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47화 (47/153)

47화.

나는 그대로 침대에 풀썩 쓰러져 생각에 잠겼다.

내 위로 율렌이 꼬물꼬물 기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 눈을 감고 끙끙거렸음에도 마땅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마력을 충전하기 위해 내게 왔다는데 다른 방에 숨겨둔다면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나랑 가까운 곳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에 빠져 있는데, 얌전히 내 배 위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율렌이 제 뾰족한 주둥이 끝으로 내 턱을 콕, 하고 살짝 찔러오는 감각에 눈을 떴다.

“…뭐야? 왜?”

“너희 집에 흑마법사가 있어?”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황금색 눈동자는 정말 맑고 투명했다.

나는 유리알 같은 율렌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뜬금없는 질문에 대답했다.

“아니. 내가 알기로는 없는데.”

“흠… 그럼 몰래 흑마법에 손을 댄 놈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판타지나 로판에 간혹 등장하는 불길한 힘을 다루는 마법사를 대체로 흑마법사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 소설, ‘새장 속의 푸른 새’에도 흑마법사는 존재했다.

다만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기에 나 역시 그들의 존재 여부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 저택에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느껴져. 검은 마력이.”

율렌의 황금빛 홍채가 번뜩였다.

그리고 보니 나도 공작저에 돌아오고부터 거슬리는 묘한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음습하고, 진득한 기운.

요즘 들어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불쾌한 느낌이 들어 눈살을 찌푸리고는 했다.

하지만 단순히 여행을 다녀와 피곤한 나머지 그런 것이라 치부하고 넘겼었다.

“사실 나도 집으로 돌아오고부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네가 말한 흑마법이랑 관계가 있는 걸까?”

“아마도. 신성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이라면 느끼기 힘들겠지만 너는 내 마력과 신성력을 같이 받아들였으니까, 흑마법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냐.”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율렌을 허벅지에 올리고 앉았다.

내가 자세를 바꾸는 동안에도 율렌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보아하니 하루 이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 마력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를 통 모르겠단 말이지. 보통 흑마법사를 중심으로 마력이 퍼져나가기 마련인데 이상해.”

녀석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력이 밀집된 곳을 모르겠어. 다만 아주 오랫동안 이 저택에서 머물렀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이제는 거의 혼잣말을 하는 듯한 율렌을 내려다보며 나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원작은 대체로 이 로베르 공작저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위주로 돌아갔기 때문에 신성력이니, 마법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애초에 완결까지 보지도 못했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완결은 무슨, 중반부까지는 봤던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마저도 확실치 않았다.

“지금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으니 당장 위험할 건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을 위해 최근에 저택을 떠난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는 게 어때?”

“네가 보기에 그 흑마법사가 최근에 이곳을 떠난 것 같아?”

“사실 장담할 수는 없어.”

“…….”

“흠… 이 정도의 잔여 마력이 남아 있다는 건 흑마법으로 대성한 놈이 장기간 이곳에 머물렀거나, 어중간한 놈들이 드글드글하게 모여 있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은데… 아,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겠네.”

“…그게 뭐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음습한 기운을 품은 놈들이 이 저택의 어딘가에서 바퀴벌레처럼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모여 살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치가 떨릴 만큼 날 불쾌하게 만들었다.

‘최근에 사라진 놈, 그리고 혹시 집단으로 이탈한 이들이 있는지 모두 확인해야겠어.’

그래야 내가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결심을 다지고 있는 그때, 밖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와 나와 율렌은 동시에 서로를 응시했다.

내가 말없이 이불을 들어 올리자 율렌이 그 안으로 쏙하고 들어갔다. 환상의 호흡이었다.

율렌의 꼬리 끝까지 모두 가려진 것을 확인한 나는 노크한 사람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야?”

“아가씨,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났는데 말씀이 없으셔서 들러봤어요.”

헉. 밖에서 들려오는 세바니의 목소리에 곧장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너무 놀라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뛰쳐나가려다가 순간 율렌의 존재를 떠올리고 머뭇거렸다.

아직 얘를 어떻게 숨길지 방법을 강구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방을 비울 일이 생겨버렸다.

그렇다고 아몬과 식사를 하는데 율렌을 바구니에 넣어서 가지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일단 다시 율렌을 드레스 룸에 숨겨 두고 부랴부랴 식당으로 내려갔다.

***

입에서 씹히는 고기가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율렌이 신경 쓰여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이 티가 났는지 아몬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내 안부를 물어왔다.

“누나, 몸이 안 좋으세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아, 아냐. 괜찮아. 신경 쓰게 해서 미안. 계속 식사하자.”

