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아르반은 살롱을 나와 마차로 걸어가는 중에 내 의사를 물어왔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이대로 공작저까지 모셔다드려도 되겠습니까?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가 출발한다면 그만큼 시간이 지체될 겁니다.”
그의 제안에 솔깃했지만 잠시 멈칫했다.
“그럼 저야 좋겠지만… 아르반 당신이 돌아갈 마차가 없잖아요.”
“댁까지 모셔다드리고 귀환할 예정이니 마차는 하나면 충분합니다. 괜찮으시다면 근처에서 간단히 식사하시고 바로 저택으로 모시죠.”
“공작저까지요?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제가 모셔다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의 단호한 어조에 나는 조금 고민했다.
어차피 중요한 물건도 없고 그의 집에 두고 온 물건이라고는 옷 몇 벌이 전부였다.
나중에 돌려받아도 상관없고 버려도 크게 문제 될 건 없긴 했다.
빌려 입은 드레스도 다음에 세탁해서 돌려주면 되고.
어차피 이제 아르반은 아몬의 검술 스승이 될 것이니 얼굴 볼일은 많았다.
“그럼 호의, 받아들일게요.”
내 승낙에 우리는 인근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공작저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꽤 되었기 때문에 간단하게나마 식사를 하고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외관은 약간 낡아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서니 높은 층고와 화려한 샹들리에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테이블은 높은 칸막이로 인해 룸과 비슷한 형식으로 나뉘어 있어 프라이버시가 보호되는 공간이었다.
직원은 내 복장을 보고 조금 눈이 커졌지만 이내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능숙하게 자리로 안내했다.
예약되어 있지 않을 텐데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안내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는 예약이 없어도 식사가 가능한가 봐요?”
“아뇨. 이렇게 될 경우를 대비해 미리 예약을 잡아두었습니다.”
대체 언제? 나는 아르반의 발 빠른 행동력에 감탄했다.
내가 저택에 들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하리란 것까지 예상한 걸까.
“제가 그냥 저택에서 식사하고 느긋하게 돌아가겠다고 했으면 어쩌시려고 했어요?”
결국 나는 궁금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아르반에게 물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답했다.
“그럼 예약금만 지불하면 되는 일이니 문제 될 건 없었습니다.”
“아.”
그렇지. 그는 대공이었고 나 또한 공작가의 공녀였다.
고작 레스토랑 예약금을 걱정할 만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 아니다.
새삼스러운 사실을 떠올리며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침을 든든히 먹어두어서인지 메인 요리가 나올 때쯤에는 이미 포만감이 가득 차올라 더 먹기가 힘들었다.
그때 마침 옆의 의자에 올려둔 바구니가 살살 흔들렸다.
“율렌, 가만히 있으라니까.”
“그치만 아무도 안 오잖아. 잠깐만 나가서 나도 좀 먹자.”
“안돼. 언제 누가 올 줄 알고?”
아무리 칸막이로 가려져 있다지만 그래도 오픈된 공간인 데다 직원들이 자주 들락거려 율렌을 꺼내줄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음식을 큼직하게 썰어 들고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바구니를 들춰 그 안으로 음식을 넣어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맛있는 건 참 좋아하는 율렌은 그 작은 입으로 잘도 야금야금 받아먹었다.
다시 봐도 저 면적에 이만한 양이 들어가는 게 놀랍기만 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곧장 로베르 영지로 향했다.
아직 완연한 겨울이 오지는 않았기에 낮에는 바람을 쐬기 참 좋은 날씨였다.
나른하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고 있는데 율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너희 집으로 가는 거야?”
“응,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럼 나는?”
“응?”
“나는 엘리랑 같이 있어야 마력을 빨리 회복할 수 있는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냐고.”
나는 잠시 침묵했다.
말을 고르던 나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는 아르반의 드래곤이니까 주인이랑 함께 있어야 하잖아.”
“…그렇긴 하지.”
율렌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바구니에 자리를 잡고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는 모습에 의아해졌지만 이내 고요한 분위기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랑 헤어지는 게 서운한 것 같은데….’
달래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졸려 결국 마차의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는 잠시 눈을 붙였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과 약간 쌀쌀하게 느껴지는 바람, 그리고 만족스러운 식사로 인해 식곤증이 몰려왔다.
“엘리.”
“……!”
그러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이렇게 단번에 꿈에서 깨어나면 꿈속에서의 생생한 기억과 현실 간의 괴리감에 몇 초 정도 정신이 없었다.
파드득거리며 등을 바로 세우자 어깨에 걸쳐있던 무언가가 스르륵 내려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떨어지는 무언가를 받아냈다. 남성용 외투였다.
아무래도 내가 잠든 사이 아르반이 덮어주었던 모양이다.
“아, 제가 많이 잤어요?”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묻자 베스트 차림의 아르반이 답했다.
