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대체로 귀족 집안 아이들은 어머니의 인맥을 따라 친구를 사귄다.
그도 아니면 형제자매 또는 친인척의 소개로 관계를 꾸려나가거나.
하지만 내가 알기로 공작은 외동이었고, 공작부인은 외국 출신이라 가까운 친척이 없었다.
리엘리 역시 어릴 적 공작부인이 죽고 공작이 맛이 가며 그나마 교류하던 몇몇 가문과도 점점 연락이 끊기다가 결국 외톨이 신세가 되었다.
그러니 아몬의 친구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내가 사교계에 데뷔를 해서 인맥을 만들고, 그들의 아이들 또는 동생들을 초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사교계에 데뷔하게 되면 가장 먼저 아몬 또래의 아이들이 있는 가문을 공략해야겠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몬과 시간을 보내다 오후가 되어서는 에바와 세바니와 함께 방에서 수다 삼매경에 들어갔다.
아몬은 수업을 받고 있을 시간이고 공작은 아직 귀가하지 않아 셋이 둘러앉아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눴다.
그렇게 평온한 하루를 마감하며 행복하게 눈을 감았더랬다.
***
“아가씨, 대공 각하께서 도착하셨어요!”
“벌써? 아, 시간 왜 이렇게 빠르니.”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을 때에는 시간의 흐름이 너무도 빨랐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니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고 아쉬운 것이겠지만.
또 이런 조용하고 소소하기만 한 일상이 반복되면 지루하다 느낄 것이 뻔했다.
‘그러니 이 평온한 하루의 활력소가 되어줄 비타민을 만나러 가볼까!’
오늘이 아몬의 첫 수업이니 그 핑계로 아르반에게 인사라도 하고 올 생각이었다.
나는 재빨리 연무장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남다른 기럭지의 소유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르반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던 아몬도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진지한 표정 뭐야! 진짜 귀여워 죽겠네!
아직 내가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둘이 뭔가 얘기를 나누는데 아몬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그마저도 내 눈에는 깜찍하기 그지없어 보였지만.
얼른 가서 인사만 하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에 잰걸음으로 다가가다 한쪽에 대기 중인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아델 경…? 릭스 경?”
놀라 육성으로 중얼거리자 둘의 고개가 순식간에 내 쪽을 향했다.
꼭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에 내가 눈만 끔뻑이고 서 있자, 내 존재를 인식한 두 사람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됐다.
그리고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는 아르반의 시선 역시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주변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리자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돌아본 아몬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정신이 든 나는 거의 뛰다시피 걸어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세이린과 릭스가 반가워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대공인 아르반을 두고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내가 여기서 예절을 다 지키고 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건 지키고 살아야지.’
본래는 아르반을 보려고 나온 것이었는데, 더 반가운 얼굴들이 있으니 내 신경은 자연스레 그들 쪽으로 집중됐다.
나는 세이린과 릭스와 눈인사를 주고받으면서도 발은 아르반을 향해 착실히 내디뎠다.
아르반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곧바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좀 더 일찍 나와 봤어야 했는데, 수업 중간에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방해라뇨.”
아르반과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자 옆에 있던 아몬이 입을 열었다.
“누님. 어쩐 일로 이런 곳까지 나오셨습니까.”
동글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하는 모습이 꼭 다람쥐 같다.
머리 색도 갈색이고,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살이 통통해 더욱 그랬다.
저번에 아르반이 있을 때도 그렇고, 아몬은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면 첫 만남과 같이 깍듯한 말투를 사용하곤 했다.
그때는 그게 거북하게만 느껴졌는데, 이제는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는지 말투 따위 상관없이 귀엽기만 해 큰일이었다.
“내 동생이 처음 수업받는 날이니까 인사차 들러봤지. 귀하신 분께 부탁드려 놓고 얼굴도 비치지 않는 건 경우가 아니잖니.”
뭐, 딱히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짜 본심은 따로 있었기에 그저 웃었다.
비록 그 본심마저도 세이린과 릭스의 존재로 인해 변질되어 버렸지만….
“그럼 더 방해되지 않게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런데 각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시기 전까지 아델 경과 릭스 경을 제가 빌려 가도 될까요?”
두 사람 모두 기사이니 그의 호위 명목으로 따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에시트 산맥에서 여러 몬스터 무리를 만나며 아르반에게 호위라는 것은 사실상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버렸다.
‘저 남자가 어째서 제국 최고의 검사라 불리는지를, 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까.’
그 덕에 나는 양심의 가책 없이 아르반에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러십시오.”
“고마워요!”
흔쾌히 답하는 아르반에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아몬에게 격려의 말을 남기고 자리를 벗어났다.
사실 자리를 뜨지 않고 이곳에서 수다를 떨 수도 있겠지만 그럼 아르반에게도, 아몬에게도 여러모로 신경 쓰이고 방해가 될 것이 뻔했다.
나는 곧장 세이린과 릭스를 이끌고 내 방의 응접실로 향했다.
