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그간 안녕하셨나요, 공녀님.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정말이지, 너무 기쁘고 또 영광입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레이디 로즈니. 잘 지내셨나요.”
“물론이죠. 저는 무탈하게 잘 지냈답니다.”
전에 보았던 화려한 드레스 대신 처음 보는 형식의 세련된 드레스를 걸친 로즈니가 인사를 건네왔다.
그녀의 활활 타오르는 강렬한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반가운 마음이 그보다 앞섰다.
“다시 보게 되니 좋네요.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 물론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에요.”
“그럼요. 잘 알아들었어요. 사실 저도 공녀님을 처음 뵈었을 때는 이런 식으로 다시 마주하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는걸요.”
내 말에 눈매를 접으며 사르르 눈웃음을 지어 보인 로즈니가 눈을 반짝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서 아직 10살이 되지 않으셨다고 들었어요. 보통 승마는 이르면 10살 정도에, 늦으면 그 이후에 시작하는 경우도 많죠. 공녀님께서는 다소 이른 시기지만 좋은 선택을 하신 거예요.”
“그런가요?”
“네, 그럼요. 그런데 공자님의 교육을 공녀님께서 도맡고 계시는가 봐요. 공작님께서 워낙 바쁘시니 그러신 거겠죠.”
나는 대답 없이 그저 웃음으로 넘겨버렸다.
누구나 궁금해할 만한 사항이었고, 실제로도 전에 아몬의 가정교사들을 채용할 때마다 보았던 흔한 의문이었다.
그런 내 웃음을 어떻게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즈니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발언을 던졌다.
“사실 공녀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공자님의 승마 교사가 되는 것보다 공녀님과 면담할 기회가 더 탐이 났답니다.”
그 말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몬의 승마 교사를 뽑는 면접에 와서 저런 말을 할 줄이야.
하지만 그만큼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나와의 면담을 원했는지에 대해서.
“저한테 따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셨나요?”
“물론이죠! 아주, 아주 많답니다.”
로즈니는 이런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양, 활기차게 대답했다.
“공녀님께서 다음에 또 방문해 주실지, 해주신다면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는 와중에 막연하게 기다리고만 있는 건 제 성격과 맞지 않아서요.”
다소 저돌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그녀의 기세에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보기에도 당신은 그렇게 보인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있는 힘을 다해 참아냈다.
“편지라도 써볼까 고민하던 차에 공자님의 승마 교사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됐답니다. 운명이었죠.”
“…운명, 네. 뭐, 그렇군요.”
약간 떨떠름하게 들리는 내 목소리에도 로즈니는 상큼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약간은 흥분을 가라앉힌 듯한 그녀가 제 앞에 놓인 홍차를 들어 향을 맡았다.
그녀는 가볍게 입술만을 축이고 도로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물론 공자님의 수업도 정말 즐거울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보다 공녀님과 함께 승마를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그만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고집을 부리고 말았네요.”
결례라. 남성 우대 조건이라 부드럽게 거절하려 한 시녀장에게 고집을 부린 일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결례랄 게 뭐가 있나요. 레이디 로즈니께서는 엄연히 저희 아몬의 교사로 지원하셨고, 로즈니가 이 자리에 계신 건 제가 이 만남을 원해서인걸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해요.”
그녀는 정말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후후, 공녀님께서 다녀가신 이후로 설레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정말 고생했답니다. 또래의 영애가 승마에 관심을 보이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거든요.”
“그러셨군요.”
어째서 로즈니가 남성 우대 조건인 아몬의 교사 자리를 노리나 했더니, 사실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은 나였던 모양이다.
더 정확하게는, 승마에 관심을 보이는 비슷한 나이대의 귀족 영애.
아니나 다를까, 로즈니는 대놓고 내게 속내를 내비쳐왔다.
“혹시 공녀님의 승마 교사는 벌써 구하신 걸까요? 아무리 기다려도 공녀님의 승마 교사를 구한다는 공고가 나오질 않길래….”
“…계속 보고 계셨나요?”
설마 내가 방문했던 그 날부터 매일같이 확인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집념이었다.
대체 얼마나 승마를 좋아하는 걸까?
하고 많은 취미 중에 왜 하필이면 승마에 저렇게까지 열을 올리는 건지, 어떤 특별한 계기라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부끄럽지만, 네. 계속 보고 있었답니다. 공녀님의 승마 교사가 되고 싶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걸요.”
입으로는 부끄럽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한치의 부끄럼도 없어 보였다.
“미안해서 어쩌죠? 이미 아는 분께 부탁드려서 그분이 수업을 진행해 주시기로 해서요.”