“그리 많이 주무시지는 않았습니다. 더 주무시게 두고 싶었지만, 저택에 도착해서 부득이하게 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주 푹, 오래도 잤다는 말이군.
나는 머쓱한 마음에 아르반의 겉옷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 때문에 외투도 벗어주고 추웠을 텐데.
“날씨도 쌀쌀한데 그냥 입고 있지…. 저 때문에 미안해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보다 이만 내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 네.”
그의 말처럼 이만 내리려는 데 조용하던 율렌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엘리, 가는 거야?”
“…응, 그러네.”
요 작은 녀석과도 그간 정이 들어 막상 이렇게 헤어지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까 시무룩했던 것도 풀어주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지금 이렇게 보내고 나면 율렌하고는 자주 보기 힘들겠지.’
그 생각을 하니 조금 울컥했다.
하지만 겉으로 티를 내면 더 울적해질 것 같아서 일부러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보자, 율렌. 잘 지내.”
내 인사에 율렌은 눈만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다음에 보자, 엘리.”
차분하고 녀석답지 않은 음성이었다.
나는 불편한 마음을 애써 다잡고 율렌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뒤돌아섰다.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아르반이 먼저 문을 열고 내려 내게 손을 내밀어 왔다.
그 손을 잡고 내리며 하늘을 바라보자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아까보다 확실히 기온이 떨어진 듯했다. 스치는 바람이 차가웠다.
마차 안과 확연히 차이 나는 온도에 적응하지 못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자 아르반은 아까 내게 덮어주었던 자신의 상의를 다시 내 어깨 위에 올려주었다.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르반도 추울 텐데 입어요. 저는 바로 들어가면 되는데요, 뭘.”
“괜찮습니다. 저는 추위를 타는 편이 아니니 입고 계십시오.”
단순히 나를 배려하기 위한 거짓말이라기에는 아르반의 얼굴이 정말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자다 깨서 그런지 더 춥게 느껴졌다.
결국 망설이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반은 저택 안까지 나를 에스코트할 생각인지 내게로 팔을 내밀어왔다.
나는 자연스레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아르반의 에스코트를 받아 저택 입구에 다다르니 시녀장을 선두로 사용인들이 집결하여 나를 맞이해주었다.
‘공작은 오늘도 외출 중인 것 같네.’
시녀장이 마중을 나와 있다는 건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공작의 귀에 들어가고 남을 만한 시간이 존재했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공작이 저택 내에 있다면 나와 보지 않고 배길 리가 없었다.
출발할 때도 일이 있어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는데 아무렴.
그런데 저택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묘한 기운이 점점 커져 갔다.
뭔가 어둡고, 음습한 느낌의 기운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 들어 괜히 찜찜해졌다.
나는 발끝을 한 번 바라보고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기분 탓이겠지….’
나는 애써 나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아르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늦었는데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지 않겠냐고 물어봐야겠다. 공작도 없는 것 같으니 우리 동생님 소개도 해줄 겸.
밥만 먹고 자고, 또 밥만 먹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사람은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하는 법이다.
그리 생각하며 막 운을 떼려는데, 위쪽에서 타다닥-하는 가볍고 날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만 그 소리를 들은 게 아닌지 아르반의 시선 역시 계단 위쪽으로 돌아갔다.
발소리의 주인이 계단 위에서 멈춰 섰는지 아주 잠시간 소리가 끊겼다.
이윽고 조용하고 소리 없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뛰어 내려온 걸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알게 되었음에도 혼자만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아몬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햇살처럼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몬의 천진해 보이는 표정에 나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아몬을 보자 들뜨는 마음에 아르반이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빠른 걸음으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 때문에 어깨에 걸쳐져 있던 겉옷이 흘러내리고, 그걸 아르반이 자연스레 잡아채 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고작 열흘이었음에도 아주 오랜만에 재회한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서였을까, 마음이 들떠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나는 아몬보다 먼저 계단 아래 서서 내려오는 아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몬은 순간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내 얼굴을 보고는 머뭇거리며 조심히 품에 안겨들었다.
나는 그런 아몬이 너무 예뻐 아이를 품에 끌어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설마 내가 자신을 들어 올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몬의 몸이 움찔, 하고 크게 튀었다.
나는 혹여라도 아이를 놓칠까 싶어 팔에 힘을 꽉 줘 아몬의 몸을 더 단단히 고정시켰다.
제법 묵직하긴 했지만, 잠깐을 들고 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누나 없는 동안에도 사용인들이 잘 챙겨줬지?”
“네, 그럼요. 잘 챙겨줬어요.”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아몬의 모습에 나 또한 환히 미소 지었다.
그러자 아몬의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조금 더 크게 확장되었다. 나는 그대로 아몬을 안아 든 채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아르반에게 잔뜩 올라간 텐션 그대로 아몬을 소개해 주었다.
“아르… 각하, 이쪽이 제 동생 아몬이에요. 아몬, 여긴 아르반 카넬로웰 대공 각하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