우리는 연무장을 벗어날 때까지 고요한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나 연무장을 벗어남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봇물 터지듯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공녀님과 그런 식으로 갑자기 헤어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사실 저도 당황스럽긴 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대로 다시 뵙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릭스가 조잘거리자 세이린이 맞장구쳤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양심이 찔려 왔다.
“미안해요. 진짜…. 저도 그런 식으로 헤어질 생각은 없었는데, 사정이 좀 있었어요.”
내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하자 둘은 내가 울적해졌다고 여긴 모양이다.
세이린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뇨! 공녀님께 사과받고자 드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맞아요! 그냥 너무 아쉬워서 그랬던 거니까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공녀님.”
릭스도 덩달아 높은 목소리로 말하며 반대쪽에 붙어왔다.
“정말요?”
내가 둘을 한 번씩 힐끔거리며 물어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이죠.”
“당연하죠, 공녀님!”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귀여워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럼 우리 가서 맛있는 간식 먹으면서 얘기나 해요.”
내 제안에 양쪽에서 들려오는 긍정의 답을 들으며 씩 미소 지었다.
내가 웃어 보이자 세이린과 릭스 역시 밝은 표정으로 다시 말을 붙여왔고, 우리는 다 같이 흥겨운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두 기사를 대동한 채 방으로 들어서자 에바와 세바니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볼을 발갛게 붉히며 좋아했다.
내가 손님을 데리고 온 게 처음이라 그런지 보통 때보다 신이 나 보이는 아이들이 다과를 준비하겠다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 응접실로 둘을 안내한 나는 다과가 준비되기도 전에 대화의 꽃을 피워갔다.
산맥에서 갑자기 나와 아르반과 헤어지고 그들끼리 돌아가는 길에 몬스터 무리를 만났다는 일.
그리고 기사들이 수도의 대공저에 당도했을 때 간발의 차로 먼저 도착해 있던 아르반을 보고 그들이 얼마나 황당했는지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정말 우연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던 나는 세이린의 발치에 놓여 있는 익숙한 물건을 발견했다.
‘바구니!’
두 사람이 반가워 들고 있는 물건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다.
바구니를 뒤늦게 발견한 나는 삽시간에 불안해졌다.
더구나 한번 존재를 인식하니 계속 그쪽으로 눈길이 가는 것을 막기가 힘들었다.
결국 세이린에게 바구니가 무엇인지 물어보려는데,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다과를 가져왔어요.”
“아, 들어와.”
에바와 세바니가 앞에 다과를 세팅하는 동안에도 나는 바구니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아이들이 물러가자 세이린이 제 발치에 내려두었던 바구니를 내게 불쑥 건네왔다.
“이게 뭔지 궁금하셨어요? 계속 쳐다보시던데.”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세이린에게 바구니를 건네받았다.
‘일단 주니까 받기는 했는데….’
내 짐작이 맞다면 여기서 확인해 볼 수 없는 내용물이 담겨 있을 것이다.
“각하께서 공녀님께 전달하라 이르셨던 물건입니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말씀이 있어서 저희도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세이린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잇는 동안 나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바구니 뚜껑을 조금 열어 손을 집어 넣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익숙한 비늘이 만져졌다. 덤으로 내 손에 제 얼굴을 문지르기라도 하는지 매끄러운 비늘이 비벼지는 묘한 느낌까지.
나는 율렌의 머리로 추정되는 곳을 한 번 쓸어주고는 바구니에서 손을 빼냈다.
그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자 차를 마시던 세이린과 케이크를 열심히 퍼먹고 있던 릭스의 시선이 내게로 모여들었다.
“저, 잠시만 자리 좀 비울게요. 미안해요. 이거… 방에 보관하고 금방 돌아올 거니까 편하게 먹고 있어요.”
“예.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그러세요, 공녀님.”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하자 둘은 의아한 듯했지만 순순히 나를 보내주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자리를 벗어나는 동안 바구니를 바라보는 것이, 이게 뭐지 상당히 궁금한 눈치들이었다.
사실 나라면 진작 이게 뭔지 물어보고도 남았을 텐데, 아르반에게 받은 명령 때문인지 끝까지 묻지 않는 그들의 행동에 조금 안도했다.
‘율렌을 대체 뭐라고 설명할 길이 있어야지….’
나는 방으로 돌아와 급히 드레스 룸으로 향한 후, 문을 잠갔다.
그리고 테이블에 바구니를 올려 뚜껑을 열기가 무섭게 곧바로 율렌이 튀어나와 투덜거렸다.
“아니, 바구니를 보자마자 나인 거 알아봐야 하는 거 아냐?”
“저기 기사들이랑 얘기하느라 바구니가 있는 줄도 몰랐어. 근데 여기까진 왜 온 거야?”
나는 정말 궁금하고 의아해서 물어본 것뿐이었다.
“뭐야….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이라도 왔어? 나 안 반가워? 응? 쟤네는 엄청 반가워하는 것 같더니!”
하지만 율렌은 내가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안 반갑긴 왜 안 반가워. 당연히 반갑지.”
다만 고작 이틀 만에 다시 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웠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