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반갑군, 공자.”
아몬은 누님의 품에 안긴 채 카넬로웰 대공이라는 남자를 보았다.
이렇게 누군가의 품에 안겨 인사를 하는 건 굉장히 실례되는 행동이라 배웠지만 누님도, 그리고 눈앞의 이 대공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대공은 무례를 지적하는 대신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이러한 상황을 눈감아주겠다는 의사표시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아몬은 그런 대공의 유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의아해하면서도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대공 각하. 로베르 공작가의 둘째, 아몬 로베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록 말뿐인 인사였지만 대공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들였다.
아몬은 조심스럽게 대공과 제 누님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아까 누님께서는 분명 대공을 이름으로 부르려고 하셨어.’
재빨리 정정하기는 했지만 아몬은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눈치챘다.
‘…대공과 그만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계신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대공이 자신들의 무례를 저리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 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누님께서도 이제 성인이 되셨으니 대공 같은 남자를 만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아몬은 순식간에 가라앉은 기분을 느끼며 아이답지 않은 우울한 눈으로 대공을 주시했다.
제국의 정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아몬이었지만 아르반 카넬로웰의 이름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제국의 전쟁 영웅이자 가장 강한 검사로 정평이 나 있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거물급 인사이니만큼 누님의 짝으로서도 손색이 없으리라.
‘하지만 왜일까.’
조금 전까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쳐버렸다.
아이는 제 누님의 목을 더 꽉 감싸 안아 어딘가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그런 아몬의 속을 모르는 리엘리는 자신을 꼭 끌어안아 오는 아몬의 행동에 마냥 좋아하며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서로 상반되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아몬과 리엘리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아르반에게, 리엘리가 물었다.
“이왕 오신 김에 식사라도 함께 들고 가시는 게 어떠세요?”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지만 아직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더구나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고, 밖에서 이른 점심을 먹은 뒤 곧장 달려온 까닭에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공작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빨리 친해지는데 같이 밥 먹는 것만 한 게 없지.’
리엘리는 눈을 빛냈다.
어차피 아르반은 카넬로웰 영지에 있는 저택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수도 내에 있는 저택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니 귀가 시간이 많이 늦어지지도 않을 터.
또한 여기까지 자신을 바래다주는 배려를 보인 아르반을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아르반은 자신의 대답에 다시 한번 활짝 웃음꽃을 피워내는 리엘리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아몬은 그런 두 사람을 지긋이 바라보다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어쩐지 뱃속이 뒤엉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리엘리는 아몬을 안고 있는 상태 그대로 식당까지 이동하려 했지만, 아몬은 제 누님을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자신이야 이렇게 이동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무거운 자신을 들고 식당까지 향하다간 그녀의 가냘픈 팔이 버텨내지 못할 것이었다.
리엘리는 아몬을 내려주면서 한껏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몬은 그런 누님에게 웃어 보였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아쉬운 것은 아몬 자신이었다.
***
나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나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입을 열었다.
“아몬, 사실 여기 계신 카넬로웰 대공 각하께서 네 검술 스승이 되어주시기로 했어.”
내 말에 아몬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살짝 미소를 머금고는 의연한 얼굴을 해왔다.
“그랬군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누님.”
“아냐, 난 그냥 각하께 부탁만 드렸을 뿐인걸.”
내가 가볍게 웃어 보이자 반사적으로 마주 미소 지은 아몬이 아르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공 각하.”
“리엘리 공녀의 말로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재능이 뛰어나다고 들었다.”
“누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그렇습니다. 검을 잡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많이 미숙합니다.”
“그건 직접 보고 판단하도록 하지. 난 그리 친절한 스승은 되지 못할 테니 알아서 잘 따라와야 할 거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건조하기 그지없는 대화였다.
하지만 아르반의 앞이라고 반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아몬의 모습이 내게는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셋이 함께하는 자리치고는 무난하게 식사를 마쳤다.
나는 아몬을 먼저 올려보내고 아르반을 배웅하러 나갔다.
찬찬히 걸으며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면 좋을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의외로 아르반이 먼저 입을 열어왔다.
“공자의 수업은 이틀에 한 번씩 진행할까 합니다. 훈련이 고될 테니 제가 공작저로 방문하도록 하죠.”
“네, 알겠어요. 그럼 모레 다시 방문하시는 건가요?”
“예.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쉬세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율렌도 잘 챙겨주시고요.”
마지막으로 율렌에 대한 당부를 작게 속삭이고는 웃어 보였다.
