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것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으니까.’
“근데 아르반은 누가 널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허술하게 들려 보낸 거야….”
내가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리자 율렌이 대답했다.
“내가 엘리한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어.”
그리고는 테이블에서 폴짝 뛰어 내 품에 뛰어들길래 얼결에 안아 들었다.
“너, 떨어지면 어쩌려고 이렇게 예고도 없이 뛰어들고 그래!”
“괜찮아. 날개가 폼은 아니거든. 그리고 다치면 뭐 어때. 금방 치료할 수 있는데.”
녀석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금방 치료할 수는 있어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 가능하면 안 아픈 게 좋지.”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기도 했다.
말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 율렌의 신성력 덕을 많이 봤었지만, 그래도 역시 애초부터 아프지 않은 게 최고였다.
녀석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런가.”
“응, 그렇지. 근데 진짜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온 거야?”
“아, 주인이랑 있으니까 영 마력이 회복될 기미가 안 보여서.”
“…그래서?”
“그래서 마력이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는 여기서 지내고 싶다고 했어. 아, 이건 주인이 전해달래.”
…누구 마음대로?
커다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율렌을 내려다보며 순간 골이 아파졌다.
하지만 일단 율렌이 바구니 안쪽에서 꺼내 내미는 편지를 우선 확인하기로 했다.
나한테 한마디 언급도 없이 갑자기 이런 폭탄 같은 선물(?)을 보낸 아르반이 과연 어떤 내용을 적어 보냈을지 궁금했다.
편지의 내용은 정말 간략하기 그지없었다.
율렌의 회복이 나와 있을 때와는 현저하게 차이가 나기도 하고, 본인도 내게 가고 싶어 하는 눈치이니 일단 이렇게 챙겨왔다는 것이다.
‘…장난해?!’
나는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끝까지 읽기 위해 우그러진 편지의 추신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내가 원치 않는다면 다시 돌려보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곤란해, 곤란하다고!!’
나는 곁눈질로 율렌을 살폈다.
나와 함께 편지를 보기 위해 고개를 쭉 빼고 있는 녀석의 작은 뒤통수가 불쌍해 보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매정하게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흔쾌히 여기서 지내라고 말하자니 앞날이 심히 걱정스러웠다.
그러다 불현듯 한 가지 궁금증이 차올랐다.
“…근데 너는 성검이랑 묶여 있는 거 아냐? 나랑 지내게 되면 아르반이나 성검이랑도 멀리 떨어져 있게 되는 건데 상관없어?”
“그런 건 상관없어. 성검은 나와 주인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와 같은 역할을 해줄 뿐이니까. 그리고 마력이 없더라도 성검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기도 하고.”
“그래?”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이 없자 율렌은 날 올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싫어?”
분명 담담하게 울리는 목소리였음에도 평소와 다른 뉘앙스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왜 싫겠어. 당연히 좋지.”
망설임 없이 답하자 율렌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감촉이 팔뚝을 타고 전해져 왔다.
‘그래. 방금 망설였다면 율렌이 상처받았겠지. 잘한 거야.’
좀 귀찮아지면 어떤가. 어차피 마력만 회복하면 될 테니 오래 머물지도 않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나는 율렌을 꼭 끌어안았다.
***
나는 드레스 룸에 율렌을 숨겨두고 다시 응접실로 향했다.
이미 청소하는 시간은 지났으니 누가 들어갈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몰라 문도 잠가두고 나왔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다 식어버린 차를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대화를 이어가던 중, 세이린이 문득 말을 꺼냈다.
“전에 산맥에서 돌아오면 승마를 배우시겠다고 하셨었는데, 혹시 시작하셨습니까?”
아차. 돌아오면 정식으로 승마를 배워보려 했었는데, 여태 잊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몬의 가정교사가 아니라 내 가정교사를 구해야겠네.
“아직이요. 이제 시작해야죠.”
모두 돌아가고 나면 시녀장에게 언질을 해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세이린이 말을 걸어왔다.
“그럼 따로 생각해 두신 교사가 있으신가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 이제부터 알아볼 생각인데….”
“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나는 세이린의 제안에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어차피 공자님의 훈련이 있는 날이면 호위로 계속 동행할 것 같은데, 공자님이 검술을 배우시는 동안 공녀님께서는 제게 승마를 배우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저야 물론 좋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경의 본분이….”
“이제 공녀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호위라고 해봤자 그저 각하의 직위가 있으시니, 명목상의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걸.”
“음. 그렇긴… 하죠.”
실상 아르반을 능가할 만한 실력자는 아직은 꼬꼬마에 불과한 아몬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주 먼 미래의 일이지만.
“공녀님께서 말씀하시면 각하께서도 분명 흔쾌히 받아들여 주실 겁니다.”
나는 세이린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엄청나게 끌리는 제안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이린한테 승마를 배운다니.
하지만 그녀의 제안처럼 아르반이 순순히 이런 부탁을 받아들여 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번 말씀드려볼게요.”
안된다고 하면 다른 선생을 구하면 되는 일이고, 된다고 하면 그보다 좋을 수 없을 것이다.
