던 게 모두 계획된 일은 아니겠지…?’
돌이켜 보면 이상하긴 했다.
몸을 움직이는 검술과 승마 수업을 하루에 모두 몰아넣는 것은 아몬에게 무리가 될 수 있었기에 승마 수업은 검을 배우지 않는 날로만 잡아두었다.
그럼에도 로즈니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아몬의 얼굴을 보고 싶다 말했고, 나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 그녀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런데 설마 이런 큰 그림이 깔려 있었던 걸까? 내 승마 수업 교사를 확인, 아니, 소개받고자?’
하지만 우리가 이 시간에 정확히 마주칠 수 있는 확률은 아주 희박하다.
아무리 대략적인 시간을 계산해서 맞춰 약속을 잡았다 하더라도, 지나친 억측일 게 뻔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로즈니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녀의 표정과 눈빛이 너무….
나는 자연스럽게 세이린에게 말을 붙이고 있는 로즈니를 바라보며 약간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다.
“이렇게 만난 것도 굉장한 인연이기도 하고, 직접 말씀드리자니 부끄럽지만 경께 관심이 있어서요.”
헉. 나는 로즈니의 한마디에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아니, 저 멘트는… 흔히 마음에 드는 이성을 꼬실 때 쓰는 것 아니던가?
첫 만남부터,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저런 대사를 대뜸 날릴 수 있다니….
그에 놀란 건 비단 나만이 아닌 모양이다.
세이린 또한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평소보다 더 커진 눈을 빠르게 끔뻑거렸다.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차라도 함께하며 담소를 나누심이 어떨까요?아, 물론 공녀님께서도 함께요.”
로즈니는 수줍은 듯 살포시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동공이 양껏 확장된 세이린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내게 박혀왔다.
당연하겠지만 이런 경험이 처음인지 당혹감이 다분히 묻어나는 세이린의 표정에 잠시 어찌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고민은 짧았다.
나는 일단 로즈니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것도 좋네요. 그럼 우리 언제 시간 내서 셋이 티타임을 갖도록 할까요?”
이곳에서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로즈니가 말하는 방식은 내게는 상당히 익숙하고, 또 선호하는 것이었다.
방금 멘트는 작업 거는 것 같아서 좀 그랬지만….
아무튼 나를 포함한 우리 세 사람은 다 동년배였기에(나는 정신적 나이가)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았다.
“…저도 좋습니다.”
좋아. 세이린의 대답에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좀 얼떨떨해 보이긴 하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감사해요, 아델 경. 공녀님. 그럼 오늘은 먼저 물러가 볼게요.”
목적을 달성한 로즈니는 다시 시녀의 안내를 받아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버렸다.
‘음?’
어디서 본 것 같은 외형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 시녀는 리엘리의 전속 시녀였던 에이미였다.
여태 신경 쓰지 않아 몰랐는데 손님 담당으로 배치되었나 보다.
갑작스럽게 나타났던 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가는 로즈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와 세이린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범한 레이디는 아니신 것 같네요.”
잠시의 침묵을 깨고 세이린이 말문을 텄다.
나 또한 세이린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에요.”
아마도.
***
공작저로 돌아온 지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공작은 여태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오죽하면 공작에게 별 관심도 없는 내가 신경이 쓰인 나머지 시녀장에게 직접 그에 관해 물어보기까지 했다.
시녀장은 공작이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느냐 묻는 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가주님께서는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황실의 일 때문에 출타하셨고, 다른 말씀은 없으셨지만 귀가가 다소 늦어질 수 있다고는 하셨습니다.”
솔직히 그녀의 설명을 듣고 좀 안심이 되었다.
분명 마주하기 껄끄러운 사람임은 맞다. 하지만 막상 기약 없이 나타나질 않으니 은근히 신경을 좀먹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결코 내가 원작에 관여한 일이 적다고 말할 수도 없었기에 공작의 미래 또한 내가 알던 소설과는 다르게 흘러갈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혹시라도 공작이 밖에서 변을 당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공작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티 내기 싫어 여태 묻지 않고 있었지만 이렇게 알고 나니 또 속이 시원했다.
마음이 가벼워진 나는 공작이 없는 시간 동안 나와 세이린, 로즈니와 함께 작은 티파티를 열었다.
처음 로즈니를 만났을 때의 당황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서로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에 나는 히죽 미소 지었다.
이제 나도 이곳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좋은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설레는 가슴을 안고 방으로 돌아와 쉬고 있는 내게 에바가 들어와 전해온 소식 때문이었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귀환하셨어요.”
“…….”
“그리고 함께 식사라도 하자는 전언이 있으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다른 변고 없이 잘 돌아왔구나 싶어서.
그리고 동시에 굉장히 불쾌해지기도 했다.
‘내가 지금 그 사람 걱정을 한건가?’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한순간에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건 그냥 원작의 궤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발생한 불안일 뿐이다.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미래를 더 이상 종잡을 수 없으니 생기는 막연한 감정.
‘…그래, 그 사람을 걱정한 게 아냐. 다른 누가 되었든 이 정도로 연락이 없으면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한 거라고.’
나는 동요했던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스스로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런 변명이나마 늘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내키지는 않지만 일단 초대에는 응해야겠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를 이끌고 걸음을 떼었다.
오랜만에 홀로 식사를 하게 될 아몬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더 무거워졌다.
***
공작과는 꽤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이지만 그의 인사는 예상외로 여상스러웠다.
“리리, 왔니? 어서 앉으렴.”
“…네. 오랜만에 뵙네요.”
나긋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내가 들어왔던 공작의 음성 중 가장 차분하게 느껴졌다.
나는 약간의 이체가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분명 격한 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내 오산이었나.
전처럼 과하게 반겨주거나, 혹은 탐탁지 않아 할 줄 알았는데… 공작은 둘 중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공작의 모습에서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지만, 기억이 나질 않아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닌 건가.’
또한, 어쩐지 평소보다 진득하게 느껴지는 검은 마력의 기운이 내심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내 신경이 날카로워지니 평소보다 예민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공작은 나를 앉혀두고 별다른 말이 없었다.
드넓은 식당을 울리는 소리라고는 식사를 하며 발생하는 작은 소음이 전부였다.
하지만 공작의 집요한 시선은 내가 이곳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줄곧 내게 박혀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역시, 우리 리리는 세리나와 참 많이 닮았어.”
비교하니 더.
워낙 낮게 중얼거렸기에 마지막 한마디는 들리지도 않았다.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낸 공작은 그 이후 음식을 삼킬 때만 입을 벌릴 뿐, 다른 화제를 꺼내지는 않았다.
대놓고 저리 바라보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턱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참을 인을 외우며 음식을 입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공작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원래도 백지장 같던 얼굴은 못 본 사이 더욱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살도 빠졌는지 전보다 야위어 보였다.
‘…저 상태 그대로 눕혀두면 꼭 시체처럼 보일 지경이네.’
그게 약간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애써 꿋꿋하게 식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보아하니 내게 따로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닌 듯한데 죽은 생선처럼 퀭한 눈으로 저리 쳐다보고만 있으니, 내 기분은 점점 더 바닥을 치고 땅을 기어 다녔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보고 계시지만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