아르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마차에 올랐다.
그의 마차가 작은 점이 되어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던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 아몬을 위해 산 검을 들고 곧장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작게 노크를 하니 안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가 저택을 나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고 있던 아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아몬도 내 손에 들린 검을 봤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선물이야. 오는 길에 사다 준다고 말했었잖아.”
나는 아몬에게 검을 내밀며 말했다.
아몬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내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왔다.
그렇게 화려하지도, 투박하지도 않은 형태의 검집을 양손으로 잡은 아몬은 그 검이 마치 귀중한 보검이라도 되는 것처럼 겉면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감사… 합니다. 평생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응? 하하,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건 기쁘지만 검은 사용하라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만 누나가 선물해 주신 걸 함부로 다룰 수는 없는걸요.”
“괜찮으니까 편하게 써. 네가 그 검이 손에 맞지 않을 만큼 크면 더 좋은 검을 사줄게. 그러니까 아낀다고 보관하고만 있지는 말고.”
나를 올려다보는 아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감동받은 듯한 아이의 모습에 활짝 웃어 보였다.
사실 아몬이 지금 입고 있는 옷부터 방 안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까지 따지고 보면 내 명령으로 구매한 것들이다.
그런데 검에만 유독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선물이라는 의미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너무 귀여운데…!’
나한테 처음 받아보는 선물이라 소중하게 여기겠다는 말도 해주고.
생각해 보니 아몬의 입장에서는 처음 받아보는 선물일터였다.
음, 난생처음 받아보는 선물이 검이라니….
더 신경 써서 좋은 물건을 사다 줬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몰려왔지만 그 생각은 금세 증발해 사라졌다.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꼭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되어 누나를 지켜드릴게요.”
깜찍하기 그지없는 아몬의 발언에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며 감동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어린 아들이 엄마에게 제가 힘도 세지고 덩치도 커지면 꼭 지켜주겠다는 말을 들으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너무 뿌듯하고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어…!’
가만히 있으면 정말 욕망을 참지 못하고 깨물어버릴 것도 같았다.
“정말? 너무 기쁘다. 우리 아몬이 누나를 지켜준다는 말도 다 해주고! 어쩜 이렇게 예쁜 말을 할까.”
누굴 닮아서 이리 예쁜지 모르겠다. 리엘리와 공작은 아닐 테니 아마 죽은 공작부인을 닮은 걸지도?
나는 오늘도 예쁜 말만 입에 담는 꼬마 천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몇 번 끌어안다 보니 이제는 포옹도 제법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품에 안겼다 나온 아몬의 얼굴은 언제나 수줍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기에, 지금도 괜히 다시 한번 더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대공께서 모래부터 수업을 진행하신다고 하셨으니까 내일은 평소처럼 지내면 돼. 이후의 스케줄은 다시 조정해줄게.”
“네. 알겠어요.”
“독서하고 있는데 누나가 방해해서 미안해. 이제 가볼 테니까 너무 늦기 전에 자고. 알았지?”
“방해라뇨. 절대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어요. 언제나 편하실 때 방문해 주세요. 먼 길 다녀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푹 쉬시고요.”
“그래, 고마워. 잘 자.”
“안녕히 주무세요.”
방으로 돌아온 나는 에바와 세바니가 준비해둔 욕조에 몸을 푹 담갔다.
노곤하게 늘어져 욕조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 나온 나는 머리도 다 말리지 않은 채 잠이 들어버렸다.
***
드디어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아몬과 둘이 평화로운 식사 시간을 보내고 가볍게 산책을 즐기다가 그대로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지난 열흘간 있었던 일에 관해 얘기하며 따뜻한 차를 마시니 기분이 좋았다.
물론 율렌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던 것 같이 아몬의 걱정을 살 만한 얘기는 쏙 빼놓고 늘어놓은 이야기였다.
그것만으로도 아몬은 걱정이 가득 묻어나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봐 왔기에 최대한 즐거웠던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아무 걱정 없이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다.’
이제는 아르반의 팔을 걱정해야 할 일도 사라졌으니 온전히 아몬의 양육에만 신경을 써주면 되었으니까.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문제기는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마음의 짐을 하나 덜었다는 것에 만족하며 이 기쁨을 충분히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다 불현듯, 아몬이 엇나가기 전에 빙의되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 그리고 보니 아몬에게 또래의 친구를 만들어 줘야 할 텐데….’
문제는 나 또한 친구가 없다는 것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