“…혹시 수업을 맡아 주시는 분이 부인이나 영애님이실까요?”
그건 왜 궁금해하는 거지.
“만약 남성분이시라면 성별이 같은 쪽이 몸을 쓰는 일을 배우기에는 더 적합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아아. 나는 그제야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 대답해 주었다.
“기사님이세요. 여자분이시고요.”
로즈니의 집착이 어쩐지 무섭기까지 했지만 그만큼 같이 승마를 할 친구를 원하는 걸까 싶어 안쓰럽기도 해 보였다.
나도 한국에서 살 때 게임을 하면 꼭 주변의 친구 한둘을 끌어들여 같이 즐기고는 했으니까.
혼자 할 때도 물론 재미있었지만 아는 사람과 함께 할 때는 또 다른 묘미가 있는 법이다.
‘어쩌면 로즈니도 그런 것을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네.’
“아아…. 정말 너무너무 아쉬운 일이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살롱에 오셨을 때 바로 여쭤볼 것을….”
안타까움이 섞인 탄식을 흘린 로즈니가 가느다란 숨을 뱉으며 한 손으로 뺨을 감쌌다.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음. 내가 만약 세이린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고 같이 즐겁게 놀 생각에 들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채갔다면….’
그리 생각하자 나 같아도 상당히 아쉬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미 세이린에게 배운다고 한 걸 이제 와서 물리고 로즈니에게 배우겠다고 할 수는 없으니 어쩐다….’
나는 다른 어떤 수가 없을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제가 초심자라 많이 미숙하겠지만, 레이디 로즈니가 괜찮다면 수업이 아니더라도 언제 함께 승마를 즐기는 건 어떤가요? 제 생각에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초보와 함께 하는 건 즐거움보다 신경 쓰이고 번거로움이 더 앞서는 일이다.
그렇지만 로즈니는 애초에 나를 가르칠 생각까지 했었던지라, 그런 문제는 크게 개의치 않으리라 여기고 거침없이 제안했다.
내가 말을 꺼내자 일순 알 수 없는 격한 감정이 서린 그녀의 붉은 홍채가 번들거렸다.
“나쁘지 않다뇨.”
나는 정색하는 그녀를 보고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잘못 판단했나, 싶어 잽싸게 제안을 물리려는데 로즈니가 말을 잇는 것이 더 빨랐다.
“정말 좋아요. 꼭 그러고 싶네요. 그리고 딱히 승마가 아니더라도 공녀님과 가깝게 지내고 싶답니다.”
나는 즉답을 해오는 로즈니를 묘한 눈초리로 응시했다.
원래의 리엘리도 저택 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고 나 또한 아르반과 세이린을 제외하면 다른 귀족들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 때문에 여기 귀족들이 이렇게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로즈니는 내가 살았던 현대의 관점으로 봤을 때도 직설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직구로 말을 던지고 있었다.
이런 내 생각이 얼굴에 묻어났는지, 로즈니가 살포시 웃으며 물었다.
“제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씀드려서 당황하셨을까요? 불편하셨다면 말씀해 주세요.”
조곤조곤 말하는 로즈니의 기색이 아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분명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데… 어째서일까.’
방금 전까지는 감정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이었다면, 지금 그녀의 얼굴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뇨. 저도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기도 하고, 돌려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으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기쁘네요.”
내 대답에 잠시 말이 없던 로즈니가 곧 부드러운 어조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게 앞서 승마 이야기를 하던 그녀의 모습과 대조되어서, 나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기색을 면밀히 살펴 보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녀의 모습 중 현재가 가장 차분해 보인다.
그게 너무 낯설어서, 마치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로즈니가 아니라 다른 귀족 영애 같다는 생각마저 일게 만들었다.
‘내가 로즈니를 봤으면 얼마나 봤다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그녀를 마주한 것은 이번이 고작 두 번째였다.
그러니 내가 로즈니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로즈니는 밝고 해사한 표정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원래의 페이스를 찾기 바라는 마음이 컸다.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주제를 언급했다.
“레이디 로즈니의 이력 사항은 꼼꼼히 살펴봤어요. 작년 승마 경연대회에서 우승하셨고 그전에도 수상 경력이 상당하시던데, 저희 아몬도 잘 가르쳐주시리라 믿어요.”
말을 마치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 찰나의 시간 동안 그녀는 다시 만개한 장미처럼 화사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있었다.
“그럼요. 공자님께서 누구보다 훌륭한 승마 실력을 뽐낼 수 있게, 공녀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일게요.”
그녀의 해사한 표정에 만족감을 느낀 나 역시 작게 미소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