“…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식사가 끝나고 주치의를 부르시는 게 어떨까요.”

아몬의 근심 어린 표정에 급히 손사래 치며 방긋 웃어 보였다.

“으응. 정말 괜찮아.”

아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과도하게 율렌의 존재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표정 관리에 공을 들였다.

‘드레스 룸도 잘 잠가두고 왔는데, 왜 이렇게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거지?’

내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는 공작.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시녀장과 전속 시녀들, 청소를 담당하고 있는 시녀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공작은 저택을 비웠고 시녀장이 갑자기 내 방에 들어올 일은 없었다.

더불어 지금은 청소할 시간도 아니었기에 담당 시녀 역시 제외, 에바와 세바니가 아니면 드레스 룸에 들어갈 만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따로 시킨 일도 없는데 드레스 룸에 들어갈 리가 없지.’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묘한 불안감에 요동치는 가슴을 달래며 얼굴이 굳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피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을 눌러두고 평소와 같이 아몬이 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내 방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잘 닫혀 있어야 할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어야 해.’

그렇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안쪽에서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감지한 나는 즉각 문을 열고 드레스 룸 쪽으로 뛰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불길한 예감은 비껴가는 법이 없었다.

분명 식사하기 전에 잠가뒀던 드레스 룸의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잽싸게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이상한 광경에 순간 뇌가 정지했다.

드레스 룸 안에는 세바니가 무릎을 꿇고 앉아 율렌과 마주하고 있는 괴상한 상황이 연출되어 있었다.

둘의 고개가 동시에 나를 향했다.

“아, 아가씨…!”

댕그랗게 커진 두 쌍의 눈동자를 내려다보자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세바니가 잽싸게 일어나더니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이걸 어쩐다. 정말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아냐, 어쩌면 이게 더 좋을 수도 있어.’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들켜버린 이상 차라리 에바랑 세바니에게는 율렌의 존재를 밝히는 편이 나을 것도 같았다.

어차피 내 방에 아무도 들이지 않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두 사람에게는 율렌에 대해 말해주는 게 나로서는 훨씬 편할 것이었다.

잠시 둘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세바니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가씨… 정말 죄송해요. 제가 아침에 아가씨 숄을 꺼내면서 드레스 정리도 같이한다는 게….”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세바니는 창백한 낯빛으로 더듬더듬 정황을 설명해 나갔다.

“쇼, 숄을 꺼내 두기만 하고… 정리하는 걸 깜빡했어요. 그래서, 그게 생각이 나서 들어왔는데….”

그에 비로소 정신이 든 내가 그녀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세바니는 맹수를 마주한 토끼처럼 정차 없이 흔들리는 다홍빛 눈동자를 내리깔며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죄,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아가씨…. 실수한 것도 죄송하고, 일부러 잠가두신 문도 제가 멋대로 열고 들어오고…. 여, 여쭤봤어야….”

세바니가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이고 있어서 표정을 확인하기는 힘들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의 떨림이 점차 심해지더니, 급기야 울먹이기까지 했다.

아니, 그 정도로 화나지는 않았어…!

그냥 이 상황이 주는 당혹감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인데,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화 안 났으니까 고개 들어봐. 응?”

내가 부드럽게 타이르자 푹 꺾여 있던 세바니의 다홍빛 머리가 움찔, 하고 떨렸다.

그녀가 앞으로 모아 쥐고 있는 손가락에 필요 이상으로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세바니가 놀라지 않게 조심히 손을 뻗어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세바니의 고개가 약간 들리며 눈물이 가득 고인 주홍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라도 닦아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수건을 찾았다.

‘아, 집 안이라고 손수건 안 챙겼지.’

가까운 서랍장에 손수건이 들어 있었지만 울고 있는 세바니를 두고 가지러 가기도 뭐 했다.

“울지 마. 실수할 수도 있지. 들어가지 말라고 언질 안 한 내 잘못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같이 지내면서 알게 됐는데, 에바와 세바니는 닮은 듯하지만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에바는 세바니보다 활발하고 손이 야무졌으며 세바니는 에바보다 차분하고 여린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에바는 대체로 실수가 없는 반면 세바니는 자잘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소매 끝으로 닦아주려다가 그렇게 넉넉한 옷이 아니어서 결국 손으로 조심히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그러자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세바니가 나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정말요?”

“그럼. 그리고 어차피 너희 둘한테는 얘기할 생각이었어. …드래곤에 관한 거.”

여전히 내 눈치를 보며 물어오는 세바니에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대답했다.

물론 얘기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치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