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너무 뜬금없어 맥락을 잡을 수 없는 그의 사과에 리엘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한테 뭐 실수라도 했나?’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뭐가요? 저한테 뭐 미안할 짓 한 게 있어서 이실직고하시는 거예요, 지금?”
리엘리의 물음에 아르반은 그녀의 눈을 피해 조금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분의 옷을 입고 있는 게 불쾌하시지 않습니까. 실례됨을 알고도 내어드린 점은 분명한 제 실책이니 옷은 원하시는 만큼 구매해 드리겠습니다.”
“…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불쾌할 게 뭐가 있겠어요? 미리 말씀도 해주셨고 다 알고 입었는데.”
리엘리는 어떤 부분에서 제 기분이 상했다고 판단하여 아르반이 흔치 않은 저자세로 사과해오는지 생각해보았다.
“아, 혹시 제가 새 옷 사려고 했단 거. 그 말 때문에 오해했어요?”
“…아닙니다. 돌아가신 분의 물건은 모두 태워버리는 게 당연한 수순임에도 그러지 않은 건 저니까요. 더구나 그 옷을 당신에게 권하기까지 했으니, 비난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리엘리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게 당연한 관례라 한들 그가 허락하고 제가 동의한 바였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기분이 나빴다면 애초에 입지도 않았겠죠. 제 기분을 걱정했던 거라면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눈은 왜 피하는 걸까.
리엘리는 애매하게 자신을 비껴간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아르반. 이쪽 봐요.”
본의 아니게 권위적인 말투가 튀어 나갔다. 하지만 리엘리는 아르반에게 신경을 기울이느라 제 말투의 문제점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아르반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명령에 순간 몸을 굳혔다.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무시해도 되는 상황임에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길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확인한 리엘리는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하게 말할 테니 잘 들어요.”
“…예, 말씀하십시오.”
“내가 옷을 사러 가자고 말한 건 당신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기 싫거나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당신이 자꾸 그런 표정으로 날 보니까, 신경이 쓰여서 그런 것뿐이에요.”
더불어 공작의 시선을 고려한 것이지만, 필요 없는 사족은 붙이지 않았다.
“표정… 말입니까?”
아르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뺨과 입가를 더듬었다.
분명 여느 때와 같은 표정 없는 얼굴일 터였다. 항상 그래왔듯이, 교육받아온 그대로.
그런 아르반의 모습에 리엘리는 답답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표정이 아니라 뭐랄까… 분위기가 그래요.”
“…….”
“항상 대화할 때는 눈을 마주하고 말하는 사람이 아까부터 자꾸 시선도 아래로 떨어지고…. 평소랑 다른 거라고는 이 옷 하나뿐인데 그것도 눈치 못 채겠어요?”
분명 아르반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무표정 일색이었다.
하지만 리엘리는 요즘 아르반을 마주할 때면 그의 눈빛과 분위기로 약간은 그의 기분이나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표정도 다 같은 무표정은 아니니까.’
정말 미세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남에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읽어낼 수 있는 변화가.
리엘리는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함께하는 사이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가까워진 것 같아 뿌듯했다.
하지만 아르반으로서는 그녀의 설명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제가 그랬습니까?”
“네. 그러셨어요.”
그리고 지금도 그러고 계시네요. 리엘리는 뒷말을 삼켰다.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의 그녀는 맞은 편에 앉은 아르반을 바라봤다.
자꾸만 제게서 떨어지려는 그의 시선이 거슬렸다.
“어찌 됐든, 당신이 저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그래도 옷은 새로 사 입는 편이 서로 마음 편할 것 같으니까, 일단 사러 가도록 해요.”
“…그러죠.”
다시 침묵이 감도는 마차 안에서 아르반은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그는 불과 몇 시간 동안의 제 태도를 돌이켜 보았다.
전 대공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이리도 풀어졌던가.
도대체 얼마나 해이해졌는지 지적을 받고서야 자신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한 자괴감이 이는 한편으로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처음 겪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아르반은 눈꺼풀을 닫아버렸다.
그녀의 말 몇 마디에 불안이 가시고 마음이 놓였다.
자신이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었던가. 고작 말 몇 마디에 불안했던 마음이 안정을 찾다니.
그는 지금보다 풀어지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과연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아르반의 시선이 율렌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짐작했다.
“율렌, 다 왔어. 내리자.”
“아냐. 난 그냥 여기 있을게. 다녀와.”
“어? 진짜?”
확실히 흥미가 떨어진 듯 보이기는 했지만 정말 극명하게 바뀐 율렌의 태도에 놀라 되물었다.
율렌은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쳐다봤다.
“별로 바뀐 것도 없고, 나가봐야 바구니 안에 있어야 하는 건 같은데 뭐.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다녀와.”
심드렁하다 못해 시니컬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정말 녀석의 관심이 식어버렸음을 실감한 나는 작은 머리를 한 번 쓸어주었다.