남의 호위 기사에게 사적인 일을 시키려는 부탁이다 보니 좀 주저하게 되지만 그래도….
‘말이나 꺼내 보는 거지. 어차피 거절당할 생각하고 가는 거니까.’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두 시간이 흘러 있었다. 슬슬 훈련이 마쳤을 시간이다.
***
“감사합니다. 각하.”
“수고했다.”
연무장에 도착하니 아직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나는 방해되지 않게 옆쪽에서 조용히 기다리다가 둘이 인사를 나누는 소리에 슬쩍 다가갔다.
“고생하셨어요, 각하. 아몬도 수고 많았어.”
내 말에 짧게 답하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미소 지어 보이고는 아르반에게 눈길을 한 번 주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한 번 바라봤을 뿐인데, 어떻게 알았지?’
나는 조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곧장 입을 열었다.
“그… 각하, 혹시 괜찮으시다면 아몬이 훈련을 받을 때 제가 아델 경에게 승마를 배워도 괜찮을까 해서요.”
놀라서 바로 입을 열긴 했는데, 말하고 보니 너무 뜬금없는 부탁이었나 싶어 겸연쩍어졌다.
“정식으로 교사를 구하시는 쪽이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물론 그렇긴 하지만… 아델 경도 충분히 승마에 능하시고, 기왕이면 아는 사람한테 배우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나는 민망한 마음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아델 경은 각하의 호위로 왔으니 이런 부탁드리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음, 뭔가 말을 할수록 점점 더 내가 몰염치한 사람 같다는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역시 괜히 말했나 싶어 실언이었다고 사과하려는데, 아르반이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아델만 괜찮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응?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동시에 그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아르반은 늘 그렇듯 무감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왠지 살짝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정말 괜찮아요?”
“예. 가만히 서서 자리만 지키는 것보다는 효율성 있는 일을 하는 편이 아델에게도 더 좋겠죠.”
“고마워요.”
나는 그에게 웃어 보이면서도 조금 의아한 심정을 느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몰염치한 부탁이었는데 들어줄 줄이야.
‘그리고 보면 아르반은 항상 이런 식이었지.’
내가 그에게 제안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어주고, 그에게 득 될 것 하나 없는 이런 요구를 받아주고.
‘나한테만 무른 듯이 보이는데… 착각이겠지.’
…그래, 그가 내게 다정히 굴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다른 쪽으로 빠져드는 생각을 돌리고자 고개를 내저었다.
“그보다 바구니는 어떻습니까. 가지고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 네. 한동안은 제가 보관하고 있을게요.”
율렌을 바구니라고 칭하다니.
하긴, 여기는 오픈 된 공간이니 녀석의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가 율렌의 존재를 언급하자 나는 아까 내가 느꼈던 놀람과 당황스러움을 떠올리며 그에게 투덜거렸다.
“그래도 다음번에는 미리 언급이라도 좀 해주세요. 정말 놀랐다고요.”
“죄송합니다. 본래 들고 올 생각은 없었는데, 제가 공작저로 간다고 말하니 갑자기….”
아르반이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을 따라가 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아몬을 발견한 나는 그의 말에 대강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아무튼 제가 잘 보관하고 있을게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아르반과 기사들이 돌아가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커다란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은빛의 새끼 드래곤.
‘…대체 얘를 어떻게 숨겨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내가 저를 바라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자 율렌이 배를 발라당 뒤집고 누운 그대로 말문을 텄다.
“왜 그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있지. 너라는 고민이.
“아니, 그냥…. 아! 율렌 너 아르반의 저택에서는 어떻게 숨어 있었어?”
비록 이틀뿐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집에서 율렌이 지냈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야 주인이 침실에 있으면 침실에 같이 있고, 집무실에 있으면 집무실에 같이 있었지.”
“아니, 아르반이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하인이나 시종들도 자주 드나들었을 거 아냐. 어떻게 안 들키고 숨어 있었냐고.”
“응, 그게….”
율렌은 갑자기 내 눈을 피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서랍에 들어가 있었어.”
“서랍?”
“주인 책상에 나 정도는 들어갈 만한 열쇠 달린 서랍이 있더라고…. 그래서 주인이 밥 먹으러 가거나 자리를 비우면 거기서 자고 있었어.”
“…….”
“적당히 숨어 있으라고 하는데 숨을 만한 곳이 없어서, 그냥 거기 들어가 있겠다고 했어….”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율렌의 말에 나는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세상에… 아르반도 정말 어지간하다 싶었다.
무신경한 것도 정도가 있지. 제집에서 숨을 곳 하나 지정해주지 않고 알아서 숨어있으라니.
“너는 그렇다고 서랍에… 아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녀석으로서는 급한 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럼 나는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나는 아르반과 같은 방법으로 율렌을 숨길 수 없을 듯했다.
아마 몇 주, 혹은 몇 달을 함께 할지 모르는데, 그와 같은 방식으로 율렌을 숨기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뿐더러 애가 너무 불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