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내 입에서 드래곤이라는 말이 나오자 세바니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나 또한 무의식중에 그녀의 눈동자가 향한 방향을 바라봤다.
그 시선 끝에는 제 존재를 들켰기 때문인지 잔뜩 풀이 죽어 있는 율렌이 고양이가 식빵을 굽는 자세로 누워 우리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녀석은 우리의 눈길이 자신에게 꽂히자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내 잘못이야. 누가 들어오는 거 알았는데, 열쇠로 따고 들어와서 엘리 너인 줄 알고 숨지도 않았어.”
“아니야. 애초에 널 이렇게 허술하게 숨겨둔 내 잘못이니까 율렌도, 세바니도 신경 쓰지 마. 응?”
내가 이렇게 말했음에도 둘은 여전히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환장할 노릇이다.
나는 침체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일단 둘에게 서로를 소개해 주기로 했다.
“이렇게 알게 됐으니까 정식으로 소개할게. 이쪽은 율렌. 보시다시피 드래곤이고, 사정이 있어서 내가 데리고 있어.”
우선 세바니에게 율렌을 소개하자 그녀가 율렌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가씨의 전속 시녀인 세바니 튜나라고 해요.”
“그래…. 율렌이라고 한다.”
“네, 율렌 님.”
이제 보니 아까 앉아서 서로 통성명을 마쳤던 모양이다.
나는 율렌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세바니를 보고 작게 안도하며 말했다.
“자세하게 설명하긴 곤란하지만 세바니 너랑 에바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물론 아버지에게도.”
“네! 절대로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내친김에 에바를 불러서 율렌을 소개해 주었다.
에바는 반응이 큰 편이라 처음 드래곤을 데리고 있다고 말을 꺼냄과 동시에 저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의 반이 손에 가려졌음에도 잔뜩 상기되어 기대감 어린 표정이 드러나길래, 나는 슬쩍 담요로 감싸 안고 있던 율렌을 에바에게 보여주었다.
“어떡해!! 너무너무 귀여워요!”
나는 율렌이 귀엽다고 방방 뛰는 에바의 모습에 품 안의 작은 녀석을 쳐다봤다.
그러자 에바에게 ‘난 귀엽지 않아! 이건 유체여서 그렇지 원래는 위엄 있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고!’라며 역정을 내고 있던 율렌이 나를 올려다 봐왔다.
내게 안겨 위쪽을 올려다보는 율렌의 눈동자가 동글고 반짝이는 게 확실히 귀엽긴 했다.
“저, 아가씨…. 저도 드래곤 님을 한 번만 안아볼 수 없을까요?”
에바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내게 물었다.
양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간절한 표정으로 저리 말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율렌이 빽 소리치듯 말했다.
“그건 나한테 물어봐야지! 내가 무슨 엘리의 애완동물이라도 되는 줄 알아?!”
“앗! 죄송해요, 드래곤 님! 저 드래곤 님을 한 번만 안아보면 안 될까요?”
눈이 화잔등만큼 커진 에바가 물었지만 녀석은 매몰차게 소리쳤다.
“안 돼! 난 아무한테나 안기는 그런 하찮고 쉬운 존재가 아냐.”
“하, 한 번도? 딱 한 번도 안 되나요?”
하지만 율렌의 불허에도 의지를 꺾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에바가 끈덕지게 질척거렸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얼씨구. 단호히 말하고는 내 품으로 고개를 팩 돌리는 율렌의 행동에 헛웃음이 나왔다.
비싸게 구는 율렌이 어이없기도 하고, 상황이 웃기기도 해서 에바를 봤다가 다시 율렌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데, 한 번도 안 돼?”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에바를 눈짓으로 가리키자 율렌이 새초롬한 눈으로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정말이지….”
그러면서도 내심 에바가 신경 쓰이는지 얌전히 말려 있던 꼬리가 탁탁, 내 팔을 가볍게 두드려왔다.
“에바, 율렌 님이 싫다고 하시잖아. 그만해.”
“그치만….”
끈질긴 에바의 태도에 세바니까지 나서 그녀를 말렸지만 에바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율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에바의 집념에 굴복한 건지, 아니면 그냥 잔뜩 실망한 그녀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아무튼 심기 불편하게 움직이던 율렌의 꼬리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뭐, 그래도 칭찬해줄 만한 일을 하면 상으로 한 번쯤은 안겨줄 의향도 있어.”
녀석의 무심한 한마디에 에바의 고개가 단번에 들렸다.
“…정말요? 정말이죠?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꼭 저한테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아셨죠?!”
떡밥을 덥석 물어버린 물고기처럼 낚여버린 에바가 금세 기운을 차리고 의욕 넘치게 말했다.
그녀가 진정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아무튼 율렌은 내 방 안에서만큼은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서 슈크림을 먹고 있던 율렌이 입 안에 들어 있던 것을 그대로 물고 잽싸게 침대 아래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며칠 사이에 제법 익숙해진 듯한 그 모습이 조금 처량하고 딱해 보였다.
“들어와.”
율렌이 들어간 침대 아래쪽을 응시하다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시녀장이 내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바로 본론을 꺼내왔다.