“그래…. 알았어. 그럼 빨리 다녀올게.”
“갔다 와.”
율렌은 제 머리를 쓰다듬었던 내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바구니 속으로 머리를 쏙 집어넣었다.
우리가 없는 동안 마차 내부에 다른 사용인이 올라타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바구니 위에 천을 덮어두었다.
그렇게 아르반의 손을 잡고 들어간 살롱은 이전에 방문했던 로즈니의 살롱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비단 로즈니의 살롱뿐만이 아니라 수도에서 마차 밖으로 언 듯 보았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살롱들과도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게 낙후되었다거나,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달까.
뭐, 어차피 대단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한 드레스를 맞추러 온 것도 아니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 한 벌이면 족하니까 상관없기도 했다.
살롱으로 들어서자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아마도 밖에 세워진 마차의 엠블럼을 봤거나 아르반의 얼굴을 알아본 듯했다.
나는 빠짝 긴장해 뻣뻣하게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가게 주인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여기 혹시 승마복이 있을까요?”
“스… 승마복 말씀이십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주문이었는지, 가게 주인은 더욱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음, 아무래도 빨리 이곳을 나가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보였다.
“네, 승마복이요. 제가 입을 건데, 마땅한 게 있을까요?”
“예… 예. 있습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금방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녀는 눈에 띄게 아르반 쪽을 의식하며 종업원이 뒤를 지키고 있음에도 직접 발을 떼 안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몇 벌의 승마복을 꺼내 온 가게 주인은 옆의 행거에 옷들을 걸어두고 내 치수를 측정하기 위해 줄자를 가지고 다가왔다.
“영애, 치수를 재야 하니 이쪽으로….”
나는 줄자를 들고 내게 손짓하는 그녀에게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아뇨, 어차피 여기 있는 것들이 다인 것 같은데 그냥 몸에 대보고 맞을 것 같은 거로 입을게요.”
나는 곧장 옷들을 뒤적거렸다.
그중 손에 걸린 한 벌이 그나마 내 사이즈에 맞을 것 같아 몸에 대보았다. 흐음….
“이거 저한테 맞을 것 같은데, 각하가 보시기엔 어때요?”
그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추 맞을 것 같군요.”
“좋아. 그럼 이거 입어볼게요.”
내 말에 줄자를 든 채로 얼이 벙벙해 있던 가게 주인은 퍼뜩 정신을 차렸는지 빠르게 나를 안내했다.
안쪽의 피팅룸으로 들어서는데 종업원이 나를 따라 들어오려는 것을 제지하고 혼자 들어갔다.
드레스도 아니고 승마복을 입는 데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
피팅룸 안쪽에 거울이 없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얼추 맞는 것 같았다. 딱히 불편하지도 않고.
품이 약간 큰 듯했지만 널널해서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주인과 종업원, 그리고 아르반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몰렸다.
그게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라 슬쩍 눈을 돌려 거울을 확인했다.
괜찮네. 역시 잘 맞았다.
아까는 승마 부츠를 신고 드레스를 입어서 이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썩 잘 어울린다는 느낌도 아니었는데, 이제야 퍼즐이 들어맞은 것처럼 제 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너무 잘 어울리세요, 영애. 어쩜 이렇게 아름다우신지… 승마복을 입으시니 꼭 기사님처럼 늠름해 보이세요.”
가게 주인은 내게 칭찬의 말을 뱉어왔지만, 상당히 어색해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렇겠지. 드레스도 아니고 승마복을 입은 아가씨에게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냥 웃어주었다.
거울을 좀 더 들여다보던 나는 몸을 빙글 돌려 아르반에게 질문했다.
“저 괜찮아요?”
“잘 어울리십니다.”
심플하기 그지없는 한 마디였지만 그 안에 깃든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가슴을 쭉 폈다. 기분이 좋아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사실 내가 봐도 승마복 입은 모습이 정말 근사해 보였다.
아마 의상 자체가 고급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것도 한몫했으리라.
로즈니의 의상을 접하고 눈이 상당히 높아진 내게도 흡족하다는 감상을 끌어냈으니, 꽤 괜찮은 솜씨였다.
‘음, 근데 생각만큼 편하지는 않네….’
로즈니가 만들어 준 옷들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건 물론이요, 편안함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이건 공작저로 돌아갈 때까지만 입으면 되니까. 불편해도 어쩌겠어, 참아야지.
“이거면 될 것 같아요.”
“더 골라보시죠. 마음에 드시는 것으로 원하는 만큼 사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정말 이 한 벌이면 괜찮아요. 빨리 집으로 돌아가 봐야 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솔직히 워낙 최고급품에 익숙해져 버려 별로 눈에 차는 물건이 없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아르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내 모습이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옷 몇 벌보다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알아준 모양이다.