“아가씨, 말씀하셨던 도련님의 승마 교사 리스트를 정리해 왔습니다.”
세이린에게 승마를 배우기로 결정했던 날. 아몬에게도 승마를 배우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지시해둔 바였다.
예상보다 보고가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무랄 만큼도 아니었기에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수고했어.”
나는 시녀장이 건네주는 리스트를 받아 곧장 펼쳐봤다.
이번에도 아몬의 가정교사를 모집하는 데 많은 귀족들이 지원했는지 서류가 제법 두꺼웠다.
“응?”
제일 첫 장에 기재된 이름이 낯설지 않아 잠시 들여다보던 나는 이윽고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 사실 그분의 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녀장은 내가 첫 장을 펼치자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했다.
그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도련님의 교사를 구하는 일이다 보니 여성분보다는 남성분을 우대하는 쪽으로 공고를 냈는데, 그 영애께서 꼭 도련님의 승마 교육을 맡고 싶다고 청하셔서요.”
시녀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곤란하다고 말씀을 드렸음에도 면접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셔서….”
그 말에 나는 들고 있던 이력서를 다시 확인했다.
[로즈니 멜라니스]
맨 위에 적혀 있는 이름은 몇 번을 다시 봐도 변함이 없었다.
전에 아몬의 옷을 대량으로 주문했다가 마음에 들어 직접 방문해 내가 입을 승마복을 구매했던 살롱의 주인이자, 승마복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여주었던 사람.
“진짜 그 레이디 로즈니라고?”
대충 훑어보니 승마대회에서 입상한 경력까지 있었다. 대단하다, 진짜.
승마복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승마에 미쳐 있을 줄이야….’
사실 살롱을 운영하는 것도 승마복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추측마저 일게 했다.
‘아니, 잠깐.’
생각해보니 좀 이상했다.
본인이 승마를 즐기는 것과 남에게 가르치는 것은 분명 다른 법이다.
그녀는 어째서 굳이 아몬의 승마 교사를 뽑는 공고에 지원한 걸까?
더군다나 로즈니는 살롱까지 직접 운영할 정도의 능력 있고 유능한 디자이너였다.
분명 매일을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 로즈니가 어떤 이유로 남성 우대 조건인 공고에 이렇게까지 집착을 보이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다른 이들의 이력서를 뒤적이다가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와 한참 동안 그녀의 이력서를 뚫어져라 살펴봤다.
나는 결국 치미는 궁금증에 굴복해 백기를 들었다.
“시녀장, 여기 레이디 로즈니께 편지를 보내.”
뭐, 약간의 변명을 보태자면 개중에 그녀가 가장 우수한 이력의 소유자라는 말을 하고 싶다.
실제로 내가 레이디 로즈니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이 리스트를 보았다고 가정하더라도, 내가 그녀를 선택했을 확률은 상당히 높다고 판단됐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내 명에 한 박자 늦게 답한 시녀장이 이내 물러갔다.
탁-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쏜살같이 침대 아래에서 튀어나온 율렌이 테이블 위의 손수건에 앞발을 쓱쓱 닦더니 다시 아까 먹고 있던 슈크림을 집어 입에 넣었다.
조그만 녀석이 슈크림을 하나 가득 입에 욱여넣으니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나는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렇게 맛있어?”
“그럼. 맛있으니까 먹지. 너도 와서 먹어.”
율렌이 작은 앞발로 내게 슈크림을 건넸다. 나에겐 작지만 율렌에겐 상당히 큰 슈크림이었다.
나는 몸을 수그려 입으로 슈크림을 받아먹었다. 하나만 먹을 건데 손에 슈가 파우더를 묻히기 싫어서였다.
그런 내 행동을 빤히 바라보던 율렌은 큰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한 개를 더 건네왔다.
“자.”
“…어, 그래. 고마워. 근데 난 이거로 끝. 식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배부르네.”
그래도 성의를 봐서 두 번째 슈크림까지는 얌전히 받아먹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혼자 슈크림을 우물거리며 먹던 율렌이 문득 입을 열었다.
“요즘은 옛날보다 아티팩트가 흔해지긴 했나 봐.”
“응?”
“저 문. 예전에는 황궁에서만 쓰던 건데 요즘에는 대귀족의 저택에서도 사용하네.”
“…저게 마법이 걸려있었어?”
“응, 몰랐어? 방음 마법이 걸려있는데 바깥에서 두드리면 일시적으로 마법이 해체되는 장치가 돼 있잖아.”
“아….”
그랬니. 전혀 몰랐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방문을 바라봤다.
생활 곳곳에 스며있는 마법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 놀라게 하곤 했다.
***
“아가씨, 멜라니스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금방 내려갈 테니까 차랑 다과 먼저 내어드려.”
“알겠습니다.”
나는 시녀장의 말에 답하며 옆에 있던 에바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에바, 문단속 알지?”
“그럼요, 아가씨!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불끈 그러쥐고 장난스레 말하는 에바에게 웃어 보이고는 2층의 외빈용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응접실 앞에 서자 뒤에 있던 세바니가 앞으로 나서며 노크를 하고는 내가 왔음을 안쪽에 고했다.
안에서 들려오는 답을 듣고 그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 레이디 로즈니가 벌떡 일어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